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트로츠키

다른 표기 언어 Leon Trot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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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9. 11. 7(구력 10. 26), 러시아 우크라이나 야노프카
사망 1940. 8. 20, 멕시코 시 근처 코요아칸
국적 러시아

요약 민주적 방식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멘셰비키 편에 서서 레닌과 볼셰비키에 반대했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지도자였으며 소련 외무 및 군사 인민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레닌이 죽은 뒤 일어난 권력투쟁 과정에서 요시프 스탈린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추방당했다. 스탈린 앞잡이에게 암살당할 때까지 해외에서 반스탈린 세력을 지도했다. 1898년 1월 혁명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는데, 1902년 트로츠키라는 이름으로 위조된 여권을 가지고 탈출했다. 이때부터 그는 이 이름을 혁명가로서 자신의 가명으로 사용했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볼셰비키당에 입당, 소비에트 의장으로 10월 봉기를 지휘했다. 레닌 사후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각을 이루다가 권력을 빼앗기고, 1926년 정치국에서 추방, 1년 뒤에는 중앙위원회에서도 쫓겨났다. 이후 공산당에서 제명된 그는 1928년 국외로 추방되었고,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교육·혁명활동
  3. 1917년 혁명
  4. 소비에트 정부 내에서의 역할
  5. 권력계승투쟁
  6. 망명과 암살
  7. 평가
트로츠키 (Leon Trotsky)
트로츠키 (Leon Trotsky)

개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지도자였으며 소련 외무 및 군사 인민위원을 지냈다(1917~24). 그러나 레닌이 죽은 뒤 일어난 권력투쟁 과정에서 요시프 스탈린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추방당했다(1929). 스탈린 앞잡이에게 암살당할 때까지 해외에서 반(反)스탈린 세력을 지도했다(소련 공산당).

초기생애·교육·혁명활동

아버지 다비드 브론슈타인은 러시아의 유대인 출신 농부로 대초원 지역의 식민지 이주자였고, 어머니 안나는 교육받은 중산계급 출신이었다.

형과 누나가 1명씩 있었고 2명의 형제는 어릴 때 죽었다. 8세 때 오데사에 있는 학교에 들어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외사촌 가족과 함께 8년을 보냈다. 1896년 니콜라예프로 옮겨 학업을 마쳤으며, 이곳에서 지하 사회주의 모임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를 접했다. 잠시 오데사대학교에 다닌 뒤 니콜라예프로 돌아와 지하조직 '남러시아 노동자 연맹'의 창설을 도왔다.

1898년 1월 혁명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4년 반 동안 투옥된 뒤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그 사이 혁명동지인 알렉산드라 소콜로프스카야와 결혼해 2명의 딸을 두었다. 1902년 트로츠키라는 이름으로 위조된 여권을 가지고 도망쳤는데, 그는 이 이름을 혁명가로서 자신의 가명으로 채택했다. 부인은 남았으며 그뒤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런던으로 가 혁명적 신문 〈이스크라 Iskra〉를 발행하는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레닌)와 함께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합류했다.

1903년 7월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민주적 방식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멘셰비키 편에 서서 레닌과 볼셰비키에 반대했다. 그 직전 파리에서 나탈리야 세도바를 만나 결혼했으며, 레프와 세르게이라는 2명의 아들을 두었다. 1905년 혁명적 소요가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소비에트가 혁명적인 파업운동과 차르 정부에 대항하는 여러 반란을 조직했을 때 그는 소비에트의 지도적인 대변인이 되었는데, 이때문에 1906년 다시 투옥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투옥기간에 주요저서의 하나인 〈결과와 전망 Results and Prospects〉을 쓰면서 영구혁명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1907년 다시 시베리아로 유배된 그는 빈으로 도망쳐 정착했다. 그리고 1912~13년 발칸 전쟁기간에 통신원으로서 생계를 유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차르 정부의 전쟁 기도에 반대하고 전쟁을 비난하던 러시아 사회민주당 다수파에 합류했다.

스위스로 옮긴 뒤 파리로 갔으나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추방당했다. 1917년 1월 뉴욕 시에 도착한 그는 볼셰비키 이론가 니콜라이 부하린을 만나 그와 함께 러시아어로 된 신문 〈노비 미르 Novy Mir〉를 발행했다.

1917년 혁명

트로츠키는 러시아 3월(구력 2월) 혁명을 자신이 예언한 영구혁명의 시작으로 보고 환영했다.

5월 중순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그는 좌익 멘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7월봉기가 실패하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끄는 자유주의 정부가 볼셰비키 지도자에 대한 일제단속을 실시할 때 다시 체포되었다. 감옥에 있던 8월 볼셰비키당에 정식 입당했으며,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9월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다. 11월 6일(구력 10. 24) 아침 일찍 실시된 무능한 정부의 일제검거에 대항한 투쟁이 한층 활발해지자, 트로츠키는 주도적으로 소비에트가 취할 대책을 강구했다.

한편 러시아 국민들은 트로츠키의 군사혁명위원회만이 소비에트 평의회를 보호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정부는 급속도로 무너졌다. 레닌이 11월 7일 지하에서 나와 혁명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튿날 소비에트 평의회가 개최될 때 페트로그라드 대부분은 볼셰비키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케렌스키가 황제에 충성하는 군대를 이끌고 페트로그라드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을 때, 트로츠키는 계속 혁명 군사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군대를 조직하고 지휘해 11월 13일 풀코보 전투에서 케렌스키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그 직후 그는 멘셰비키와 러시아 사회혁명당(SR)을 포함한 연립정부를 구성하자는 자신의 제안을 포기하고 레닌에 합류했다.

소비에트 정부 내에서의 역할

외무 인민위원으로서 트로츠키가 처음 맡은 일은 교전국간에 즉각적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볼셰비키의 평화계획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연합국 정부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으나 독일과 그 동맹국이 이에 응함으로써 12월 중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평화회담이 시작되었다. 1918년 1월 트로츠키는 개인적으로 평화협상에 들어가 회담을 선전장으로 바꿔버림으로써 회담 상대국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회담을 휴회하고 독일 합병주의자들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레닌은 평화에 대한 대가를 독일에 지불함으로써 소비에트 정부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레닌의 입장과 완전한 혁명전쟁을 요구하는 부하린 사이에서 트로츠키는 '전쟁도 강화도 아닌' 처방을 제안했다. 2월 중순 독일이 공격을 재개하자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트로츠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투표를 기권하고 레닌의 제안(독일이 내세운 조건을 받아들이자는)을 택했다.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된 뒤 트로츠키는 외무 인민위원직을 게오르기 치체린에게 넘겨주고 곧바로 군사 인민위원이 되었다.

그때까지 최고군사회의 의장을 겸임했던 군사 인민위원으로서 그는 과거 러시아 군대의 혼란 상태에서 벗어나 적군(赤軍)을 새로 창설, 내전과 외국의 간섭이라는 절박한 위협에 맞서 공산주의 정부를 지켜야 할 어려운 임무에 직면했다. 트로츠키는 소규모이지만 훈련되고 전문적 능력을 갖춘 군대로 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혁명 이상과 유격전술을 포기한 트로츠키의 방식은 다른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커다란 비판을 받았다. 그가 차르 시대에 장교를 지냈던 사람(군사전문가)들을 모집해 공산당 군사 인민위원들의 지휘를 받게 한 일이 특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순수 극좌파와 경쟁관계에 있는 당 지도자, 특히 스탈린이 서로 연합해 이러한 트로츠키의 군사정책에 반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차리트신(나중에 스탈린그라드, 지금의 볼고그라드) 시(市)의 방어를 둘러싸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트로츠키의 군사정책은 적군이 1918, 1919년 백군(白軍)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정당한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1920년 공산당의 승리로 내전이 끝나자 트로츠키는 군사 인민위원직을 계속 유지하면서 러시아 경제복구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먼저 '전시(戰時) 공산주의' 정책의 엄격한 집중화를 풀고 시장원리 도입을 제안했다.

이것이 거부되자 그는 병사들을 노동군대로 활용하고 수송체계 관리의 군사화를 시도하는 등 군사적 규율을 경제에 적용하려고 애썼다. 내전과 소비에트 정권의 전시공산주의 기간 동안 트로츠키는 명백하게 레닌에 버금가는 2인자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1919년에 설립된 공산당 최고 정책결정 기구인 정치국 초대 위원 5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지적 능력과 행정적 유능성 면에서는 레닌보다 우수해 주저없이 레닌에게 반대하기도 했지만 당의 결정을 얻는 정치공작 능력은 부족했다. 1919년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설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제3인터내셔널 창립 선언문을 쓰기도 했다.

1920~21년 겨울, 일반대중뿐만 아니라 당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둘러싸고 광범위한 분쟁이 일어났다.

논쟁의 핵심은 앞으로의 노동조합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좌파 이상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산업 전체를 관리하기를 바랐으나, 레닌을 비롯한 보다 조심스러운 입장에서는 노동조합이 노동조건을 감독하는 역할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은 중앙국가기관을 대표하는 노동조합이 행정을 담당하는 방안을 구상하면서 이러한 급진주의와 실용주의의 견해를 조정하려 했다. 1921년 3월 한편으로는 당 내부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동요가 일어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크론슈타트에서 해군 수비대를 중심으로 군사적 반란이 일어나 당 지도부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트로츠키는 레닌 편에 서서 군대를 지휘해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하고 당내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나는 분파 행동을 억압했다. 그는 레닌이 노동조합에 대해 가지고 있던 보수적인 견해를 포함해 신경제정책(NEP)에 찬성함으로써 레닌이 이상적 공산주의에서 후퇴한 것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1921년 3월 제10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했다.

권력계승투쟁

1922년 5월 레닌이 처음으로 뇌출혈을 일으켰을 때, 결국 누가 러시아 지도자 자리를 계승할 것인가가 긴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의 경력과 카리스마적 기질 덕분에 트로츠키는 당원들의 눈에도 분명한 후보자로 보였으나, 그를 시기한 정치국 동료들이 그에 대항해 서로 힘을 합쳤다. 이런 권력투쟁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정치국은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스탈린으로 이루어진 3두정치를 비공식 지도체제로 선택했다.

1922~23년 겨울, 어느 정도 회복된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3두 지배체제의 잘못 특히 대외무역정책과 소수 민족의 처리, 관료정치 개혁의 오류를 바로잡을 것을 요청했다.

1922년 12월 레닌은 비밀 '유서'에서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분열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트로츠키를 '비범한 능력'을 가졌지만 '자신감이 지나치고 기질적으로 업무의 순수한 행정적인 측면에 지나치게 매료되어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1923년 3월 마지막 뇌출혈을 일으켜 침묵 상태에 빠지기 직전 레닌은 트로츠키를 불러 스탈린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나, 트로츠키는 지노비예프에 대항한 동맹결성을 계획하면서 때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스탈린은 1923년 4월 제12차 당대회에서 급속도로 중앙위원회의 권력을 장악했다.

가을이 되자 비밀경찰이 당 내부에 침투해 군사인민위원회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약화시키려 한다는 사실에 놀란 트로츠키는 당 지도부에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10월 그는 중앙위원회가 특히 당내 민주주의를 위반했으며 적절한 경제계획을 개발하는 데 실패했음을 강조하면서 중앙위원회를 광범위하게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개혁이 약속되었다.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가 취해야 할 태도를 자세하게 적은 서한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것은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을 당파주의와 기회주의에 근거해 반격을 가하는 대규모 선전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결정적 순간에 트로츠키는 확실한 진단을 내릴 수 없는 열병에 걸려 권력 투쟁에 참여하지 못했다. 스탈린은 조직적인 통제를 통해 쉽게 당의 지도권을 장악했으며, 1924년 1월 교묘하게 연출된 제13차 당 대회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멘셰비키와 같은 불법적인 분파적 일탈행위자로 비난함으로써 이 '새로운 과정' 논쟁을 끝냈다.

1주일 뒤 일어난 레닌의 죽음은 트로츠키의 고립을 확인해 주었을 뿐이었다. 흑해 연안에서 요양중이었던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 날짜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해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못했다. 권력의 주역은 스탈린에게 돌아갔다.

트로츠키에 대한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24년 5월에 열린 제13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가 당의 규율을 어겼다는 비난이 되풀이 되자 그는 당의 전능함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공언했으나 허사였다. 가을이 되자 트로츠키는 방향을 돌려 〈1917년 10월의 교훈 The Lessons of October 1917〉이라는 글에서 10월혁명에 대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반대와 소비에트가 고무시킨 독일 공산당 봉기(1923)의 실패를 결부시켰다.

당 지도부는 이에 대해 트로츠키와 레닌주의를 대비하고 혁명에서의 트로츠키의 역할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는 한편, 영구혁명론을 멘셰비키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등 비난을 한층 고조시켰다. 1925년 1월 트로츠키는 군사 인민위원회에서 해임되었다.

1926년초 스탈린-부하린 지도부와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집단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진영이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집단을 비난하자, 트로츠키는 오랜 적이었던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제휴하여 정치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1년 6개월 동안 이들 '연합 반대세력'은 점차 압력이 심해져감에도 불구하고 당원들 앞에서 그들이 비판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이들은 다시 당의 민주주의와 경제계획 같은 문제를 강조했으며, 당 지도부가 부르주아지 세력을 허용한다고 비난하는 한편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을 세계혁명을 포기하려는 구실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당 지도부는 공식적인 비난의 강도를 높였으며 반(反)유대인 운동을 일으켰다. 1926년 10월 트로츠키는 정치국에서 추방되었으며, 1년 뒤에는 지노비예프와 함께 중앙위원회에서도 쫓겨났다. 혁명 10주년 기념식에서 시위를 계획했다가 실패하자 지노비예프와 함께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망명과 암살

1928년 1월 트로츠키와 그의 주요추종자들은 소련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트로츠키에게는 중앙 아시아에 있는 알마아타가 지정되었다. 1929년 1월 트로츠키는 소련 영토에서 쫓겨났다. 처음에는 터키 정부의 허가를 받아 프린키포 섬에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저술활동에 전념해 자서전과 러시아 혁명사를 완성했다. 1933년 프랑스로 옮겨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자 제3인터내셔널을 개혁하려는 희망을 포기하고 추종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혁명 정당을 세우고 제4인터내셔널을 만들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제4인터내셔널 운동(미국에서 이 운동은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나타났음)은 그 소규모 창설회의를 1938년 프랑스에서 공식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름뿐인 조직에 불과했다.

1935년 트로츠키는 노르웨이로 떠나야 했다. 1936년 소비에트의 압력으로 멕시코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 멕시코 코오야칸에 정착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前) 반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결석 반역 재판에서 반역 주도자로 선포되었다(1936~38)(숙청재판). 그러나 나중에 그가 반역 음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조작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듯한 인물들에게 2차례에 걸쳐 암살 공격을 받았다. 첫번째는 그의 집에 대한 기관총 공격이었으나 실패했다. 그의 가족의 신임을 얻고 있던 스페인 공산당원 라몬 메르카데르가 시도한 2번째 암살은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정부는 이 암살사건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주장했고 암살자는 멕시코 법률의 최고형인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평가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으로 유명해진 가장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그는 관심 범위와 통찰의 풍부함 면에서 레닌과 다른 공산당 이론가들을 월등히 앞섰다. 그는 끈기있는 노동자였고 활기찬 대중연설가였으며 단호한 행정가였다. 한편 그는 지도자로서는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뛰어남과 거만함이 공산주의 운동에서 재능이 없는 인물들을 적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레닌의 지도력에 복종하고 자신이 예전에 비난했던 독재방법을 받아들임으로써 볼셰비키에 가담했을 때(1917) 스스로 운명과 타협했던 것 같다.

트로츠키가 레닌을 승계하기 위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면 소비에트 정권의 성격은 특히 외교정책, 문화정책, 공포적 억압의 정도 등에서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질과 공산당 조직에 의한 권위주의적 지배라는 조건을 고려할 때 트로츠키의 실패는 불가피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