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다른 표기 언어 Ukraine
요약 테이블
위치 러시아 서부 흑해연안
인구 37,937,821명 (2024년 추계)
수도 키이우(러시아어로 '키예프'라고 함)
면적 603,628㎢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Ukraine
기후 대륙성기후
민족 구성 우크라이나인(78%), 러시아인(17%)
언어 우크라이나어
정부/의회형태 중앙집권공화제 / 다당제&단원제
종교 개신교, 우크라이나정교, 우크라이나 가톨릭교회
화폐 흐리브냐 (UAH)
국화 해바라기
대륙 유럽
국가번호 380
GDP USD 119,134,000,000
인구밀도 63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ua

요약 러시아 서쪽 흑해 연안에 있는 국가. 11세기에 강성했던 키이우 루스가 기원으로, 후에 동유럽 주요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부터 우크라이나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1년 독립 후 소비에트 시대의 국영 경제를 신속히 개혁하지 못해 생산의 감소, 인플레이션의 증가, 실업의 확산 등으로 시달렸다. 우크라이나인은 전체 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한다. 공화국들 가운데 인구밀도가 높은 편이었다. 경제는 중공업과 농업에 크게 의존한다. 대량의 철과 강철을 생산하는 철금속 산업이 도네츠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비옥한 흑토로 겨울밀과 사탕무의 주요 생산국이다.

목차

접기
  1. 자연환경
  2. 국민
  3. 경제
  4. 정치와 사회
  5. 문화
  6. 역사
  7. 우크라이나와 한국의 관계
    1. 외교
    2. 경제·통상·주요 협정
    3. 문화교류·교민 현황
우크라이나 국기
우크라이나 국기

동유럽에 있는 국가. 수도는 키이우이다. 북쪽으로 벨라루스, 북쪽·북동쪽·동쪽으로 러시아 연방, 남쪽으로 아조프 해, 흑해, 남서쪽으로 몰도바·루마니아, 서쪽으로 헝가리·슬로바키아·폴란드와 접해 있다.

1924년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 되었다.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 바로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해 12월 1일 국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확정했다. 독립국가연합의 가입국이다.

지도
우크라이나

자연환경

동유럽 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크라이나는 전반적으로 평균고도 175m의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부 지방은 드니프로 저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드니프로 강(드네프르 강)이 통과한다. 북동부에는 중앙 러시아 고지의 한 지맥이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흑해 저지가 흑해와 아조프 해 연안을 따라 펼쳐지다가 크름 반도의 북부 크름 저지대로 이어진다.

흑해와 아조프 해 사이에 있는 크름 반도의 남쪽 연안에서 시작되는 크름 산맥은 나란히 뻗은 3개의 줄기로 이루어졌으며, 이 줄기들 사이사이에는 비옥한 골짜기들이 있다. 서쪽으로는 카르파티아 산맥이 240km 이상 뻗어 있다. 온대기후권에 속하며, 연강수량이 400∼600㎜에 이른다.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적당히 따뜻하고 습기찬 공기의 영향을 받는다. 겨울에는 서쪽이 동쪽보다 더 따뜻한 반면 여름에는 동쪽이 더 무덥다. 연평균기온은 북쪽의 5.5∼7℃와 남쪽의 11∼13℃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강수량은 고르지 않은 편으로 추운 계절보다 더운 계절에 2∼3배 더 많다. 눈은 11월말과 12월초에 집중적으로 내린다. 크름 반도의 남쪽 연안에서는 따뜻하고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우크라이나를 흐르는 대부분의 주요강들은 평원을 거쳐 아조프 해와 흑해로 유입된다. 드니프로·유주니부크·드네스트르 강 등이 흑해로 흘러가는 대표적인 강이며, 도나우 강은 우크라이나의 남서부 경계를 흐른다.

돈 강의 지류인 도네츠 강의 중류는 도네츠 분지의 주요수원을 이루며 우크라이나를 거쳐 간다. 드니프로 강은 우크라이나의 가장 중요한 강으로 수력발전과 관개를 위한 댐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그밖에 강과 강을 잇는 운하들과 천연호·인공호 들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천연자원의 보존을 중요한 과제로 여긴다.

1921년에 최초로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아스카니야-노바 자연보호구역에는 김의털과 나래새가 자라는 미개간지 스텝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고, 멸종위기에 처한 종(種)들을 번식시키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오나거와 프르제발스키호스를 비롯한 약 40여 종의 포유동물들이 보호되고 있다. 그밖에도 흑해 연안의 일부를 포함한 여러 곳이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우크라이나 키이우

국민

우크라이나인은 전체 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한다. 우크라이나어는 슬라브어군에 속하며, 러시아어·벨라루스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약 20%를 차지하는 러시아인이 가장 큰 소수민족이다. 그밖의 소수민족으로는 유대인·그리스인·루마니아인·아르메니아인·집시·헝가리인·타타르족·추바슈인·리투아니아인·바슈키르인·카자크인 등이 있다.

소련을 이루었던 공화국들 가운데 인구밀도가 높은 편이었으며, 특히 고도로 공업화된 도네츠 분지와 드니프로 저지 및 농업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삼림-스텝 지대에 인구가 조밀하다. 주요도시는 키이우·하르키우·오데사·도네츠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자파로지예·크리보이로크·르비우 등이다. 2024년 추계인구는 3,793만 명이며, 전체 인구의 15%가 15세 이하의 유소년층이다. 또한 전체 인구의 70%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경제

우크라이나는 삼림과 스텝의 혼합 지대가 중남부를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쪽으로 펼쳐져 있는데, 비옥한 흑토 때문에 겨울밀과 사탕무의 주요 생산국이 되었다. 그밖의 작물로 해바라기씨·옥수수·감자·포도·귀리·호밀·수수·메밀 등이 있다. 과일과 채소가 도시 외곽에서 재배되며, 소와 돼지가 전국에서 사육된다.

우크라이나에는 철광석·역청탄·무연탄이 풍부하고 도네츠 분지에는 망간을 포함한 광석 매장지들이 서로 가깝게 분포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중동부에 있는 이 지역은 이 나라의 공업 중심지로 유럽의 주요 중공업·야금업 단지이다. 천연가스와 석유가 소비에트 시대에 많이 고갈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생산된다.

우크라이나 경제는 중공업과 농업에 크게 의존한다. 또한 기본적인 광업에 있어서도 대량의 철과 강철을 생산하는 철금속 산업이 도네츠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야금업용 장비, 자동차, 트랙터 등 내구 소비재가 도네츠 분지에서 생산된다. 화공업으로는 상당량의 황산과 광물성 비료가, 식품가공업으로는 분말설탕·육류·과일·낙농제품 등이 생산된다.

그러나 경공업과 소비재 부문은 중공업과 농업에 비해 뒤쳐졌다.

우크라이나 모든 지역에서 양봉업이,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는 양잠업이 이루어진다. 우크라이나는 지형이 평평하여 교통 장애 요소가 거의 없다. 철도가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은 도네츠 분지와 드니프로 강(드네프르 강) 유역이며, 철도의 중심지는 하르키우·크이우·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바흐마치·야시노바타야·데발체보·코벨·쿠퍈스크이다.

흑해와 아조프 해에 면한 오데사·일리체프스크·니콜라예프·헤르손·페오도시야·케르치·주다노프 항(港)을 통해 원양선박들이 출항한다. 항행이 가능한 주요강은 드니프로 강과 그 지류들인 프리파티 강, 데스나 강, 유주니부크 강, 도나우 강이다. 잘 짜인 간선도로망을 통해 모든 지역과 대도시들이 상호연결되어 있다. 특히 크이우-모스크바, 오데사-키이우-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하르키우-심페로폴, 키이우-하르키우-로스토프나도누 등의 도로가 중요하다. 주요공항은 키이우 근처의 보리스폴 공항과 오데사·르비우·하르키우에 있는 공항이다.

우크라이나 화폐
우크라이나 화폐

정치와 사회

1991년말 소련의 붕괴로 독립하게 된 우크라이나는 1990년대초 정치체계의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1922∼91년 소련하에서 소련 공산당의 지배를 받은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우크라이나를 통치했다. 어떤 법안이든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던 입법부 최고소비에트는 의회의 기능을 가진 최고회의로 바뀌었다. 최고회의 의원은 다수 후보가 경쟁하는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총리는 의회의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각료들로 구성된 내각의 수반인 총리가 일상적인 정부 행정을 책임진다.

교육은 7∼15세에 의무적으로 실시되며, 고등교육은 주요 언어로 다시 자리잡은 우크라이나어를 통해 이루어지만 소비에트 시대에는 러시아어가 대신했었다. 여전히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가 도네츠 분지와 큰 규모의 러시아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남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문맹은 소비에트 시대에 퇴치되었고 1990년 이후 사립대학과 종교대학이 생겨났다. 키이우·하르키우·오데사 등지에 있는 국립대학교를 비롯하여 고등교육기관이 많다.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는 산하에 많은 연구소를 두고 그들의 연구작업을 총괄한다.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시기에 병원, 공장·학교 부설 의료 센터, 조산소, 부인과 외래환자 클리닉 등을 포함해 광범위한 보건 설비 기반을 갖추었으나 의료진과 장비 부족으로 보건 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1991년에 사회복지제도가 재조직화되면서 확대되었다. 보조금은 부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지만 시장 경제 체제로 바뀌면서 실직한 노동자들을 돕는 데에 쓰였다. 인구의 약 1/4가량이 연금을 받고 있으며 사회보장제도로 가족수당, 출산보조금, 신체장애자보상이 시행되고 있다. 재원은 근로소득세로 충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졸로치우(zolochiv) 궁전
우크라이나 졸로치우(zolochiv) 궁전

문화

우크라이나 문학의 전통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구전문학은 이보다 훨씬 앞선다. 소비에트 시대에는 정기간행물 〈리테라투르나 우크라이나 Literaturna Ukraina〉를 통해 V. S. 젬랴크, 곤차르, L. 우크라인카 등 우크라이나 작가동맹의 회원들이 글을 발표했다. 우크라이나의 음악은 아주 생명력이 넘치는데, 민속 음악이 특히 그러하다. 현대의 작곡가로는 콘스탄틴 얀케비치, 율리 메이투스, 유리 마이보로다와 플라톤 마이보로다 형제 등이 있다. 연극 또한 18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자랑한다.

우크라이나 음악극장
우크라이나 음악극장

역사

이 지역에는 키이우 루시(9∼13세기),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11∼14세기), 카자크 헤트마나테(17∼18세기), 크름 칸국(15∼18세기) 등 여러 나라들이 존재했으며, 19세기부터 우크라이나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들이 기원전 첫 1,000년 동안에는 킴메리족·스키타이·사르마티아인에게, 서기 첫 1,000년 동안에는 고트족·훈족·불가리아인·아바르족·하자르·마자르족·페체네그족에게 침략, 점령당했다. 그러나 5, 6세기에 소수 슬라브족이 그들의 원거주지였던 카르파티아 산맥 북부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우크라이나 서부와 중북부의 삼림 및 삼림-스텝 지대에 정착하면서 가장 큰 발전을 이루었다.

마침내 슬라브족은 모스크바 주위의 미래의 러시아 국가 영토 북부 멀리까지 뻗어나갔다. 슬라브족의 초기 거주지들 가운데 키이우는 드니프로 강을 끼고 있으며, 폴리아니인의 중심지였다. 폴란드인과 발트 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드니프로 교역로를 지배한 바이킹(고대 스칸디나비아인)이 함께 키이우 루시라 알려진 이 국가를 세웠다.

처음에는 키이우 주변의 영토에 붙여졌던 루시라는 이름은 그후 키이우의 전 영역을 포괄하게 되었다. 키이우 루시는 블라디미르 1세(성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프 1세(현명공 야로슬라프)가 통치하던 11세기에 가장 강성했다. 990년경 블라디미르 1세는 그리스도교를 왕국의 정식종교로 채택하고, 비잔틴 제국의 보호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지시 아래 교회의 성직위계를 만들었다.

야로슬라프 1세 (Yaroslav I)
야로슬라프 1세 (Yaroslav I)

동슬라브족은 그리스도교를 통해 최초의 문어인 고대교회슬라브어를 쓰게 되었다. 11세기에 가장 강성한 키이우 루시는 동유럽 주요 정치·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류리크 왕조).

12, 13세기에 킵차크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내분이 일어나고 교역로가 바뀌자 차츰 세력을 잃어갔다. 13세기 중엽 몽골의 정복으로 키이우 시대는 결정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1200년경에 부상했던 우크라이나 서부의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은 14세기까지 존속했다.

14세기에 리투아니아갈리치아 공국을 제외한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을 합병했으며, 갈리치아 공국은 폴란드 왕국에 넘어가고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은 여전히 몽골의 킵차크 한국(금장한국) 통치하에 있었다.

키이우 본국은 1458년 법제적으로는 독립된 두 나라, 즉 모스크바 대공국과 리투아니아로 분리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키이우 루시의 옛 영토는 빠르게 분산되었다. 1569년 루블린 합병 이후 우크라이나는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로 넘어갔으며, 같은 해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연합의 협상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정교도와 우크라이나 가톨릭교도가 분열되었다. 종교적인 이견(異見)과 사회적 불화는 명목상으로는 폴란드 왕의 신하였으나 실상은 자유용병 계층이었던 자포로지예 카자크인들에 의해 가중되었다.

1648년 헤트만(군대 지도자)인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인들이 드니프로 강 하류의 자포로지예시치 요새를 거점으로 폴란드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며, 그결과 그들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준(準)독립국가를 이루었다. 흐멜니츠키는 이 봉기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1654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차르와 협약을 맺었는데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를 굴복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키이우와 드니프로 강 동쪽 영토에 대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카자크 헤트만네테는 차츰 러시아 제국에 흡수되었다.

흐멜니츠키 (Bohdan Khmelnitsky)
흐멜니츠키 (Bohdan Khmelnitsky)

18세기말 우크라이나의 자치권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1783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흑해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이 지역에 재정착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우크라이나는 19세기초 주요 곡물수출지역으로 부상했다.

18세기에 폴란드가 분할되자, 러시아 제국은 갈리치아를 제외한 드니프로 강 서부의 우크라이나 영토를 얻었으며, 갈리치아는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폴란드 분할). 19세기에 전개된 우크라이나의 민족운동은 러시아 제국에서는 정치적인 억압과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탄압(1863, 1876)으로 제한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여건이 비교적 나았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문화·정치·종교 단체들을 총망라하여 하나의 연대조직을 구축하기도 했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 이후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의 주도하에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라다는 '평의회'라는 뜻)가 키이우에서 결성되었으며, 10월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는 러시아 공산주의 정부가 하르키우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1917∼21년 여러 정부들이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려고 다투었으나 결국에는 소비에트 정부가 승리를 거두었으며, 1924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의 일원이 되었다. 1919∼20년 볼셰비키와 싸웠던 폴란드가 갈리치아와 볼리니아 일부 지역을 포함해 우크라이나 북서부를 여전히 지배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지자 1918년 11월 1일 우크라이나인들은 갈리치아의 수도 렘베르크(르비우)를 점령하고, 서부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을 선포했으며 이 공화국은 1919년 1월 시몬 페틀류라가 이끈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과 합쳐졌다.

그러나 그해 6월 우크라이나 군대가 갈리치아 영토 내에서 축출당했으며, 부코비나는 루마니아에 합병되고 헝가리에 속했던 옛 우크라이나의 주들은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에 귀속되었다.

1930년대초 요시프 스탈린 지배하의 소비에트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공업화와 농업의 집산화 정책을 급속도로 추진했다. 농업의 집산화는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혔지만 연이어 소비에트 정권의 곡물 압류가 유발되어, 1930년대초 기아로 인해 약 5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우크라이나의 문화 생활을 더 철저하게 통제했으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압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폴란드의 지배에 대항하여 갈리치아 동부에서 일으킨 저항운동은 탄압과 테러 행위로 점철되었으며, 루마니아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조직들을 냉담한 시선으로 대했다. 단지 체코슬로바키아령 루테니아(지금의 자카르파츠카야)에서만 우크라이나인들은 폭넓은 정치적·문화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독일-소련 불가침조약(1939)에 따라 폴란드령이었던 갈리치아 동부와 볼리니아 서부가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하고 우크라이나를 빠른 속도로 점령했을 때, 처음에는 우크라이나 현지의 지지를 다소 얻었으나 나치 독일이 농업뿐만 아니라 모자란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무자비하게 착취하자 곧 게릴라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독일의 패배로 소련이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폴란드·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모든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대부분의 영토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1940년대말 집산화 정책이 시행되고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가 불법화되자(1946∼89)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불만이 고조되어 전시의 게릴라 저항운동이 계속되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자 소련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다소 약화되었으나, 우크라이나를 계속 소련에 묶어두고자 하는 기본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1980년대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시행한 이후 많은 우크라이나인들, 특히 지성인들 사이에 민족주의가 새로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러한 감정은 민주화된 우크라이나 의회가 1990년 공화국의 주권을 선포할 수 있도록 이끈 촉진제가 되었다.

1986년에는 소련이 건설한 핵발전소에서 원자로 노심(爐心)이 녹으면서 대참사의 화재가 발생한 체르노빌 사건이 일어났다. 1991년 8월 고르바초프에 반대해 일어난 공산당 강경파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우크라이나 의회는 독립을 선포했고, 1991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법률을 제정했다.

12월 소련이 붕괴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전세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새로운 국가로 변모한 우크라이나 정부는 소비에트 시대의 국영 경제를 신속히 개혁하지 못해 독립 후 여러 해 동안은 생산의 감소, 인플레이션의 증가, 실업의 확산 등으로 시달렸다.

우크라이나와 한국의 관계

우크라이나 국기
우크라이나 국기
외교

우크라이나는 독립국이 되기 이전에는 소련과 같은 맥락에서 한국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정식으로 독립한 뒤 1992년 2월 10일에 한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국은 1992년 12월에 주 우크라이나 대사관을 개설했으며, 우크라이나도 주 대한민국 대사관을 개설했다. 양국은 UN 등 각종 국제무대에서 상호 협력해 왔으며, 한국은 국제사회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적극 참여하여 2014-2019년간 국제기구를 통해 총 340만 달러를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했다. 우크라이나는 1996년 12월에 쿠츠마 대통령, 2000년 6월에  크레멘 교육과학부장관, 2006년 12월에 유센코 대통령이 방한한 바 있으며, 한국은 1992년 6월에 이상옥 외교장관, 2005년 9월에 이해찬 국무총리가 방문했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북한과 1992년 1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북한은 1992년 10월에 주 우크라이나 북한 대사관을 개설했다가 1998년 1월에 철수하고 주 러시아 대사관이 우크라이나와의 외교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2023년 기준 우크라이나의 대한국 수출액은 2억 7,391만 달러, 수입액은 3억 1,304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곡물, 무기화학품, 동물성 및 식물성 지방과 기름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안전모자 등이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2018년 누계 3.6억 달러, 우크라이나는 한국에 1,102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주로 자동차, 이동통신, 교환기, 가전제품 판매 등에 투자했다. 우크라이나에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종합상사 및 현대로템, 영산코퍼레이션, 포스코, 대우인터네셔날, 에코비스, 오스템, 한국타이어 등 20여 개의 기업에 진출해 있다. 한국에는 2007년 4월 주한 우크라이나 상공회의소가 개설되어 양국 경제 교류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과학기술협력협정(1994), 외무부간 협력의정서(1995), 정보통신부간 협력 약정(1995), 통상산업부간 무역공동위원회 설립 양해각서(1996), 무역협정(1997), 투자상호증진 및 보호협정(1997), 상용 복수사증협정(2001), 이중과세방지협정(2002), 항공업무협정(2003), 세관협정(2004),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2005), 외교관여권소지자 사증면제여행협정(2006), 무상원조‧기술협정(2006), 원자력협정(2007), 우주협력협정(2007), 방산‧군수협정(2007), 관광협정(2009), 해운협정(2009), 문화협정(2009), 관용‧공무여권소지자 사증(비자)면제협정(2014) 등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우크라이나에는 한글학교 19개가 설립되어 있어 교민과 우크라이나인의 한글교육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한인회는 우크라이나 한인사회의 발전과 권익보호, 양국 국민의 문화교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3년 기준 우크라이나에는 12,765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한국에는 2023년 기준 3,200명의 우크라이나의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자료

  • ・ 외교부
  • ・ 주 우크라이나 대한민국 대사관
  • ・ 한국무역협회 통계
  • ・ 외교부 재외동포 현황(2023년 기준)
  • ・ 법무부 등록외국인 국적별 현황(2023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