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2세

다른 표기 언어 Nikolay II , Николай II 동의어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Nikolai II Alexandrovich Romanov
요약 테이블
출생 1868. 5. 18(구력 5. 6),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차르스코예셀로
사망 1918. 7. 16/17, 예카테린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개인적인 매력은 있었지만 천성이 소심한 인물로, 무능하고 전제적인 통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신하들과는 가까이 접촉하지 않으려 했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개인생활을 더 좋아했다. 1894년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1905년 자문 권한을 가지는 의회인 두마의 요구에 따라 민주적 참정권과 입헌정치를 실시하기로 약속했으나,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스스로 최고 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이끌었으나, 장비의 열세와 지휘관들의 무력함으로 러시아 군대는 참패를 거듭했다. 식량 부족을 견디다 못해 일어난 시민 봉기는 혁명으로 이어졌고,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퇴위했다. 10월혁명 뒤 황후 알렉산드라, 아이들과 함께 볼셰비키에게 처형당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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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재위
  3. 제1차 세계대전
  4. 퇴위와 죽음
니콜라이 2세(Nikolay II)
니콜라이 2세(Nikolay II)

개요

무능하고 전제적인 통치자라는 일반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10월혁명 뒤 황후 알렉산드라, 아이들과 함께 볼셰비키에게 처형당했다.

초기생애와 재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1881년 알렉산드르 3세로 즉위)와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자비(덴마크 출신으로 본명은 다그마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94년 11월 1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고 1896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가 받은 교육이나 성품으로 보아 니콜라이는 광대한 제국의 전제군주로서 복잡한 각종 업무를 처리하기에는 적당한 인물이 아니었다. 가정교사에게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취향이나 관심은 당시의 젊은 러시아 근위장교들이 가졌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지적인 자질이 거의 없던 그는 운동이나 군대의 제복·계급장·행진 등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안절부절했다. 개인적인 매력은 있었지만 천성이 소심한 인물로서, 신하들과는 가까이 접촉하지 않으려 했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개인생활을 더 좋아했다. 가정생활은 평온했고 1894년 11월 26일에 결혼한 아내 알렉산드라에게는 정열적인 사랑을 바쳤다. 알렉산드라는 그가 갖추지 못한 강인한 성격을 가진 여성으로, 그녀는 니콜라이를 완전히 지배했다.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심령술사들과 신앙요법사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가운데 라스푸틴은 가장 유명한 인물로 황제와 황후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니콜라이의 주위에는 무책임한 신하들이 많았다.

이들은 성실성이 의심스러운 사람들로 러시아 국민들의 생활상을 왜곡해서 그에게 전했다. 그러나 니콜라이에게는 이들의 말이 공식보고서에 있는 내용들보다 위안이 되었다. 그는 내각의 장관들을 불신했는데 그들이 자기보다 더 지적으로 뛰어나다고 느꼈고 그들이 자신을 밀어내고 황제의 권력을 빼앗지 않을까 두려워했기때문이었다. 전제군주의 역할에 관한 니콜라이의 견해는 어린아이처럼 단순했다. 그는 자신이 신에게서 전제권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오로지 자기만이 신에게 책임을 지며, 따라서 자신의 절대권을 잘 보존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과업을 그토록 의기양양하게 여기는 사람이 갖춰야 할 의지력이 없었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니콜라이는 천성적인 우유부단함을 억제하는 한편 자신만만하게 결정을 내리는 척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는 전제정치의 원칙을 지키려 몹시 애썼으면서 제국 체제를 연장할 수 있는 건설적인 정책을 실시하지 못했다(절대주의).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니콜라이는 지방자치의회인 젬스트보(zemstvo)의 자유주의파 의원들에게 한 연설에서 정부 업무를 나누어 가지려는 의원들의 희망을 '분별없는 꿈'이라고 무시하는 비타협적인 견해를 밝혔다.

결국 점점 확산되는 국민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와 그에 따른 경찰의 과격한 진압에 직면했다. 외교정책에서는 국가간의 책임을 순진하고 안일한 태도로 받아들여 때로는 러시아의 전문 외교관들까지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예로 1905년 7월 비외르쾨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만나면서 동맹을 체결한 적이 있는데 당시 러시아는 이미 독일의 숙적인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니콜라이는 러시아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아시아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다.

황태자 시절이었던 1891년 인도·중국·일본을 방문했고 후에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의 명목상 감독을 맡기도 했다. 또한 이미 일본이 발판을 마련한 한국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유지·강화하려고 했고, 이것이 한 원인이 되어 러일전쟁(1904~05)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패전은 러시아를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거대한 제국으로 만들어 중국·티베트·페르시아를 거느리려 했던 니콜라이의 원대한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고 국가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다.

결국 이에 대한 불만이 1905년의 혁명운동으로 확산되어갔다(1905년 혁명).

니콜라이는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든지 모두 사악한 음모가들이라고 생각했다. 그후에 총리가 된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가 헌법주의자들에게 양보하라고 충고했으나 이를 무시해 오히려 더많이 양보해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1905년 3월 3일 니콜라이는 자문권한을 가지는 의회인 두마(Duma)를 새로 만들기로 마지못해 동의했다. 또한 10월 30일 성명서를 발표해 두마의 동의없이는 어떠한 법률도 효력을 가질 수 없으며 민주적인 참정권과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입헌정치를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강요에 못 이겨 발표한 이 약속을 지키는 데는 무관심했고 옛 권력을 되찾으려 몹시 애썼으며 '기본법'(1906. 5)을 새로 제정해 여전히 전제군주임을 확실히 했다.

또한 테러를 인정하면서 반(反)유대주의를 선전하고 다니던 극우조직인 '러시아 인민동맹'을 후원했다. 니콜라이는 10월 성명을 발표하게 한 책임으로 비테를 해임시키고 제1, 2차 두마를 '반항자'라는 이유로 자리도 잡기 전에 해산시켰다.

비테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은 황제에 충성하는 능력있는 정치가로 1907년 6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켜 제2차 두마를 해산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스톨리핀을 믿지 않아 음모에 말려 지위가 흔들리도록 내버려두었다. 스톨리핀은 라스푸틴의 세력을 비판하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황후의 노여움을 샀다. 이런 때 니콜라이는 머뭇거리다가도 결국 알렉산드라의 압력에 굴복하곤 했다. 그는 라스푸틴이 황실을 움직이고 있다는 수치스런 사실이 탄로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교회의 권위를 지키려는 사람들에 반감을 가진 반동세력들을 밀어주었고 성의회(聖議會)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에 멋대로 개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

극동진출 야심이 일본 때문에 꺾이자 니콜라이는 발칸 반도로 눈을 돌렸다.

그는 슬라브인들의 민족주의적 열망에 뜻을 같이 했고 오스만 투르크가 차지한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러스 해협의 통제권을 쥐고 싶었으나 열강들끼리의 평화를 지키려는 진지한 열망에서 자신의 이같은 팽창주의적 성향을 잘 다스렸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닥쳐온 전쟁을 피하려 노력했고 부분적 동원이 아닌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자는 군부의 압력에 맞서 1914년 7월 30일까지 버텼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군주제가 일시적으로 강화되었으나 니콜라이는 국민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두마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자생적인 애국조직들은 지배세력과 일반 국민들 사이의 이견이 더 깊어져 활동에 방해를 받았다. 알렉산드라는 니콜라이의 마음을 움직여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사촌이자 인기있는 총사령관인 니콜라이 대공에게 등을 돌리게 했다.

결국 황제는 1915년 9월 5일 대공을 해임하고 자기가 최고 사령관 자리에 앉았다. 황제는 전쟁경험이 전혀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장관들은 이 조처가 군의 사기를 해칠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그는 이들의 주장을 억눌렀고 곧 해임시켰다.

니콜라이 2세는 작전결정에까지 부당하게 간섭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사령부로 떠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즉 그가 자리를 비울 때 최고권력은 그의 승인과 격려에 힘입어 황후에게로 넘어갔고 그결과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도 능력있는 장관들과 관리들은 쫓겨나고 라스푸틴이 뽑은 무능한 인물들이 그 자리를 메꿨다.

황실이 국민을 배신한다는 의구심이 널리 퍼졌고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반감이 급속히 확산되어갔다. 보수파들은 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해 니콜라이를 퇴위시키려 했다. 라스푸틴의 암살도 니콜라이의 환상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는 황실 가족의 일원을 포함한 고위인사들이 간언을 해 왔을때와 마찬가지로 이같은 불길한 경고들을 맹목적으로 무시했고, 결국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퇴위와 죽음

1917년 3월 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니콜라이는 시(市)를 관할하는 사령관에게 확고한 조치를 지시하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켰다(1917년 혁명).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정부는 물러났고 군의 지원을 받은 두마는 황제에게 퇴위할 것을 요구했다.

3월 15일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는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침착하게 제위를 포기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아들 알렉세이가 아니라 동생 미하일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기겠다고 발표했으나 미하일은 이를 거절했다.

임시정부의 총리 리보프 공은 니콜라이의 가족들을 차르스코예셀로에 구금했다. 이들을 영국으로 보내려고 계획했으나 혁명노동자·병사위원회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반대하여 이들은 서(西)시베리아의 토볼스크로 보내졌다. 이로서 이들의 운명은 끝났다. 1918년 4월 니콜라이와 그 가족들은 우랄 산맥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로 옮겨졌다.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러시아 '백군'(白軍)이 이곳으로 진격하자 지방당국은 이들이 황제 일가를 구출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7월 16일 밤에서 17일 새벽 사이에 니콜라이의 가족들은 갇혀 있던 집 지하실에서 모두 학살당한 후 불태워져 폐광이 된 광산 갱도에 던져졌다. 이 사실은 예카테린부르크가 '백군'에게 점령된 뒤 조사를 통해 비로소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