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틀류라

페틀류라

다른 표기 언어 Symon Vasilyevich Petlyura
요약 테이블
출생 1879. 5. 17(구력 5. 5), 러시아령 우크라이나 폴타바
사망 1926. 5. 26, 파리
국적 우크라이나

요약 우크라이나의 사회주의 지도자.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는 1905년에 결성된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의 창립회원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2개의 사회주의 주간지를 발간하던 언론인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1914년 러시아군 장교가 되었다. 1917년의 2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제정이 붕괴되자 우크라이나 중앙평의회(Rada)에 가입하여 1917년 6월 우크라이나가 자치공화국임을 선포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신생 우크라이나 정부의 육군장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에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여 괴뢰정부를 세웠다. 전쟁 말기에 독일군이 퇴각하자 그는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라다를 이끌면서 우크라이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이 세운 괴뢰정부로부터 권력을 인수했다.

페틀류라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정부는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백군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소비에트 군대와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백러시아군은 1918년말 페틀류라 정부를 인수하여 우크라이나 일대를 장악했으나 1919년 가을에 퇴각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소비에트 군대가 이 일대를 점령했다. 소비에트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그는 1920년 4월 폴란드 정부의 수반인 요제프 피우수트스키와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1919~20년의 러시아-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를 지원했다.

비록 폴란드가 러시아 군대를 격퇴하기는 했지만 폴란드가 1921년 3월 18일 볼셰비키와 리가 조약을 맺음으로써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확보해주지는 못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는 계속 소비에트의 지배를 받았으며 페틀류라는 바르샤바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자신의 정부를 이끌고 파리로 옮겨갔다. 몇 년 뒤 그는 파리에서 샬롬 슈바르츠바르트라는 유대인의 총격을 받고 죽었다. 암살 동기는 페틀류라의 군대가 유대인을 학살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