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공세

6월 공세

다른 표기 언어 June Offensive , 六月攻勢 동의어 7월공세, 여름공세, Summer Offensive, 케렌스키 공세, 갈리치아 공세

요약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육군장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추진했으나 실패한 군사작전(1917. 6[그레고리력으로 7월]).
7월공세, 여름공세, 케렌스키 공세, 갈리치아 공세라고도 함.

이 작전으로 러시아 군대의 분열상이 드러났고 대중의 혁명적 열기를 제대로 파악·대응하지 못한 임시정부의 무능이 표출되었다. 일시적으로 온건보수 세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케렌스키의 시기 선택은 매우 불운했다. 2월(3월) 혁명 후 평화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한층 거세졌고 군대 내에서는 특히 강했다. 병사위원회들은 군사문제를 토론했고, 장교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빈번했다. 군기는 해이해졌고 많은 군인들은 개별적으로 독일군과 타협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임시정부가 구성한 제1차 연립정부(1917. 5)는 타도된 제국정부가 체결한 동맹을 계속 지키면서 단독 강화 체결을 망설였으며 방어전을 치르는 데만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렌스키는 공세를 계획했다. 그는 이 공세에 승리하면 임시정부를 후원하도록 러시아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고 교전국에게 평화를 강요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17년 7월 1일(구력 6. 18) 알렉세이 A. 브루실로프 장군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 군대는 갈리치아의 넓은 전선에서 오스트리아-독일군을 공격하면서 르부프를 향해 진격해갔다.

러시아의 공격이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곧 참호에 머물러 있으면서 싸움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7월 3~4일경 공세는 좌절되었다. 7월 6일 오스트리아와 독일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갈리치아를 지나 우크라이나까지 진격해 들어가다가 즈브루치 강 부근에서 멈추었다. 볼셰비키의 쿠데타에 대한 정부의 두려움과 7월 봉기 때문에 군사적 참패의 영향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6월 공세는 심각한 정치적 결과를 초래했다. 케렌스키는 총사령관직에 라브르 G. 코르닐로프장군을 임명했다. 코르닐로프는 군기 확립을 강력하게 요구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임명은 결국 보수적인 군부 정치세력의 성장 기반과 미수에 그친 코르닐로프의 쿠데타('코르닐로프의 반란'으로 알려져 있음)의 근거를 마련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