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유서

레닌의 유서

다른 표기 언어 Lenin's Testament

요약 1922년 12월 23일부터 26일까지와 1923년 1월 4일 레닌의 구술에 의하여 작성된 비밀문서.

소련 정치체제의 개혁에 관한 몇 가지 지침과 스탈린·트로츠키·지노비예프·카메네프·부하린·피야타코프 등 6명의 당 지도자들에 대한 간략한 인물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스탈린, 트로츠키).

레닌이 뇌졸중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시기에 씌어졌으며 스탈린의 공산당 서기장직 축출권고로 끝을 맺는다. 레닌은 유서를 통하여 당의 후계자 선택을 지도하려 했거나 권력을 찬탈하려는 혁명동지들의 움직임을 견제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당 지도자들 사이에 상호 불신을 일으켜 그들에 의한 권력승계 가능성을 배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제1편에서 레닌은 당 중앙위원회의 확대를 제안하고 중앙위원회 내 단합을 해치는 가장 심각한 요인으로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의 긴장관계를 지적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요시프 스탈린은 거대한 권력을 담당할 만큼 신중하지 못하고 가장 유능한 트로츠키는 너무 자신을 믿으며 행정기능 쪽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니콜라이 부하린은 변증법에 통달하지는 못했으나 가장 우수한 이론가로 인정받았다. 유서는 또한 1917년 10월, 혁명을 반대하여 폭동계획을 발표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행동을 비판하지 말도록 충고했다.

제2편은 추신으로서, 스탈린이 조지아의 반란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레닌의 아내 크루프스카야에게 독설을 퍼부은 직후 구술되었다(→ 크루프스카야). 레닌은 스탈린의 무례한 언사를 책망한 뒤 당대회가 그를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제안했다. 문서는 여러 장 복사되었고 레닌이 친히 뜯거나 그가 사망했을 경우 크루프스카야가 뜯어야 한다는 지시와 함께 밀봉되었다.

1924년 5월 제13차 당대회가 열리기 며칠전 크루프스카야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유서를 송부했고 그것이 당대회에 전달되는 것이 레닌의 뜻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스탈린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중앙위원회는 레닌의 유서를 전체대회에 제출하기보다 대의원 몇 명에게만 공개하기로 결정하고 유서의 인용·발표·복제를 금지했다. 스탈린 시대의 개막과 함께 레닌의 유서는 금지문서가 되었고 유서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은 연방 내에서 거의 3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유서의 존재는 곧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1925년 유서의 일부를 입수한 맥스 이스트먼은 〈레닌 사후의 러시아 Since Lenin Died〉에 이를 발표했고 1926년 10월 〈뉴욕 타임스 The New York Times〉는 크루프스카야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입수한 유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이무렵 크루프스카야는 스탈린 반대파에 가담하고 있었다. 억압조치로 소비에트 연방 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레닌의 유서는 요시프 스탈린의 정권장악을 저지할 수 없었다.

제20차 공산당대회(1956)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유서의 일부를 인용했는데, 스탈린의 무단통치를 비판하고 자신의 탈스탈린주의 운동에 레닌의 추인을 덧붙이기 위함이었다(→ 흐루시초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