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렌스키

케렌스키

다른 표기 언어 Aleksandr Fyodorovich Kere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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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1. 5. 4(구력 4. 22), 러시아 심비르스크
사망 1970. 6. 11, 뉴욕 시
국적 러시아

요약 케렌스키는 1917년 7월부터 10월까지 러시아 임시정부의 수반을 지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졸업 후 1905년경 사회주의 혁명당에 가입하여 정치범으로 고발당한 혁명가들을 변론하는 변호사가 되었다. 1912년에는 볼스크의 노동자 단체 대표로 제4대 러시아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활동적이고 언변에 능한 온건좌파 정치인으로 점차 명성을 얻었다. 러시아 의회가 구성한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직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병사대표 소비에트의 부의장직을 겸임하며 양방 사이의 교섭책임을 맡았고, 러시아 전역에 시민의 기본적 자유를 제도화했다. 육군장관 겸 해군장관을 거쳐 총리로 선출되며 새로운 정부 권력의 정점에 올랐으나, 차츰 신임을 잃고 1917년 10월 혁명 때 쫓겨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1917년 7~10월 러시아 임시정부의 수반을 지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나로드니키 혁명운동에 매력을 느낀 그는 1904년 졸업을 하고 나서 1905년경 사회주의 혁명당에 가입하여 정치범으로 고발당한 혁명가들을 변론하는 뛰어난 변호사가 되었다. 1912년에는 볼스크(사라토프 지방에 있음)의 노동자 단체 대표로 제4대 러시아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몇 년이 지나자 그는 활동적이고 언변이 능란한 온건좌파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일부 급진적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는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갈수록 황제의 전쟁수행방식에 실망을 느껴 1917년 2월혁명이 발발하자 군주제의 해산을 요구했다. 그는 러시아 의회가 구성한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직과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의 부의장직을 기꺼이 수락했다.

그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양쪽에 모두 직위를 가진 유일한 사람으로서 양방 사이의 교섭책임을 맡았다. 그는 러시아 전역에 시민의 기본적 자유(언론·출판·결사·종교의 자유, 보통선거권, 여성의 동등권)를 제도화했으며, 혁명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인기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5월에 발표된 러시아의 전쟁목표성명서(케렌스키가 승인함)가 국민들 사이에 불평을 야기시키고 그로 인해 몇몇 장관들이 사임할 수밖에 없게 되자, 케렌스키는 육군장관 겸 해군장관이 되어 새로운 정부에서 가장 권력이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공격안을 계획하고 전방을 시찰하면서, 사기가 떨어져 있는 군인들에게 전쟁수행 노력과 혁명수호를 위해 필요한 의욕들을 불어넣기 위해 감동어린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달변도 전쟁의 지겨움과 군기 결여를 보충해주지는 못했다.

케렌스키의 '6월공세'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7월에 임시정부의 조직이 재편될 때, 완고한 정치적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극적인 연설로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케렌스키는 또다시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가 모든 정치파벌들을 통합시키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라브르 G. 코르닐로프 총사령관을 해고하고 9월에 자신이 직접 그 직위를 차지하자, 온건파 및 장교단과의 사이가 멀어졌다.

그는 좌익으로부터의 신임도 상실했는데, 그것은 그가 좌익의 급진적인 사회·경제 계획안을 거부하고, 또 독재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1917년 10월혁명으로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케렌스키는 전선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의 정부를 방어할 군대를 모을 수는 없었다. 1918년 5월까지 러시아에서 숨어 지내다가 서유럽으로 망명하여 혁명에 대한 책을 쓰고, 망명자 신문과 잡지 편찬에 헌신했다. 그는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해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자신의 혁명경험을 계속 책으로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