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쇼프

흐루쇼프

다른 표기 언어 Nikita (Sergeyevich) Khrushchov 동의어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요약 테이블
출생 1894. 4. 17(구력 4. 5), 러시아령 우크라이나 칼리노브카
사망 1971. 9. 11, 모스크바
국적 소련

요약 소련 공산당의 제1서기(1953~64) 및 소비에트 정부의 총리(1958~64)를 지냈다. 탈 스탈린 정책을 추구하여 공산주의 세계에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외교정책으로는 '평화공존' 정책을 추구했다.
1918년 우크라이나 지역의 점령을 놓고 적군과 백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간에 투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일원이 되었다. 1925년 흐루쇼프는 유조프카의 페트로브스크-마린스크 지구당의 서기로서 당활동에 전념했다. 1930년대 초반 흐루쇼프는 모스크바 당간부들에 대하여 확고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을 감독했고, 이 공로로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53년 9월 흐루쇼프는 말렌코프를 밀어내고 제1서기가 되었고, 이후 십여년 간 소련을 이끌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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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스탈린 치하에서의 정치적 경력
  4. 소련의 지도자
  5. 만년
  6. 평가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ov)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ov)

개요

소련 공산당의 제1서기(1953~64) 및 소비에트 정부의 총리(1958~64)를 지냈다.

탈(脫)스탈린 정책을 추구하여 공산주의 세계에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외교정책으로는 '평화공존' 정책을 추구했다.

초기생애

스탈린이나 레닌과 같은 대부분의 소련 지도자들이 일반적으로 중산층 출신인 것과 달리 흐루쇼프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차르 군대에서 복무한 농노였다. 흐루쇼프는 동네의 초등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뒤 가족과 함께 도네츠 분지의 광공업 중심지인 유조프카(스탈리노로 개명되었다가 지금은 도네츠크)로 이사했다가 15세부터 연관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미 공장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차르 군대에는 징집되지 않았다. 그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전에도 노동자조직에서 활발하게 활약했고, 1918년 우크라이나 지역의 점령을 놓고 적군과 백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간에 투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일원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1919년 1월 적군에 참가하여 하급 정치위원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에는 백군과 침입해오는 폴란드군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1921년 동원해제 된 후 첫 아내인 갈리나가 그해의 심한 기근으로 2명의 아이를 남겨놓고 죽었다. 그는 1922년 유조프카에 있는 새로운 소비에트 노동자학교의 입학을 허가받아 이곳에서 당교육을 받는 동시에 중등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이 학교에서 학생정치위원이 되었고 공산당위원회 간사가 되었다.

1924년 그곳에서 교사인 2번째 아내 니나 페트로브나와 재혼했다.

스탈린 치하에서의 정치적 경력

1925년 흐루쇼프는 유조프카의 페트로브스크-마린스크 지구당의 서기로서 당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정력적인 활동과 광산·공장의 사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스탈린의 가까운 동료이며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인 L.M. 카가노비치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25년 12월 스탈린이 트로츠키에 대하여 결정적 승리를 거둔 제14차 당대회에 그는 카가노비치를 따라 투표권 없는 대표로 참석했다. 그뒤 4년 동안 그는 유조프카·카르코프·키예프 등지에서 당조직책으로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다.

1929년 모스크바의 스탈린공과대학에서 야금학을 공부했고 이 대학 당위원회의 서기로 활약했다. 1931년 모스크바에서 당 업무에 전념했고 1933년에는 카가노비치의 지도 아래 모스크바 지방당위원회의 제2서기가 되었다.

1930년대 초반 흐루쇼프는 모스크바 당간부들에 대하여 확고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을 감독했고, 이 공로로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해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어 사실상 모스크바 시장으로 승진했다.

1934년에 있었던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는 70명으로 구성된 소비에트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숙청작업에 가담했다. 그는 예조프스치나라고 불리는 숙청을 견디고 살아남은 3명의 지방 서기장들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예조프스치나는 소련 보안군 사령관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이 무자비한 숙청의 시대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흐루시초프는 1935년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후보위원, 1936년 헌법위원회의 위원, 1937년 소련 최고회의 외교분과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938년에는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후보가 되어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서 키예프에 파견되었고 그 다음해에 제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임되었다.

1940년 소련군이 동부 폴란드를 점령한 후 흐루쇼프는 이 지역을 소련에 '통합'시키는 작업을 주관했다. 흐루쇼프의 주요임무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분리주의운동을 봉쇄하고, 숙청으로 인해 궤멸의 위기에 놓인 공산당조직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 침공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전시에 흐루쇼프가 첫번째로 맡은 임무는 우크라이나의 산업시설을 가능한 한 동부지역으로 소개(疏開)시키는 것이었다. 그후 그는 육군중장의 계급을 부여받고 소련군에 배속되었다. 그의 임무는 시민들의 저항의식을 고취시키고 스탈린과 그외의 정치국원과의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방위전에는 안드레이 I. 예리오멘코 원수의 정치고문을, 1943년의 크루스크 대전차전(對戰車戰) 때에는 니콜라이 F. 바투틴 중장의 정치고문을 역임했다.

1944년 우크라이나를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킨 뒤 흐루쇼프는 민정을 부활시키고, 황폐해진 우크라이나 지역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46년의 기근은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악의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다른 지역에 전용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곡물생산의 회복과 식량의 배급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그는 소련 농업의 여러 문제점을 절감하게 되었다. 1949년 스탈린은 흐루쇼프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였고, 그는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로 복귀했으며 동시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국원에 임명되었다.

1949~53년 흐루쇼프와 다른 소련 지도자들은 스탈린의 궁중정치(宮中政治)의 노리개가 되어 유쾌하지 못한 시기를 견디어내야 했다.흐루쇼프는 점차 농업문제에 몰두했고 전통적인 집단농장 대신 '아그로고로드'(영농도시)와 대규모 국영농장을 건립하는 구상을 발전시켜나갔다.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죽고 부총리 겸 비밀경찰 총수인 라브렌티 베리아를 처형한 뒤,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후계자인 게오르기 말렌코프와의 권력투쟁을 개시했다.

그는 당기구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1953년 9월 흐루쇼프는 말렌코프를 밀어내고 제1서기가 되었고, 1955년에는 당시 총리이던 말렌코프를 퇴임시키고 자신의 손으로 뽑은 니콜라이 A. 불가닌 원수를 총리에 임명했다. 1955년 5월 흐루쇼프는 첫 해외여행에 나서 불가닌 총리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여 자신의 유연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8년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를 매도한 사실에 대해 티토에게 사과했다. 그뒤 제네바·아프가니스탄·인도 등지로 여행하면서 쾌활하고 외향적인 개인외교를 펼쳤는데 이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공격은 맹렬하면서도 원시적인 것이었지만, 그의 외향적인 성격과 농부 같은 유머는 그때까지 소련 지도자들이 심어놓은 인상과는 크게 대조되는 것이었다.

1956년 2월 24~25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1인독재정치의 비리에 대한 기념할 만한 비밀연설을 하면서, 스탈린의 '불관용·야만성·권력남용'을 비난했다.

수년 간의 공포어린 침묵의 시기가 지난 뒤에 공산당 제1서기인 흐루쇼프가 1930년대의 대숙청 때의 잘못된 처형실례와 비밀경찰의 비리 및 탄압사태를 폭로하는 광경은, 그 자신도 미처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그후 계속된 소련의 '해빙'은 수천 명에 달하는 정치범 석방, 이미 숙청되어 처형된 사람들의 '명예회복'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탈스탈린화 운동은 동유럽의 공산주의 제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폴란드에서는 자국의 스탈린주의적 정권에 대항하는 폭동이 발생했다. 그 직후 헝가리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공공연한 혁명상황에 직면하여 흐루쇼프는 다른 소련 지도자들과 함께 바르샤바로 가, 폴란드 인민에게 자유를 대폭 허용하자는 폴란드 지도자 부아디수아프 고무우카의 민족공산주의적 해결안을 최종적으로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헝가리 혁명을 무력으로 분쇄해야 한다는 결정에 흐루쇼프가 동의하게 된 것은 헝가리의 총리 이므레 노디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유혈사태를 제외하면 흐루쇼프는 유럽의 공산국가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다.

동유럽의 비상사태 때문에 소련 공산당 내부에 흐루쇼프에 반대하는 파벌연합의 집결이 촉진되었다.

1957년 6월 그는 거의 실각할 뻔했다. 소련 최고회의가 투표로 그의 실각을 결정했으나 흐루쇼프가 당중앙위원회 총회에 호소하여 그 결정을 가까스로 취소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뒤 그는 해당(害黨)인사로 지목된 말렌코프, 뱌체슬라프 M. 몰로토프 외 여러 인사들을 영구히 당지도부에서 추방했다. 그는 1957년 10월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를 국방장관직에서 해임시켰고 1958년 3월에는 소련 총리에 취임하여 당서기장과 총리를 겸임하게 되었다.

권력을 공고하게 확립한 뒤 그는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최초로 공식천명된 평화공존의 원칙을 폭넓게 주장하고 나섰다. 공산주의 원칙과는 상반되게 그는 "전쟁이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1959년의 제21차 전당대회에서 그는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평화적 경쟁을 요청합니다"라고 말했다. 195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공직에 출마한 정치가처럼 의욕적으로 많은 도시와 농촌지대를 방문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회담을 실현시켜, 이 회담에서 얻어진 '캠프 데이비드 정신'은 미·소의 우호관계를 개선시켰다. 그러나 오랫동안 계획해오던 흐루쇼프-아이젠하워 간의 1960년 파리 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흐루쇼프가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어 그 비행사가 체포되었다고 발표하면서 정상회담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1961년 미국의 신임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빈 정상회담을 개최했으나 당장의 현안문제였던 독일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직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말았다.

1957년 소련은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시켜 성공을 거두었고 그뒤 꾸준히 미사일 무기를 증가시켰다. 1962년 흐루쇼프는 쿠바에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을 설치하려 했다(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10월 팽팽한 긴장상태가 계속되었고 미국과 소련은 전쟁 일보직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흐루쇼프는 마침내 미국으로부터 더이상 쿠바의 공산정권을 전복시키려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그 미사일을 쿠바로부터 철수하는 데 동의했다. 이같은 사태해결로 인해 소련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1959년에 시작된 중·소 분열은 1960년에 공식적인 상호비방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소련이 중국의 핵무기 증강을 지원하지 않고 또 중·소 국경문제를 시정하지 않자 중국은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전면전'이라는 이념적 주장을 들고 나왔고 마오쩌둥[毛澤東]은 흐루쇼프의 평화공존정책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1963년 소련이 미국과 체결한 핵실험금지조약은 전세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더욱 거세게 비난했다.

흐루쇼프는 재임중 소비사회를 목표로 하는 대중의 압력과 보다 많은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지식인들의 동요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쳐나가야만 했다.

게다가 탈스탈린화의 개혁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하는 소련 관료층의 점증하는 두려움으로부터도 반대압력을 받았다. 흐루쇼프 자신도 지식인들을 마땅치 않게 여겨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1957)의 국내 발매금지 처분을 승인했고, 1958년 파스테르나크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결정되자 출국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검열). 그러나 흐루쇼프는 1962년 스탈린 체제의 탄압을 맹렬히 비난한 작품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를 출판하도록 승인했다.

한편 사상 처음으로 소련인들의 해외여행이 허용되었고 흐루쇼프 자신도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교류가 확대되는 것을 용인하는 듯 보였다.

핵 미사일을 강조하고 재래식 무기를 축소하려 했던 흐루쇼프의 정책은 소련 군부의 맹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그의 고압적인 지도 스타일과 당조직의 분권화 시도는 그의 권력장악을 지지했던 많은 당간부들을 적대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흐루쇼프 정부의 최대의 위기는 농업분야였다.

낙관주의자였던 그는 1956, 1958년의 대풍년을 기준으로 하여 많은 계획을 수립했고, 이 계획을 바탕으로 농업 및 공업 생산에서 미국을 추월하게 될 것이라고 수차에 걸쳐 약속을 했다. 그는 시베리아에 2,800만ha 이상의 처녀지를 개간하여 수천 명의 노동자를 시베리아로 보내 그 미개간지를 경작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소련은 캐나다와 미국으로부터 또다시 밀을 수입해야 했다. 농업정책의 실패, 중·소분쟁, 독단적인 정부운영 등이 흐루쇼프의 실각을 가져온 주요요인이었다.

1964년 10월 14일 중앙위원회는 '노령과 건강 때문에' 당서기직과 소련 각료회의 의장(총리)직을 사임한다는 흐루쇼프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만년

그뒤 거의 7년 동안 흐루쇼프는 소련정부의 특별연금 수혜자로 모스크바와 시골별장 등지에서 조용히 살았다.

소련 언론에 그의 이름이 가끔 나왔고 소련에 선거가 있을 때만 투표를 하기 위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같이 강요된 유배의 시기중 유일하게 파격적인 사실은 1970년 미국과 유럽에서 그의 자서전이 발간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소련에서는 발간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거의 2일이 지난 뒤 소련 대중에게 공표되었다. 국장(國葬)과 크레믈린 궁 안치가 거부된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에 있는 노보데이비치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평가

소련과 전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촉발시킨 위대한 인물이었다.

당서기와 총리직을 7년 동안 겸임하면서 스탈린 독재정권의 전통을 불식시키고 소련 공산주의 내에 자유화 경향을 확립했다. 흐루쇼프는 마르크스주의를 샅샅이 알고 있는, 철두철미한 현실정치가였지만 정치적 비상사태에 직면해서는 자신의 신념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꿀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국제현실에 대하여 많은 경험을 쌓은 결과 비공산주의 세계와의 평화공존원칙을 수립하게 되었고, 이 원칙은 그 자체로도 소련 공산당의 확립된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핵무기의 위력과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었고 모종의 핵실험통제를 위해 미국과 협상하기로 한 결단은 대단히 중요한 그의 업적이었다. 동시에 흐루쇼프는 소련 인민과 폭넓은 교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비자 경제를 지향하는 양보적인 조치를 취했고, 보안통제를 폭넓게 완화시켰는데 이것은 핵무기 통제만큼이나 폭넓은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긴 했지만 '사회주의로 이르는 다른 노선'을 받아들임으로써 유럽 공산국가들 사이에 독립심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그가 내세운 러시아 민족주의와 마오쩌둥식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 예기치 않은 심각한 분열을 가져왔다. 그가 실각할 즈음에는 그가 세워놓은 소련의 여러 정책들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려 그의 후계자들은 그것을 손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그의 사망소식을 2일씩이나 미루었다가 발표하는 조심스러운 태도만을 보아도 만년에 소련과 외부세계에서 그의 인기가 점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흐루쇼프의 때로는 요란스럽지만 일관성 있는 평화공존정책을 그 후계자들의 제한적이고 보수적인 정책과 대비해보곤 한다. 그가 죽은 후 흐루쇼프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소련 생활의 기본적인 변화는 제거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고, 이 기본적인 변화는 궁극적으로 세계 강대국간의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개인적인 괴팍함, 요란스러운 성격, 통속적인 기질, 놀라운 임기응변 등에 대해 내려질 평판과는 관계없이 그는 나름대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 세르게이는 장례식의 짧은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미워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쳐다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