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다른 표기 언어 Boris (Leonidovich) Pasternak
요약 테이블
출생 1890. 2. 10(구력 1. 29), 러시아 모스크바
사망 1960. 5. 30, 모스크바 근처 페레델키노
국적 러시아

요약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의사 지바고>로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소련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어 수상을 거부한 작가이다. 1913년 첫 번째 시집을 낸 이후 <장벽을 넘어서>(1917), <누이, 나의 삶>(1922)을 출간하면서 역량 있는 신인 서정시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33~43년의 작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있어 출판하지 못했다. 1956년 모스크바의 월간지에 소설〈의사 지바고〉를 기고했으나 "10월혁명과 혁명의 주역인 인민, 소련의 사회건설을 중상했다"는 비방과 함께 거부당했다. 1957년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출판사를 통해 서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영역본이 출간된 1958년에는 18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소련에서는 파스테르나크 탄핵운동이 일어났고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었다. 1987년에 사후 복권되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장편소설 〈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로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소련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어 수상을 거부했다.

러시아 혁명의 잔혹함과 그 여파 속에서 펼쳐지는 방황, 정신적 고독, 사랑을 서사적으로 기술한 이 소설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소련에서는 비밀리에 번역본으로만 유포되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교양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레오니드는 미술교수였으며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이들은 모두 이 집안을 자주 찾은 손님이었음), 그리고 레닌의 초상화를 그렸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로자 카우프만이었다. 어린시절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조숙한 시인이었으나 음악가가 될 작정이었다. 6년간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했으나 갑자기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모스크바대학교와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 강좌를 수강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신체상의 이유로 병역이 면제되는 대신 우랄 지방의 화학공장에서 근무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교육부 도서관에서 일했다.

첫번째 시집은 1913년에 출간되었다.

1917년에는 놀랄 만한 2번째 시집인 〈장벽을 넘어서 Poverkh baryerov〉를 펴냈으며, 〈누이, 나의 삶 Sestra moya zhizn〉(1922)을 출간하면서 역량 있는 신인 서정시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시는 상징주의의 영향을 반영한다. 러시아의 기준으로 볼 때는 비록 전위적이고 비교적이었으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3~43년의 작품은 공식적인 작품양식(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너무 동떨어져 출판이 불가능했으며 1930년대말의 대숙청 기간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스탈린의 고향 조지아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했기 때문에 숙청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셰익스피어, 괴테,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 베를렌, 릴케 등을 번역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1956년 파스테르나크는 큰 기대에 부풀어 모스크바의 유력한 월간지에 소설 〈의사 지바고〉를 기고했으나 "10월혁명과 혁명의 주역인 인민, 소련의 사회건설을 중상했다"는 비방과 함께 거부당했다. 1957년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출판사를 통해 서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저작권을 사들인 그 출판사는 '수정을 위해' 원고를 되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영역본이 출간된 1958년에는 이미 18개 국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소련에서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탄핵운동이 일어났다. 파스테르나크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었으며 생계유지의 수단마저 빼앗겼다. 공공 모임에서는 파스테르나크를 국외로 추방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파스테르나크는 제1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내게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써보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페레델키노의 집에서 암과 심장병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냈다. 영어로 번역된 작품으로는 단편소설과 자전적 작품 〈안전 통행권 Okhrannaya gramota〉(1931), 그리고 엄숙함과 고요한 내적 관조로 끝나는 파스테르나크의 시작품 전체가 있다. 1987년에야 소비에트 작가동맹에서 파스테르나크의 사후 복권을 허락함으로써, 1958년 작가동맹에서 추방된 이후 불법으로 되어 있던 작품들의 적법성이 인정되었고, 드디어 〈의사 지바고〉가 소련 내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가 주도한 평가위원회는 복권에 덧붙여 페레델키노에 있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집에 기념관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