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테

비테

다른 표기 언어 Sergey Yulyevich, Graf Wi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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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9. 6. 29(구력 6. 17), 러시아 조지아 트빌리시
사망 1915. 3. 13(구력 2. 28), 페트로그라드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의 정치가.

재무장관(1892~1903)이자 러시아 제국 헌법에 따라 임명된 초대 총리(1905~06)이며 강력한 권위주의 정치와 서방 노선에 따른 근대화를 결합하려고 애썼다.

아버지는 네덜란드계 러시아인으로 카프카스 총독부의 농업국 국장이었고 어머니는 명문 귀족 출신 공무원의 딸이었다.

카프카스에서 보낸 비테의 어린시절은 행복했다. 오데사에서 노보로시스키대학교(지금의 오데사주립대학교) 수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부모의 친구인 교통장관의 충고에 따라 철도행정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를 러시아 제국의 정치와 재정의 심장부로 데려다준 경력의 출발점이었다. 오데사와 베사라비아 총독 비서실에서 잠시 일한(1871~74) 뒤, 교통부 오데사 지부에서 오데사 철도행정을 연구했다.

그는 절도 있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는데, 집안이 가난한 탓도 있었지만 성공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기도 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78)이 끝났을 때는 이미 오데사 철도망을 통해 전선으로 가는 모든 열차를 통제하는 지위에 올랐다. 교통량이 늘어나 철도 수송이 한계에 이르자 그는 철도의 교통 정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2교대 제도를 고안했다. 그는 유대인·폴란드인·우크라이나인 등을 민족에 상관 없이 부하직원으로 임명하고 언론과도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관료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철도 통계를 활용하고 화물운송 요금은 낮추되 세금 수입은 늘리는 효율적인 화물 운임표를 시행함으로써 경제적 통찰력을 과시했다.

1889년 비테는 재무부에 철도국을 창설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이후, 빠른 속도로 승진해 잇따라 교통장관(1892. 2)과 재무장관(1892. 8)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경제개발을 위한 장기계획은 그의 정책의 핵심이었다. 그는 '국가의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조건을 제거하고, 건강한 기업정신을 자극하는 것'(비테가 1893년에 황제에게 올린 최초의 예산안)을 목표로 삼았고 국가권력을 충분히 활용해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산업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자본 마련을 위해 국립은행을 개편했고 러시아선박회사와 선원학교 및 공업기술학교를 세웠다. 은행 저축이 장려되었고, 상법이 개정되었으며, 루블 화는 태환지폐로 바뀌었다. 그는 또한 러시아의 산업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영국·벨기에·독일의 투자가들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끌어모으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철도 건설,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실제로 착공한 것은 1891년) 건설에 가장 많은 노력을 쏟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도시의 진보를 시골로 전파하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경제를 활성화하는 요인이며, 러시아를 유럽 지역과 아시아 지역을 잇는 연결고리로, 또 서유럽과 극동지역 사이의 중요한 중개자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비테 체제'는 거의 10년 동안 상당한 성공을 누렸다. 그러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국제정세가 불안해져(보어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중국의 의화단 운동) 러시아로 유입되는 외국 차관이 줄어들었다.

또한 러시아 국내의 잇따른 파업과 농민반란은 비테의 정책이 강요하는 생활수준 저하를 국민 대다수가 더이상 견뎌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드러내주었다. 더욱이 총력을 기울여 산업화를 지원하는 비테에게 항상 적대적인 세력인 지주들은 궁정에서 비테에 대한 반대의사를 노골적으로 밝혔다. 이 정력적인 장관을 두려워했던 황제 니콜라이 2세와의 관계 역시 좋지 못했다.

1903년 8월 재무장관직에서 해임된 그는 거의 장식물에 불과한 장관위원회 의장직에 임명되었다. 러시아 정부가 일본과 무모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을 때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1905, 1906년에 제국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을 하게 되었다. 1905년 7월 일본과 평화협상을 벌일 러시아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뜻밖에도 러시아에 유리한 조건을 얻어냈지만 이런 업적도 그의 인기를 높여주지는 못했다(러일전쟁).

정치적 차원에서 그는 어떤 형태의 입헌제도 싫어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일정한 범위의 대의정부를 약속한 1905년의 '10월선언'을 발표하도록 황제를 설득했다. 그가 이 새로운 정부의 총리로서 맡은 역할 또한 중요하다. 총리가 되자마자 1905~06년으로 넘어가는 가을과 겨울에 나라를 분열시키는 모든 세력, 예를 들면 노동자평의회라고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극동지방의 군대폭동, 남부 러시아의 파업, 발트 해 지방의 농민봉기 등을 진압했다(1905년 러시아 혁명). 또한 극동지방에서 겪은 패전과 1905년에 일어난 광범위한 반란의 영향으로 사실상 붕괴상태에 직면한 러시아의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유럽 은행가들과 벌인 일련의 차관 교섭을 1906년에 마무리짓는 데 이바지했다.

이것이 비테가 국가에 봉사한 마지막 기회였다. 황제에게 받았던 약간의 신임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에 1906년 4월 총리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끝내 공직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력도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914~15년의 여름과 겨울,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반대 노력도 헛수고였다. 이후 그는 독일 정부가 그와 친한 독일 은행가를 통해 보낸 비밀 평화사절들에게 동조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에 다가오고 있는 재앙을 내다보면서 낙담과 고통 속에서 죽었다.

비테에 대한 평가

비테에 대한 평판은 전제정치의 붕괴와 관련해 처음에는 과소평가되었지만 지금은 후진국 러시아를 근대화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표트르 대제의 후계자로, 그리고 위로부터의 산업혁명을 정책적으로 시행했다는 점에서 공산당의 선구자로 평가 받고 있다. 1892~1903년의 '비테 시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비테는 그에게 동조하지도 않으며 공업화와 양립할 수 없었을 정치 환경 속에서 일했고 결국 그때문에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