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

적군

다른 표기 언어 Krasnaya Armiya , 赤軍

요약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당 정부가 만든 소련군.
(영). Red Army.

적군이라는 이름은 1946년에 없어졌다. 러시아 제국의 육군과 해군은 제정 러시아의 다른 조직들과 함께 1917년 혁명이 일어난 뒤 해체되었다. 1918년 1월 28일(구력 1. 15) 법령에 의해 인민위원회는 노동자와 농민 지원자를 바탕으로 적군을 만들었다. 혁명의 열정에 불타는 최초의 적군부대는 1918년 2월 23일 나르바와 프스코프에서 독일군과 싸워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날은 소련 국군의 날이 되었다. 1918년 4월 22일 소련 정부는 다른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노동자와 농민들은 반드시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적군의 공식 출범이었다.

적군을 창설한 사람은 1918년 3월부터 1924년 11월 해임될 때까지 국방인민위원을 지낸 레온 트로츠키였다. 적군은 전적으로 노동자와 농민만을 대상으로 소집했기 때문에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장교단을 창설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전직 제국군 장교를 동원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1921년까지 5만 여 명의 전직 장교들이 적군에 복무했으며, 이 가운데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련 정권에 충성했다. 장교들의 신뢰도를 감시하고 군대 내에서 정치선전을 실시하기 위해 모든 적군 부대에는 정치고문이 배속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계속되자 단기 장교양성학교에서 젊은 장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정치적으로 더욱 신뢰를 받게 되었다.

적군 병사들 가운데 공산당원의 수는 1925~33년 동안 19%에서 49%로 증가했고 장교들 사이에서 증가율은 더욱 높았다. 제국군 출신의 장교는 불과 몇 사람만이 계속해서 현역으로 남아 있었다. 더구나 사령관은 전부 공산당의 추천을 받아야만 입학할 수 있는 소련 육군사관학교나 장교양성학교의 졸업생들이었다. 1937년 5월 스탈린의 통치에 반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숙청작업이 시작되어 장교수가 줄어들고 적군의 사기와 능률은 떨어졌다.

1937년 6월 12일 국방 제1 부인민위원장인 투하체프스키 원수와 7명의 적군 장군들이 일본과 독일에 소련을 팔아넘기려 했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총살당했다(→ 숙청재판). 그밖에도 여러 가지 혐의로 장군과 대령들이 면직되거나 강제노동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 정부는 일본의 중국 침공과 독일의 재무장에 자극받아 병력을 증가하기 시작했다. 소련 병력은 1934년 94만 명, 1936년 약 130만 명, 1939년초에는 87개 보병사단과 32개 기갑여단 등 160만 명으로 늘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소련군 장교와 사병의 수는 1,136만 5,000명에 이르렀다. 소련의 군사작가 N. A. 보즈네센스키에 따르면, 1941년에 비해 대포 5배, 탱크 15배, 항공기는 5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말 군대해산이 시작되어 병력은 몇 년 만에 30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1946년 '적군'이라는 이름에서 '적'이 없어짐에 따라 그때까지 '적군 병사'(Kras-noarmiich)로 알려졌던 소련 군인은 단순히 '사병'(ryadovoy)이라 불리게 되었다. 소련군의 규율은 항상 엄격했고 처벌 또한 가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형벌을 받게 된 부대에는 자살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1960년 새로운 규정이 도입되어 규율과 형벌이 완화되었다. 장교들은 설득으로 병사들을 통제하려 했고 장병들의 정치의식을 개발할 책임을 맡았으며, 이로써 군사령관과 정치위원의 이중 통제가 없어지게 되었다. 혁명적 '적군'의 시대는 명실공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