킵차크 한국

킵차크 한국

다른 표기 언어 Kipchak Khanate , 金帳汗國

요약 키르기스 초원과 남러시아의 킵차크 초원 일대에 세워진 이 나라는 몽골 제국의 서방 부분을 이루던 봉건국으로 13세기 중엽에서 14세기말에 번영을 누렸다. 국민은 투르크족과 몽골계 타타르족이었다. 칭기즈 칸의 큰아들 주치는 칭기즈 칸보다 먼저 죽었으나, 그의 아들 바투는 영토를 확장시켜 킵차크 한국의 기틀을 다졌다. 바투는 볼가 강 하류지역에 수도 사라이 바투를 세웠다. 러시아의 군주들은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 칸과 싸워 승리했다. 그러자 몽골 군대는 패장 마마이 칸을 처형하고 토흐타미시의 지휘 아래 보복 공격으로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그러나 1395년 티무르가 쳐들어와 토흐타미시 정권을 무너뜨렸다. 킵차크 한국은 15세기에 크림·카잔·아스트라한 한국 등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었다.

키르기스 초원과 남러시아의 킵차크 초원 일대에 세워진 이 나라는 몽골 제국의 서방 부분을 이루던 봉건국으로, 13세기 중엽에서 14세기말에 번영을 누렸다. 국민은 투르크족과 몽골계 타타르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대체로 몽골족이 귀족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칭기즈 칸 제국의 명확하지 않은 서쪽 분지는 칭기즈 칸의 큰아들 주치가 영지로 받은 곳이었다. 주치는 1227년 아버지 칭기즈 칸보다도 먼저 죽었으나, 그의 아들 바투는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영토를 확장시켜 킵차크 한국의 기틀을 다졌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키예프를 함락시킨 1240년의 전투이다. 최전성기의 영토는 우랄 산맥에서 카르파티아 산맥에 이르는 유럽권 아시아의 대부분을 포함했고 동쪽 깊숙이 시베리아까지 뻗어나갔다. 남쪽으로는 흑해, 카파가스 산맥 및 역시 몽골 4한국의 하나였던 일 한국이 다스리던 이란 지역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바투는 볼가 강의 하류지역에 수도 사라이 바투를 세웠다.

이 수도는 후에 상류쪽의 사라이 베르케로 옮겨졌는데, 가장 번성했을 당시 약 6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킵차크 한국은 점차 투르크화·이슬람화 되어갔으며, 이 현상은 그들의 가장 위대한 군주였던 우즈베크 칸(1313~41) 때 특히 두드러졌다. 킵차크 한국은 지중해 인종, 특히 그들의 동맹국인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및 제노바와 광범위한 교역을 벌였다.

1346, 1347년 전국을 휩쓴 흑사병과 우즈베크 칸의 후계자가 살해당한 사건은 킵차크 한국의 쇠락과 붕괴의 시작을 알린 전주곡이었다. 러시아의 군주들은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킵차크 한국의 마마이 칸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쿨리코보 전투). 그러나 쿨리코보에서 패배한 몽골 군대는 패장 마마이 칸을 처형하고 스스로 칸의 지위에 오른 토흐타미시의 지휘 아래 2년 뒤 보복해왔다. 모스크바를 점령한 토흐타미시는 러시아인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1395년 이전의 동맹자였던 티무르가 쳐들어와 토흐타미시 정권을 무너뜨렸다.

티무르는 수도 사라이베르케를 파괴하고 거의 대부분의 수공업 장인들을 중앙 아시아로 데리고 갔다. 킵차크 한국은 15세기에 크림·카잔·아스트라한 한국 등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