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러시아

다른 표기 언어 Russia , (러)Rossiya
요약 테이블
위치 동부유럽
인구 143,957,079명 (2024년 추계)
수도 모스크바
면적 17,098,20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러시아 연방 (Russian Federation)
기후 대륙성기후
민족 구성 러시아인(80%), 타타르인(4%), 우크라이나인
언어 러시아어
정부/의회형태 연방공화제 / 다당제&양원제
종교 러시아정교(15%), 이슬람교(10%), 그리스도교
화폐 러시아 루블 (RUB) 환율계산기
국화 캐모마일
대륙 유럽
국가번호 7
GDP USD 1,719,900,000,000
인구밀도 9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ru

요약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의 하나로 현재 독립국가연합(CIS)을 주도하는 연방공화국. 다당제로 최고 권력자는 대통령이다. 수도는 모스크바로 국민의 80%는 러시아인이다. 화폐는 러시아 루블을 사용하며 주요 경제산업은 기계제조업, 화학산업, 경공업이다. 전문 의료의 부족으로 의료의 질은 떨어지고 있다. 약 8년간의 무상의무교육을 실시한다.

러시아 국기
러시아 국기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국가가 되었다. 소련의 체제하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으로 불렸던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로 면적이 미국이나 중국의 2배이다.

인구는 중국·인도·미국·브라질·인도네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 6위이며, 국민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지만 소수민족 집단도 약 70개에 달한다. 인구의 대부분이 러시아의 서부인 유럽의 거대한 삼각지대에 집중되어 있지만 지난 3세기에 걸쳐서, 특히 20세기 동안 인구가 동쪽의 아시아권(시베리아)으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다.

북쪽은 북극해, 동쪽은 태평양에 접해 있으며, 서쪽은 노르웨이·핀란드·폴란드(한때는 동프로이센의 일부였다가 1945년 러시아에 합병된 후 현재는 다시 분리된 주로, 예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라 불렸던 칼리닌그라드 주와 접해 있음)를 비롯해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칼리닌그라드와도 접해 있음)·벨라루스 등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은 중국·몽골·북한을 비롯해 우크라이나·조지아·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 등과 경계를 이룬다. 아시아 북부 전체와 동부 유럽, 북동부 유럽의 많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는 북극권을 따라 동서길이가 최고 7,700km에 이르며 너비는 남북으로 2,000~2,880km에 달한다.

수도는 모스크바이며, 이전에는 소련의 수도였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신력은 11월)이 발발하자마자 러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1922년 12월 17일(신력은 12월 30일) 소련에 속한 연방공화국이 되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소련을 구성했던 다른 공화국들과 연합하여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CIS)을 수립했다.

역사적으로 유럽권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13세기 몽골족 침입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의 침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외세의 공격을 받아왔다. 이같은 역사적인 특성과 함께 대규모의 산업경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해준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러시아는 소련의 여러 공화국 가운데서도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사색하기에 적합한 자연환경과 혁명전 사회가 안고 있던 복합성이 정신적 자극제가 되어 문학과 음악에 있어 안톤 체호프, 알렉산드르 푸슈킨, 레프 톨스토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이 탄생했다.

1917년의 10월혁명과 혁명이 몰고온 광범위한 사회변혁은 소설가 막심 고리키, 미하일 숄로호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비롯해,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지도
러시아

자연환경

지형

러시아는 지리적 특성이나 지형에 따라 크게 2개의 주요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략 예니세이 강을 경계로 서부와 동부로 나뉜다.

전체국토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는 광활한 서부는 저지평원이 전체에 걸쳐 넓게 자리잡고 있으며, 간간이 구릉지대와 고원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동부는 산악지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저지대도 폭넓게 펼쳐져 있다. 이와 같은 지형적 특성에 따라 러시아는 콜라-카렐리야 지역, 러시아 평원, 우랄 산맥, 서시베리아 평원, 중앙시베리아 고원, 동부와 남부 산악지대 등 6개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콜라-카렐리야 지역 : 6개 지역 가운데 면적이 가장 작은 콜라-카렐리야 지역은 핀란드 국경과 백해 사이에 있는 유럽권 러시아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저지의 평평한 빙산고원인 카렐리야는 최고 고도가 578m이지만 대부분 지역의 고도는 198m 이하이며 낮은 산맥과 언덕이 호수나 늪으로 이루어진 골짜기와 번갈아가며 자리잡고 있다. 콜라 반도 역시 카렐리야와 유사한 지형적 특성이 있는데, 예외적으로 작은 히비니 산은 고도가 1,191m에 이른다.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고대 암석지대는 많은 지역에 걸쳐 표층이나 표층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② 러시아 평원 : 세계에서 가장 큰 저지대인 동부 유럽 평원을 구성하고 있는 최대 지역으로, 서쪽 경계선부터 동쪽으로 우랄 산맥까지 1,600km에 걸쳐, 북극해에서부터 카프카스 지역과 카스피 해까지 2,410km 이상에 걸쳐 뻗어 있다.

이 광활한 지역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은 고도가 낮은 편이지만 예외적으로 모스크바 북서부에 있는 발다이 구릉지대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 342m에 이른다. 그러나 지형을 세분화시키면 매우 다양한 특성을 보인다. 모스크바의 북쪽으로는 빙하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저지대가 널리 분포하고 있고, 호수와 늪이 산재해 있으며 배수가 되지 않는 저지의 골짜기 위로 빙퇴석 산맥이 우뚝 솟아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빙퇴석 산맥으로는 발다이 구릉지대와 스몰렌스크-모스크바 고원(314m)이 있다.

모스크바의 남쪽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기복이 심한 고원과 광활한 평원지대가 교차하고 있다. 서부에서는 최고 고도 293m에 이르는 중앙 러시아 고원이 드네프르 강 상류유역의 저지대와, 오카 강과 돈 강 유역의 저지대를 분리하고 있으며, 러시아 고원 위쪽으로는 프레볼가 고원이 375m의 높이까지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갑자기 급경사를 이루면서 볼가 강에 이른다. 이 고원들 사이로 작은 강들이 흐르며 주요 강들은 저지대를 가로질러 넓고 얕은 범람원을 형성한다.

볼가 강의 동쪽으로는 카스피 해 연안 저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가장 낮은 지역에서는 고도가 해수면보다 27m 이상이나 낮다.

또한 러시아 평원은 남쪽으로 아조프-카스피 지협(북카프카스의 경제지구)을 통과해 카프카스 산맥의 기슭까지 펼쳐져 있는데, 엘브루스 산에서 최고 5,642m에 이르는 카프카스 산맥의 산등성이가 러시아와 자카프카지예 지역에 위치한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카스피 저지). 북카프카스 지역에 넓게 펼쳐져 있는 쿠반 평원과 쿠마 평원 사이에는 해발 305~610m에 이르는 스타브로폴 고지대가 가로놓여 있다.

우랄 산맥 : 러시아 평원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대상형을 이루고 있는 해발 351~457m의 저지 산맥과 저지 고원이 우랄 산맥의 측면에 접해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우랄 산맥의 거대한 산등성이는 북극해의 연안에서 카자흐스탄과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약 2,090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다시 북극해에서 가장 큰 제도인 노바야젬랴 섬까지 960km 더 뻗어 있다. 우랄 산맥은 전통적으로 유럽권과 아시아권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어왔지만, 물리적 이동을 가로막는 경계선은 아니다.

최고봉인 나로드나야 산은 해발 1,895m에 이르지만, 우랄 산맥은 대부분 해발 915~1,524m에서 평행을 이루며 솟아 있는 기복이 심한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페름과 예카테린부르크 사이의 중앙 지역에는 이들 산맥을 관통하는 저지의 고개가 몇 개 있는데, 이 고개들은 유럽권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이다.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암석지대가 널리 분포되어 있다.

서시베리아 평원 : 러시아에서 가장 넓은 서시베리아 평원은 러시아 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단일한 지형적 특성을 나타내는 지역이다.

러시아 전체면적의 1/7에 해당하는 서시베리아 평원은 우랄 산맥에서 예니세이 강까지 약 1,930km, 북극해에서 알타이 산맥 기슭까지 2,410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최남단에서만 고도가 198m를 넘을 뿐이며, 평원의 절반 이상이 해발 100m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십 km에 걸쳐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범람원과 세계 최대에 속하는 일부 늪지들이 지형적 특성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평원의 북반부 지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서시베리아 평원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의 대부분은 비교적 고도가 높고, 기후도 좀더 건조한 북위 55°선상의 남쪽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중앙시베리아 고원 : 예니세이 강과 레나 강 사이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중앙시베리아 고원은 고도 305~701m로 뚜렷하게 이루어져 있다. 북쪽에서는 해발 1,701m의 푸토라나 산맥이 평원의 가장자리에 우뚝 솟아오른 후 다시 하강하여 시베리아 평원의 동부 연장지역인 북시베리아 저지(타이미르 저지)로 이어지며, 남쪽에서는 바이칼리아 산맥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더 북쪽으로는 비랑가 산맥이 북극해까지 뻗어있는 타이미르 반도에 해발 1,146m로 솟아 있으며, 동쪽으로는 저지대의 중앙야쿠트 분지로 이어진다.

⑥ 동·남부 산악지대 :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동·남부 산악지대는 동부와 남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연방 전체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는 이 지역은 연속된 많은 고지의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지형학적 기원 가운데 이 산맥들은 단일한 지형학상의 기원을 가진 주요한 지역으로 여겨지는데, 동부와 남부에서 러시아를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산맥경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바이칼 호 서쪽에는 산맥이 비교적 적은 편이며, 해발 4,507m의 알타이 산맥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및 몽골의 경계선을 형성한다.

알타이 산맥은 동쪽으로 뻗어 투바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V자형의 서(西)사얀 산맥(3,121m)과 동(東)사얀 산맥(3,045m)으로 이어지며, 그 지맥들은 북쪽으로 뻗어 쿠즈네츠크 분지와 미누신스크 분지를 둘러싸고 있다. 바이칼 호의 주변지역은 거대한 단층지대로, 주요단층으로 인해 고지의 고원이나 산맥이 깊은 계곡이나 분지와 분리되었다(정단층). 이 지역은 다양한 지형적 특성을 지닌다.

바이칼 호에서 가장 깊은 지점의 수심은 1,158m이고 그 주변의 산맥들은 2,560m에 달하여 3,718m 이상의 고도차를 나타내고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바이칼 호의 동쪽에는 부채꼴로 펼쳐진 산맥들이 레나 강과 태평양 연안 사이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스타노보이 산맥을 경계로 북동시베리아와 남동시베리아로 분리된다. 해발 2,412m의 스타노보이 산맥은 동쪽으로 태평양 해안까지 약 644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북극해로 흘러들어가는 레나 강과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는 아무르 강의 분수계가 되고 있다.

스타노보이 산맥의 동쪽 가장자리에는 지맥인 주그주르 산맥(1,906m)이 오호츠크 해안을 따라 북동쪽으로 솟아 있으며, 이 산맥은 다시 콜리마 산맥으로 이어져 추코트 반도까지 뻗어 있다. 스타노보이 산맥계에 속하는 여러 지맥들은 북서쪽으로 뻗어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레나 강 정동쪽의 베르호얀스크 산맥(2,389m)과 체르스키 산맥(3,147m)이 있다.

이 산맥계의 북쪽에는 저지의 늪지대인 콜리마 분지가 북극해에 면해 있으며, 체르스키 산맥까지 약 734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오호츠크 해에서 베링 해까지 이어지는 저지의 좁은 회랑지대는 많은 지맥들이 연속되어 이루어진 이 산맥계 지역을 캄차카-쿠릴 지역과 분리시키고 있는데, 캄차카-쿠릴 지역에는 코랴크 산맥(2,561m)과 스레딘니 산맥(3,621m)이 태평양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캄차카 반도를 따라 북동-남서 방향으로 산맥계를 형성하고 있다.

캄차카 반도에는 수많은 화산이 있으며 그중 대부분이 활화산이다. 최고봉은 클류체프스카야 화산(4,750m)으로 러시아의 극동지역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지진활동이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환태평양 조산대의 일부인 이 화산지대는 남동쪽으로 쿠릴 열도를 지나 일본까지 연결되어 있다.

남동시베리아는 고지의 산맥과 광활한 저지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잘 알려진 산맥은 아무르 강 하류의 서쪽에 위치한 바잘스키 산맥(2,640m)과 아무르-제야 강 연안 저지와 태평양 사이에 위치한 시호테-알린 산맥(2,077m)이다.

타타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시베리아 본토와 분리되어 있는 사할린 섬은 가장 좁은 지점에서의 너비가 6.4km에 불과하다. 남북길이가 966km, 동서너비가 40~153km인 사할린 섬은 북부에는 저지평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부에는 동(東)사할린 산맥(1,609m)과 서(西)사할린 산맥(1,325m)이 나란히 뻗어 있다.

수계

러시아 전역에 넓게 펼쳐져 있는 광활한 저지평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강들이 흐르고 있다.

잘 알려진 주요 강유역으로는 북극해, 태평양, 발트 해, 흑해, 카스피 해 유역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가운데 가장 넓은 북극해 유역은 대부분 시베리아에 위치하고 있지만 유럽 평원의 북부지역도 포함하고 있다(북극해분). 북극해 유역으로 오브(3,650km)·예니세이(4,088km)·레나(4,400km) 강 등 3개의 거대한 강이 흐르는데, 유역면적은 총 809만 9,000㎢로 서시베리아와 동시베리아를 비롯해 스타노보이 산맥의 북부인 극동지역을 통과한다.

북극해로 흘러드는 이들 세 강의 총유출량은 평균 4만 9,554㎥/s를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도 북극해 유역의 나머지 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유럽권 러시아를 흐르는 북(北)드비나 강페초라 강, 시베리아 지역을 흐르는 인디기르카 강과 콜리마 강은 내륙과 북극해를 연결하는 수로의 역할을 하지만, 결빙으로 연중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은 짧은 편이다.

또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흐르는 이 강들은 거대한 범람원지역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북쪽으로 먼저 해빙되어 넓은 지역에 걸쳐 홍수가 발생하며, 그로 인해 거대한 늪지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오브 강과 이르디슈 강이 합류하는 곳에 4만 9,210㎢의 바슈가네 늪지가 있다.

시베리아의 나머지 지역(470만 850㎢)을 흐르는 강들은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간다.

특히 강유역이 태평양 연안에 인접한 북부에서는 수많은 작은 강들이 여러 산맥으로부터 급격한 경사를 이루면서 흐르고 있지만, 시베리아 남동부의 넓은 많은 지역에는 거대한 아무르 강이 흐르고 있다. 아무르 강(2,824km)은 많은 지역에서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아무르 강의 지류인 우수리 강도 넓은 지역에 걸쳐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나머지 세 강은 북극해 남쪽의 유럽권 러시아를 흐른다. 드네프르 강은 상류만이 러시아를 흐르고, 1,867km의 돈 강은 남쪽으로 흘러 흑해로 들어가며, 북서부의 작은 지역을 흐르는 강들이 발트 해로 흘러들어간다.

유럽에서 가장 큰 강인 볼가 강은 모스크바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발다이 구릉지대에서 발원하여 카스피 해까지 3,529km를 흐른다. 짧은 연수육로에 의해서만 분리되고, 여러 개의 운하에 의해 보강되는 유럽 평원을 흐르는 볼가 강은 오랫동안 중요한 수송로의 역할을 해왔다. 볼가 강은 러시아 전체 수상교통량의 2/3를 해결하고 있다.

러시아에는 엄청난 수의 호수가 산재되어 있는데, 유럽권 러시아의 북서부에는 가장 규모가 큰 라도가 호(1만 7,679㎢)와 오네가 호(9,720㎢)가 있다.

에스토니아와의 경계지역에는 프스코프 호(3,548㎢)가 있으며 리빈스크 호는 모스크바에 위치해 있다. 돈·볼가·카마 강에는 댐의 건설로 생긴 길이 160~320m에 폭이 좁은 호수들이 있다. 시베리아 지역에는 예니세이 강 상류와 그 지류인 앙가라 강에 이와 유사한 인공호수들이 있는데, 앙가라 강에 있는 547km 길이의 브라츠크 호는 세계 최대의 인공호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호수들은 모두 규모에 있어 바이칼 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데, 세계 최대의 담수호인 바이칼 호는 636km를 훨씬 넘는 길이, 59km의 너비, 3만 1,598㎢의 면적에 최고 수심이 1,594m나 되는 거대한 호수이다.

유럽 평원이나 시베리아 평원에서 배수가 잘 되지 않는 저지대, 특히 북쪽에 위치한 지역에는 규모가 작은 호수들이 집중되어 있다. 이들 호수 가운데 일부는 규모가 상당히 큰 편으로 특히 유럽 평원이 북서부 지역에 있는 벨로예·토포제로·비고제로·일멘 호의 면적은 모두 1,036㎢ 이상이며 시베리아 평원의 남서부에 있는 차니 호의 면적은 1,989㎢나 된다.

기후

러시아의 기후의 특징은 몇 가지 기본적인 요인으로 결정된다.

먼저 광활한 국토의 대부분이 해안으로부터 400km 이상 떨어져 있고, 일부지역은 심지어 2,400km나 떨어져 있어서 전반적으로 대륙성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위도상 북쪽에 위치해 차가운 대륙성기후에 속하는데, 유럽권 러시아의 남부와 아시아권 러시아(시베리아)의 남서부의 일부만이 북위 50° 남쪽에 있을 뿐 러시아의 절반이 넘는 지역이 북위 60°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남부와 동부는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양성 기후가 거대한 산맥들에 막혀 대륙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북부와 서부는 지형학적으로 높은 산맥들이 없어 북극해와 대서양의 해양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사실상 러시아에는 겨울과 여름 두 계절만 있고, 봄과 가을은 신속하게 바뀌는 겨울과 여름 사이에 잠깐 있을 뿐이다.

① 기압과 바람 : 유라시아 대륙의 차가운 겨울바람은 내륙 전체에 걸쳐 강력한 고기압으로 발전하는데, 1월평균기압은 시베리아 지역의 남부 경계선을 따라 1,040mb를 웃돌며 이곳에서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와의 경계선을 따라 서쪽으로 고기압대가 이동한다. 이 고기압권에서 발생한 기압이 그 바깥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유럽권 러시아에서는 남서풍이 불며 시베리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남풍이, 그리고 태평양 연안에서는 북서풍이 분다.

여름에는 이와 반대로 대륙의 기온이 상승해 아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폭넓게 발달한 저기압이 그 안쪽 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유럽권 러시아에서는 북서풍이,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북풍이, 그리고 태평양 연안을 따라서는 남동풍이 분다.

② 기온 : 이와 같은 기압의 이동이 미치는 영향 가운데 하나는 위도차로 발생할 수 있는 남북의 극심한 겨울의 기온차를 고르게 해주고 있는 점이다. 그결과 러시아 평원지역의 등온선은 남북방향으로 형성되며, 동일 위도상의 기온은 서쪽에서 레나 강 하류에 있는 한극으로 가면서 떨어진다.

서쪽에서 동쪽에 이르기까지 거의 같은 위도상에 위치한 여러 기상관측소의 기록에 따르면 1월평균기온이 서시베리아 평원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8℃, 투루한스크에서 -27℃, 야쿠츠크 -43℃, 베르호얀스크에서는 -50℃를 기록했다. 몽골과의 경계지역에서의 평균기온은 그보다 2,400km 북쪽에 있는 북극해 연안의 평균기온보다 불과 1~2℃가 높다. 내륙에서 해안으로 부는 바람 역시 태평양 연안의 기온을 떨어뜨리고 있는데, 프랑스의 리비에라 지역과 같은 위도상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1월평균기온은 -14℃이다.

여름의 기온은 위도와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어 7월평균기온은 북극해제도의 4℃에서 러시아 남부 경계지역의 20℃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최고기온과 최저기온은 이러한 평균기온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는데, 세계 최저기온으로는(북극권은 제외) 베르호얀스크의 1월최저기온이 -71℃이며 7월의 최고기온으로는 몇몇 기상관측소에서 38℃ 이상을 기록했다. 이와 같이 계절의 기온차는 내륙지역으로 갈수록 더욱 커지는데 1월과 7월의 평균기온을 비교해 보면 모스크바에서 29℃, 투루한스크에서 42℃, 야쿠츠크에서 64℃의 기온차를 보이고 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러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가장 뚜렷한 기후적 특징으로 얼음이 얼지 않는 기간은 북카프카스 지역에서만 6개월을 초과할 뿐이며, 위도에 따라 유럽권 러시아에서는 3~5개월,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2~3개월을 기록하고 있다.

③ 강우량 : 러시아 전역의 총강우량은 적은 편이다.

대부분 여름에 많은 비가 내린다. 유럽권과 서시베리아 평원에서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갈수록 총강우량이 감소하는데, 발트 해 연안의 몇몇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강우량이 600㎜ 이하이며 모스크바에서는 533㎜, 카자흐스탄과의 경계지역에서는 약 200㎜의 강우량을 나타낸다. 시베리아 동부에서는 연평균 400㎜ 미만, 북극해 연안 지방에서는 127㎜의 적은 비가 내린다. 태평양 연안지역에서는 다시 강우량이 증가하는데(블라디보스토크 610㎜) 다습한 해양성 계절풍이 비를 몰고와 여름에 많은 비가 내린다.

강우량은 위도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우랄 산맥의 고지대에서는 711㎜ 이상의 비가 내리는 반면, 캄차카 산맥과 시호테알린 산맥에서는 1,016㎜ 이상의 비가 내린다. 적설현상 또한 러시아 전역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기후적 특성으로 적설량과 적설기간은 농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적설기간은 위도와 경도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유럽 평원에서는 40~200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120~250일의 적설기간을 기록하고 있다.

토양·식생·동물상

러시아의 토양·식생·동물상을 통합적으로 구성하고 위도에 따라 연속되는 광범위한 자연환경지대는 서부 경계선에서 레나 강에 이르는 러시아의 평원과 고원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남부와 동부의 산악지대에서는 위도보다 경도가 자연환경지대를 구분하는 주요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다소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경도차가 비교적 작은 지역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러시아는 북극사막지대, 툰드라, 타이가, 혼합림과 낙엽수림 지대, 수목이 무성한 스텝 지대, 스텝 지대 등 6개의 주요 자연환경지대로 나뉜다.

① 북극사막지대 : 식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불모지대로, 대부분의 지역이 얼음으로 덮여 있다.

툰드라 지대 : 러시아 전체국토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는 툰드라 지대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 습지성 평원으로 유럽 평원 최북단의 해안을 따라 대상형을 이루다가 시베리아 지역까지 최대 483km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다.

토양은 아주 척박하며 기온이 낮고 배수가 잘 되지 않아 늪지대가 많다. 불연속적인 제한된 식생지역에서는 간혹 유기물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유기물조차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토양은 산성도가 매우 높다. 또한 연중 오랜 기간 동안 동결되어 있는데, 여름의 해빙기에도 해빙된 표층 바로 아래에 있는 영구 동토층의 영향으로 배수가 잘 안 된다. 일반적으로 습랭한 얕은 표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는 영구 동토층 바로 위로 회색토층이 있다. 식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차이가 나는데, 보통 북극해 툰드라, 관목성 툰드라, 수목이 무성한 툰드라 지대 등 3개의 하부단위로 나뉜다.

북극해 툰드라 지대 대부분이 불모지로 이끼와 지의류만이 자라고 있다. 관목성 툰드라 지대에서는 이끼, 지의류, 초본식물, 키작은 북극해안 자작나무, 관목성 버드나무 등이 자라며, 수목이 무성한 툰드라 지대에서는 넓은 지역에 걸쳐 키작은 자작나무와 낙엽송, 가문비나무 등이 자란다. 툰드라 지대에는 물이끼가 자라는 습지가 넓게 분포한다. 원주민이 기르는 사슴을 비롯해 북극여우·사향소·비버·레밍·흰올빼미·들꿩 등이 서식한다.

타이가 지대 : 툰드라의 남쪽으로 6개의 자연환경지대 가운데 면적이 가장 큰 광활한 타이가(한대림) 지대는 예니세이 강 동쪽 대부분 지역과 북위 56~68°의 북쪽에 있는 유럽 평원과 서시베리아 평원을 포함한다.

동부 타이가에 비해 조금 온화한 편인 서부 타이가와 예니세이 강의 동쪽 타이가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습윤한 서부에서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로 이루어진 울창한 삼림을 볼 수 있으며 배수가 잘 되는 지대로 가면서 소나무, 관목, 목초 등으로 식생의 종류가 바뀐다. 이러한 종류의 식생은 동부 타이가에서도 발견되지만, 동부 타이가에서는 낙엽송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주로 유럽권 러시아의 일부 지역에 한해서 개간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타이가는 세계 최대의 목재보유지로 꼽힌다. 그러나 불연속성의 타이가 침엽수림에는 사이사이에 자작나무·오리나무·버드나무 숲이 넓게 자리하고 있으며, 배수가 잘 되지 않는 지역에는 늪지와 이탄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타이가에는 흑담비·다람쥐·담비·여우·산족제비 등과 같은 모피동물이 많이 서식하며, 특히 말코손바닥사슴·곰·사향쥐·늑대 등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타이가 전역을 덮고 있는 토양은 습윤한 지대에서 형성된 포드졸로 물이 잘 스며드는 특성을 갖고 있다. 타이가의 삼림지대에서는 산성이 강한 부식토 표층이 형성되는데, 이 표층은 서서히 부패하면서 부식산을 배출한다.

산성을 띤 지하수는 아래로 스며들면서 위의 표층으로부터 철이나 칼슘을 빼앗아가고, 그 결과 표층의 토양들은 엷은 색의 산성토양이 된다. 가용성 물질들은 아래 지층에 모이게 되어 대부분 철을 많이 함유한 경반부를 형성하는데, 이것은 또 위에 있는 지층의 배수를 방해하여 회색의 포드졸을 형성한다.

혼합림낙엽활엽수림지대 : 위도가 낮아지면서 기후가 점차 온화해질수록 더욱 많은 종류의 낙엽수들이 넓게 분포한다.

이 지대는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서부 경계지역에서 가장 넓어졌다가 우랄 산맥으로 가면서 점차 좁아진다. 참나무와 가문비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서양물푸레나무·사시나무·자작나무·느릅나무·서어나무·단풍나무·소나무 등도 역시 증가하고 있다. 우랄 산맥 동쪽에서 멀리 알타이 산맥까지 대상형으로 뻗어 있는 자작나무와 사시나무의 삼림지대는 타이가와 수목이 무성한 스탭 지대를 분리하고 있다.

특히 유럽권 러시아에 있는 혼합림과 낙엽활엽수림지대의 대부분 지역들은 개간되어 농업용지로 이용되고 있다. 그로인해 야생동물의 수는 줄었지만 노루·늑대·여우·다람쥐 등은 흔하다. 토양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이행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습지가 줄어들면서 토양의 여과성도 약해지고, 포드졸은 산성이 낮고 유기물질을 더욱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훨씬 비옥한 회색이나 갈색의 산림토양으로 바뀐다.

제2의 혼합림지대는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 유역의 저지대나 극동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아시아 산(産) 참나무·서어나무·느릅나무·개암나무 등이 분포한다.

⑤ 수목이 무성한 스텝 지대 : 혼합림과 낙엽활엽수림의 남쪽으로 수목이 무성한 스텝 지대가 이어지는데, 이것은 명칭에서도 나타나듯이 삼림지대와 스텝 지대 사이의 전이지대이다. 유럽권 러시아의 참나무림과 현재는 농토로 개간된 수목림과 함께 서시베리아 평원을 가로질러 펼쳐져 있는 자작나무림과 사시나무림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목초지대와 번갈아 자리잡고 있는데, 남쪽으로 갈수록 목초지대가 더욱 넓게 자리잡고 있다.

스텝 지대 : 수목이 무성한 스텝 지대는 결국 스텝 지대로 이어지는데, 스텝 지대는 약 322km에 걸쳐 펼쳐져 있으며 우크라이나 남부와 카자흐스탄 북부에서 알타이 산맥까지 뻗어 있다.

더 동쪽으로는 남부산맥계의 분지에 수목이 무성한 스텝 지대와 스텝 지대가 자리잡고 있다.

스텝 지대의 식생은 대부분 왜생초·김의털·새포아풀·아그로피론(왜생초의 일종) 등과 같은 초본식물이다. 또한 다년생 목초와 이끼, 지의류 등도 자라며 남부에는 가뭄에 잘 견디는 식물들이 흔한데, 카자흐스탄에서는 건조 스텝 지대와 반건조 사막지대로부터 중앙아시아의 거대한 사막지대에 이르기까지 가뭄이 계속 이어진다.

스텝 지대라고 하여 산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강유역이나 저지대의 습윤지역에서는 삼림지대를 찾아볼 수 있다. 주로 서부에서는 스텝 지대의 많은 식생을 대신하여 곡물을 경작하고 있다. 광활한 스텝 지대에는 산림과 같은 천연 서식처가 없어서 야생 동물들의 종류를 제한하고 있다. 대표적인 설치동물로는 마못을 포함해 혈거류와 많은 종류의 쥐를 들 수 있다. 스컹크·여우·늑대 등이 흔하며 남부 지역에서는 영양이 서식하고 있다. 능에, 독수리, 작은 매, 종다리, 회색 자고 등의 조류를 흔히 볼 수 있다.

스텝 지대의 특징적인 토양은 체르노젬(흑토)이다.

진한 흑색을 띠고 있는 표층에서 그 명칭을 따왔는데, 보통 1m 정도의 표층은 목초로 빽빽하게 뒤덮여 있는 지역에 형성된 부식토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겨울에는 서리가, 여름에는 가뭄이 유기물의 분해작용을 방해하고 높은 증발률이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 부식토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칼슘 성분은 봄에 녹는 눈으로 인해 지층의 아래까지 스며들지만, 여름에는 다시 위로 끌어올려져 부식표층의 바로 아래의 석회석의 풍부한 지층에 모이게 된다.

산성 함유율이 낮고 부식물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체르노젬은 매우 비옥하여 러시아의 주요 곡물생산지가 되고 있다.

주거형태

1890년대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러시아 인구의 주요변화로는 유럽권 러시아에 거주하던 인구가, 영토의 3/4을 차지하면서도 전체인구의 1/5만이 거주하던 시베리아와 극동지방으로 이동한 사실을 들을 수 있다(인구이동).

인구의 대다수가 유럽권 러시아의 주요 정착지대인 타이가의 남쪽 가장자리, 혼합림과 낙엽수림 지대, 수목이 무성한 스텝 지대, 스텝 지대 등에 거주하고 있다.

이 정착지대에 있는 농촌지역의 인구밀도는 10~100명/㎢이며, 수목이 무성한 스텝 지대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우랄 산맥 동쪽으로 서시베리아 평원의 남부 지역을 가로질러 펼쳐져 있는 농촌지역은 다소 낮은 인구밀도를 기록하고 있는데, 25명/㎢ 이상인 지역은 매우 드물다. 예니세이 강을 넘어 형성된 정착지대는 최남단 지역에서 시베리아 대륙횡단철도를 따라 여러 개의 정착지대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정착지대는 극동지역의 아무르-우수리-제야 강 유역 저지대이다.

20세기 후반 유럽권 러시아에서 일어난 농촌인구의 감소는 두드러진 현상이 되어왔는데, 이 지역에서는 1960~90년대 농촌인구가 거의 30%나 감소했다. 대부분의 농촌지역에서는 인구의 고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인구증가율이 감소하고 있다. 주요 정착지대의 북쪽으로는 인구밀도가 희박한 정착지대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대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그 대표적인 지역으로 야쿠티야(야쿠트 자치공화국)를 들 수 있는데, 이곳은 310만 8,000㎢의 면적에 인구가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소수민족 공화국으로 인구밀도는 0.4명/㎢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대규모의 경제발전과 함께 도시인구가 크게 증가했다(도시화). 1991년 상주인구가 10만 명이 넘는 도시는 약 160개로 집계되었는데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의 도시에는 25만 명이 거주하며, 첼랴빈스크·카잔·모스크바·니주니노브고로트·노보시비르스크·옴스크·페름·예카테린부르크·로스토프나도누·상트페테르부르크·사마라·우파·볼고그라드 등 13개 도시에는 100만 명 이상이 거주한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들은 주요 공업단지로 개발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단독으로 최북단의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모스크바와 니주니노브고로트는 20개의 대도시와 수많은 소도시로 이루어졌으며, 이 도시권에 러시아 인구 중 1/5이 밀집해 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랄 산맥지역의 도시들은 수많은 소규모 광업 및 공업 중심지와 함께 거주인이 25만 명을 초과하는 몇 개의 도시들로 이루어졌다. 볼가 강 유역의 경우 볼가 강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도시들은 특히 인구가 조밀한데, 특히 사마라 주의 인구밀도는 높은 편이다.

유럽권 러시아는 도네츠 석탄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업지대를 포함하는데, 로스토프 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소도시이다.

우랄 산맥 동쪽의 쿠즈네츠크 석탄분지에 도시인구가 집중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광업 및 공업단지가 있다. 주요도시들은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도를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자리잡고 있는데, 옴스크·노보시비르스크·크라스노야르스크·이르쿠츠크·울란우데·치타·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 등이 포함된다.

무르만스크와 아르항겔스크·보르쿠타나노릴스크 등의 광업 중심지와 같은 몇몇 도시들은 멀리 북쪽에 고립되어 있다. 북카프카스 지역에는 소치·퍄티고르스크·미네랄니예보디 등의 휴양도시가 있다. 수도나 그밖의 행정중심지를 제외하고도 여러 주요도시들이 그 지역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를 갖추고 체계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국민

민족구성

러시아는 약 185개의 다양한 민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민족은 대부분 극소수로서 어떤 민족은 수천명에 불과하다. 러시아인을 포함해 100만 명이 넘는 민족은 타타르족·우크라이나인·추바슈족·바슈키르인·벨라루스인·모르도바인 등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중 러시아인은 전체인구의 4/5를 차지한다.

타타르족(Tatar)
타타르족(Tatar)

러시아는 85개의 연방주체로 구성된다. 이는 다시 22개의 공화국, 46개의 주, 9개의 지방, 1개 자치주, 4개 자치구, 3개 연방시로 구분된다. 이들 행정구역에서는 시조의 이름을 자기민족의 명칭으로 하는 민족집단보다 러시아인이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민족 내부와 민족 사이에 갈등이 나타났는데 많은 민족들이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했으며, 그중 몇몇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자치령을 이루고 있지 못한 소수민족공화국들이 6개 지구와 49개 주를 이루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러시아에서는 인도유럽어족(동슬라브어·이란어 포함)·알타이어족(터키어·몽골어·만주퉁구스어)·우랄어족(핀우고르어·사모예드어)·카프카스어족(아브하즈아디기아어·나호다게스탄어)에 속하는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① 슬라브어족 : 러시아인이 대부분이지만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도 일부 포함하고 있는 동슬라브족은 러시아 전체인구의 85%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국토에 걸쳐 넓게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다.

슬라브족은 3~8세기에 유럽의 동부 지역에서 타민족과 구별되는 민족으로 부상했고 9세기에는 최초의 슬라브족 국가인 키예프루시를 건국했다. 몽골의 침입 이후에 권력의 중심은 모스크바로 이전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발트 해, 븍극해, 태평양까지 확장되어 많은 소수민족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러시아어는 광활한 지역에 걸쳐 사용되고 있지만 상당한 정도로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인도이란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는 카프카스 지방의 오세트족이 있다.

슬라브족(Slav)
슬라브족(Slav)

알타이어족 : 튀르크 제어는 알타이어족 가운데 가장 넓게 쓰이는 언어로 주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지배적이며, 알타이족·하카스족·쇼르족·투비니아족·토팔라르족 등 시베리아 남부에 거주하는 민족들도 쓰고 있다.

볼가 강 중류와 우랄 산맥 남부도 중요한 튀르크어 사용지역으로 바슈키르인·추바슈인·타타르인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타타르인은 서시베리아 평원의 수목이 무성한 스텝지대에도 거주하며, 야쿠트족은 주로 레나 강 중류유역에, 돌간족은 북극해에 거주하고 있다.

북부 카프카스 지방에 거주하는 튀르크어 사용 종족은 쿠미크족·노가이족·카라차이족·발카르족 등이며 시베리아의 대부분 지역과 동부 해안에 거주하는 에벤크인에벤인만주퉁구스어를 사용한다. 한편 바이칼 호 동쪽 연안의 부랴트족과 카스피 해 북서부 연안의 칼미크족은 몽골어를 사용한다.

우랄어족 : 유라시아의 삼림지대와 툰드라에 넓게 흩어져 있는 우랄어족은 매우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핀어군(語群)은 유럽지역에 거주하는 몰도바족·마리족·우드무르트족·코미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볼가 강 상류유역 주변과 우랄 산맥에 거주하는 코미페르먀크족도 이 언어를 사용한다. 한편 카렐리야족과 핀란드인, 베프족은 북서부에 거주하고 있다. 만시인한티족은 오브 강 하류에 드문드문 분포되어 있다.

카프카스어족 : 카프카스어족을 구성하는 주요민족들은 카프카스 산맥의 남쪽에 거주하고 있지만, 러시아 내의 북카프카스 지방에도 소규모의 민족들이 많이 퍼져 있다.

아바자족·아디게족·카바르디니아족들도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나흐어군(체첸인·잉구슈인)이나 다게스탄어군(아르바인·레즈긴인·다르긴인·라크인·타바사란인과 그밖의 10여 민족)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⑤ 기타 어족 : 시베리아의 동쪽 끝 지역에는 생활양식은 같지만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몇 개의 구 아시아 제어가 있다.

추크치족·코랴크족·캄차달족 등은 루오라웨틀란어족이라 불리는 어족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에스키모알류트어족과는 별개의 어족이다. 아무르 강 하류와 사할린에 거주하고 니프크족과 콜리마 강 유역의 유카기르인, 그리고 예니세이 강 중류에 거주하는 케트인들은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종교

러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민족들은 각기 민족적 특성에 따라 오랜 시대에 걸쳐 종교적인 요소를 생활 속에 수용해 왔지만, 종교적 조직의 지위나 종교에 대한 각 민족들의 의식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해왔다.

소련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실제적인 종교활동은 엄한 단속을 받았으며, 종교단체에 소속된 사람은 공산당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글라스노스트)과 함께 시작된 종교의 자유는 특히 소련이 해체된 이후 현실화되었으며, 많은 국민들이 여러 종교를 꾸준히 가져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사실상 새로이 부각되고 있는 러시아 민족주의는 러시아 정교를 러시아 문화의 주요요소로 재확인했다.

규모가 가장 큰 종교집단은 그리스도교의 분파인 러시아 정교이다. 그 기원은 대개 10세기가 끝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슬라브 왕국인 키예프루시의 통치자가 비잔티움에서 건너온 전도사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그 이래로 1,000년의 세월 동안 러시아 민족의 주요종교로 자리를 지켜왔다.

이밖에도 17세기에 러시아 정교에서 갈라져 나와 20세기에 발달한 복고신앙주의, 침례교, 복음주의 단체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가톨릭교와 루터교는 소련의 다른 공화국에는 신자들이 많았으나 러시아에는 신자가 거의 없다.

인구통계학

러시아는 수십 년 전과 비교해볼 때 인구증가율이 훨씬 낮아졌는데, 이는 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출생률이 낮아진 것에서 기인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소수민족들, 특히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소수민족들은 여전히 높은 자연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유럽권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극동지역으로의 인구이동은 인구증가율에 있어서 지역적 편차를 가져오는 주원인이 되고 있다.

1970년 0.1%대에 머물렀던 인구증가율은 1993년을 기점으로 감소추세로 돌아섰다. 이후 2009년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 연간 0.1%의 인구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인구는 1970년 1억 304억 명에서 서서히 증가해 1990년 1억 483억 명으로 늘어났고, 이후 소폭 감소하여 2024년 기준 1억 4,395만 7,079명을 기록했다. 인구밀도는 9명/㎢이다.

경제

개요

1917~91년 러시아(당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는 광활한 국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소련의 경제를 이끌어 가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천연자원의 경우 1950년대까지 소련 정권의 주요 경제적 성과인 광업과 야금업, 중공업 분야의 급속한 발전, 철도망의 확장과 다량의 에너지 공급을 가능케 했다. 1960년대에 시작된 제2차 소련 경제발전도 러시아 공화국에 각별한 영향을 끼쳤다. 원유·천연 가스 생산이나 전력, 화공업 등 기간산업의 성장과 함께 산업 생산물의 다양화가 두드러졌으며 제한적이긴 했지만 소비재 생산도 늘어났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 이전에 이미 러시아와 소련의 경제는 전체적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1992년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경제를 중앙계획경제에서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우한 획기적인 일련의 개혁조치를 실행했다. 이런 조치에는 사기업의 허용과 영리추구를 위한 투기활동, 내·외국인의 투자 허용과 공기업 민영화 정책이 포함되었다.

증권이 발행되어 러시아 국민들은 사유화된 기업들로부터 주식을 살 수 있었고 경매를 통해 이를 팔 수도 있었다. 실제로 증권은 종종 현금처럼 팔리기도 했으며 중개업자들이 이를 사들이기도 했다. 상품시장 경제와 주식시장이 자리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민영화 과정은 느리게 진행되었고 많은 중공업 기업들은 여전히 국가 소유로 남아 있었다. 지방에서는 토지개혁의 입법화로 농민들이 구획정리된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 또한 더디게 진행되었고 많은 이들은 여전히 구제도에 매달려 있었다.

시작부터, 이러한 조치들은 일반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큰 고통을 가져왔다.

통화체계는 혼란스웠으며 가격통제 제도의 폐지로 인해 인플레이션율과 물가가 크게 상승했다. 루블화의 가치는 폭락했으며 가정의 실질 수입은 급격히 감소했다. 산업과 농업 생산은 줄어들었고 실업률은 상승했으며, 도시지역에서는 소비재 물품과 식품의 부족현상이 빚어졌다. 이러한 어려움은 비공식적인 경제부문(암시장)의 빠른 발달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이런 추세로 인해 성공적인 기업가와 일반 노동자 사이의 간격은 더욱 벌어졌다.

상황은 1990년대 중반들어 많이 나아졌지만 생산과 소비 양쪽 모두 소련 정권 시절 기록했던 최고치보다는 낮음 수준에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함께 러시아와 다른 공화국들은 옛 소련 시기에 장기간에 걸쳐 심각한 환경피해를 입었는데, 1990년대에 와서야 그 전모가 드러났다. 이런 상황이 가장 명백히 드러난 국면들-예를 들어 체르노빌 사건과 그 여파, 유입수 전용으로 인한 아랄 해의 급격한 수량감소-은 토지를 황폐화시키는 농업 관행, 자원의 착취, 광범위한 산업 공해로 얼룩진 수십년이 증상으로 나타난 것 뿐이었다.

환경관련 문제는 경제구조 변화로 휩쓸려 있는 러시아에 놓여진 또다른 짐이었다.

현재 러시아 경제의 기반은 소련 시절동안 발전해온 것과 매우 유사한 형태이다.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나누고 있는 11개의 경제권은 유럽의 북부, 북서부, 중부, 볼가-뱌트카 강, 중부흑토(중앙 체르노젬 지역), 카프카스 북부, 볼가-우랄 강 권역이며, 아시아의 시베리아 서부, 시베리아 동부, 극동권이다.

자원

러시아는 막대한 에너지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우 다양한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어 현대 산업에 필요한 거의 모든 원자재를 국내에서 자급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여건하에 중공업이 발전할 수 있었고, 중공업의 발전은 소련이 1950년대까지 이룩해놓은 주요한 업적이었다.

① 연료와 에너지 : 러시아는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가운데 가장 많은 석탄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가장 거대한 탄전은 동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의 퉁구스카 강과 레나 강 유역에 있지만 이 탄전은 대부분 개발되지 않았고, 러시아의 석탄생산은 대부분이 시베리아 대륙횡단철도를 따라 보다 남쪽에 있는 쿠즈네츠크, 칸스크-아친스크, 체렘호보 탄전과 그보다 규모가 작은 여러 개의 탄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에서 러시아 석탄 생산량의 3/4이 채굴되고 있으며, 그 나머지는 유럽권 러시아의 소규모 탄전들과 북부의 페초라, 우랄 산맥, 동부의 도네츠 석탄분지, 모스크바 분지(갈탄)에서 채굴된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석유, 천연 가스 생산국가로 손꼽히는데, 생산량의 4/5 이상이 시베리아 지역, 특히 서시베리아의 북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유전에서 채취된다.

그외에도 석유 생산량의 1/3과 천연 가스 생산량의 1/6이 유럽권 러시아에서 채취되는데, 볼가 강-우랄 산맥 지대, 북카프카스 지역, 북부(코미) 지역에 주요유전이 자리잡고 있다. 거대한 송유관들이 유전지대를 러시아 전역과 서부 경계선을 가로질러 동부 유럽과 서부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까지 뻗어 있다.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연료자원의 대부분은 전력생산에 이용되는데, 전력 생산량의 2/3가 화력발전으로 얻어지지만 수력발전을 통해서도 많은 전력을 생산하고 있으며, 볼가·카마·오브·예니세이·앙가라 강 등에 대규모의 수력발전소가 있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사업이 크게 위축되기도 했지만, 러시아 내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많이 있다. 굉장한 양의 전력이 시베리아 지역에서 생산되어 고압 송전선을 통해 서부로 보내진다.

② 기타 광물자원 : 러시아에는 많은 양의 광석이 매장되어 있으며, 주요매장지는 중앙 체르노젬 지역(쿠르스크 자기 이상 지역), 우랄 산맥, 콜라 반도, 시베리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대규모 제강소는 주로 우랄 산맥 지역, 중앙 체르노젬 지역, 쿠즈네츠크 분지에 있지만, 공업지역 전체에서 상당량의 강철을 생산하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많은 종류의 비철금속이 생산되는데, 그중에서도 우랄 산맥 지역은 비철금속 야금업의 주요 중심지이다. 또한 러시아는 코발트·크롬·구리·금·납·망간·니켈·백금·텅스텐·바나듐·아연 등의 주요 생산국이기도 하다. 시베리아 지역의 수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으로 가동되는 제련소에서는 알루미늄을 생산하고 있으며, 보크사이트의 매장량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산업

① 기계제조업 : 기계제조업의 발달로 연방 내의 증기 보일러, 터빈, 전기 발전기, 곡물용 콤바인, 자동차, 전기 기관차 뿐만 아니라 공작기구, 도구, 자동화 기계부품 등을 자급하고 있다.

주요자동차 공장은 모스크바·니주니노브고로트·미아스·야로슬라블·심비르스크·이제프스크에 있으며, 가장 규모가 큰 공장으로는 톨리야티(사마라 근처)에 있는 지굴리 공장과 나베레즈니예 첼니에 있는 거대한 트럭 공장을 들 수 있다.

② 화학산업 : 화학산업은 처음에는 암염·코크스로(爐)나 제련소에 추출된 가스·목재·식품(주로 감자)을 원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야로슬라블·예프레모프·보로네슈를 비롯해 대규모의 감자생산지역에 합성고무 공장이 들어섰으며, 비철금속 야금업으로 유명한 크라스노우랄스크·키로보그라트·카라바슈·메드노고르스크·첼랴빈스크·블라디카프카스에는 황산 공장이 세워졌다.

칼륨과 인산 광산이 인접한 근처에 있는 솔리캄스크·베레즈니키·페름·보스크레센스크·브랸스크·크라스노우랄스크·멘델레예프스크 등에는 칼륨염·인회토 비료공장이 세워졌다.

1950년대말 석유와 천연 가스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여 화학산업용 원자재로 이용되면서 종래의 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감소시켰고, 새로운 화학산업 공장들이 볼가-우랄 지역이나 북카프카스 지역의 석유, 천연 가스 생산지역을 비롯해, 송유관을 통해 이 지역과 연결되는 그밖의 지역에 건설되어왔다.

셀룰로오스 생산과 같이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 화학 공장들은 목재와 전력이 모두 풍부한 시베리아 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③ 경공업 : 섬유산업은 유럽권 러시아, 특히 중앙에 크게 집중되어 있는데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의류와 신발류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텍스타일). 냉장고·세탁기·라디오·텔레비전과 같은 내구 소비재는 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그 주변지역에서 생산된다.

농업·임업·수산업

농지는 전국토의 1/6이 채 안 되고, 농지의 약 3/5이 경작지이며 그 나머지는 방목장과 목초지로 사용된다.

주요농산물은 곡물로 경작지의 절반 이상에서 곡물이 재배되고 있다. 가장 주요한 곡물은 밀이며, 그 다음으로는 보리·호밀·귀리가 있다. 경작지의 1/3 이상에서 목초·클로버·근채작물 등의 사료작물을 재배하고 있으며, 특히 남부에서는 옥수수를 재배하고 있다. 그 나머지 지역에서는 해바라기·사탕무·아마 등 산업용 작물을 비롯해 감자와 그밖의 채소를 재배한다.

지형·토양·기후의 차이에 따라 농업에서도 현저한 지역차가 나타난다.

유럽권 러시아에서는 경작지의 비율이 남쪽으로 가면서 점차 증가하는데, 북부에서 1%에도 못미치던 것이 중앙 체르노젬 지역에서는 2/3를 넘어서고 있다.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에서의 작물 재배는 주로 남부 가장자리에 국한되어 있으며, 경작지가 가장 넓은 서시베리아 지역조차도 전체면적의 1/10이 안 되는 지역에서 작물재배가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작지의 2/3 이상에서 곡물이 재배되고 있는데 비해 습지성의 북서부 지역과 중앙지역에서는 절반에도 못미치고 있는 실정이며, 이 지역에서는 사료작물의 재배와 가축사육이 더 중요하다.

농업의 집약성이나 생산성은 유럽권 러시아가 시베리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가축사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세계 최대의 삼림지대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에서는 제재·펄프·제지·목재 산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침엽수림이 많은 러시아는 세계 연재(軟材) 생산량의 1/5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삼림을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산업은 점차 우랄 산맥의 동쪽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수산업은 러시아가 주요 2대 어획지대인 대서양과 태평양의 많은 어장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전체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대서양에서 러시아의 어획지대는 전통적인 어획지대인 바렌츠 해에서 북아메리카와 서아프리카 해안까지 뻗어 있다. 유럽권 러시아의 주요항구로 발트 해에 면한 칼리닌그라드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해 멀리 북부에 있는 무르만스크와 아르항겔스크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태평양 연안에 있는 주요항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 캄차카에 있다. 또한 아조프 해, 흑해, 카스피 해 등지에서 소규모의 어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강물의 유입량이 감소하고 농업용 폐기물과 공업용 폐수가 유입되어 해수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밖에도 내륙의 호수와 강에서 어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양식업도 성행하고 있다.

무역

러시아는 소련을 구성했던 다른 공화국들과 대규모의 교역을 했으며, 국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곡물과 광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다.

반면 러시아는 벨라루스나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처럼 에너지 자원이 빈약한 공화국에 석유와 천연 가스를 수출하고, 대부분의 공화국에 숙련된 기계제품과 소비재를 수출했다. 1992년초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한 신생독립국가들 사이에는 체계적인 교역관계가 수립되지 못했는데, 연합 국가들의 상호의존도가 매우 높았으며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집단적인 자유무역제도가 요구되었다.

1960년대까지 소련의 국제무역은 다소 저조한 수준이었는데 대부분의 교역은 코메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COMECON) 회원국가들과의 쌍무적 협정 또는 다국간 협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경제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경제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1970~80년대 소련의 경제가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서방세계로부터 첨단장비를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다. 또한 첨단장비 수입에 소용되는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경화(硬貨)가 필요했고, 이것은 서방으로의 수출을 늘리는 방법으로만 해결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교역량을 증대시키는 방안에서 석유와 천연 가스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80년대말 석유와 천연 가스는 소련 총수출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코메콘이 붕괴되고 소련이 해체되자 소련을 구성했던 여러 공화국들은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독자적인 교역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지만, 1992년초까지만 해도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석유와 천연 가스를 막대하게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는 이미 소비에트 시대에 수립된 서방세계와의 교역관계를 잘 이끌어오고 있다.

교통

러시아의 수송체계에 있어서 커다란 장애요인은 광활한 국토와 원자재나 식품의 생산지를 소비자와 분리시키고 있는 머나먼 지역적 격차이다.

그결과 철도가 계속해서 가장 주요한 수송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전국 화물수송량의 약 90%(송유관을 포함시킬 경우에는 60%), 여객수송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철도망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가설되어 있지만 지역에 따라 설비율에 차이를 나타낸다. 북서부 지역과 중앙 지역을 비롯한 중앙 체르노젬 지역은 가장 높은 설비율을 보이고 있는 반면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은 설비율이 가장 낮다.

사실상 우랄 산맥의 동부는 '철도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부적합할 정도로 철도시설이 미흡한데, 주요 간선철도 몇 개(시베리아 대륙횡단철도, 바이칼-아무르 철도 등)와 주요한 공업지역을 연결하는 몇 개의 지선이 철도시설의 전부이다. 러시아의 철도는 세계 최대의 화물량을 수송하고 있는데 특히 쿠즈네츠크 분지에서 우랄 산맥까지 연결되는 철도가 가장 많은 화물을 수송하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시베리아 횡단철도

유럽 평원의 주요도시들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를 제외하고 러시아의 도로망은 빈약한 편으로 전체 화물수송량의 2% 이하를 담당하고 있으며, 대부분 가까운 철도역까지 짧은 거리의 수송이다.

사실상 내륙의 수로가 도로보다 더 많은 양의 화물을 수송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화물량의 수송은 볼가 강을 통해 이루어지며, 내륙수로는 철도가 가설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또한 해상교통은 외국과의 교역에서 차지하는 주요한 역할 외에도 러시아 내의 여러 지역, 특히 북극해 연안에 있는 지역들을 연결시켜 준다.

항공교통도 점차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수송되는 화물의 양은 적은 편이다.

항공기가 유일한 수송수단인 시베리아의 고립지역들 사이를 연결하며 주로 가격이 높은 화물들을 수송한다. 그러나 전체 여객수송의 1/5 가량을 항공기가 담당하고 있으며, 특히 장거리 여행에서는 철도와 비슷한 수치의 여객을 확보하고 있다. 아에로플로트항공회사는 연간 8,000만 명 이상의 여객을 수송하고 있다.

정치와 사회

정치

① 소비에트 연방 : 시기의 정부 소련의 붕괴가 있기 전,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다른 14개의 연방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소비에트 헌법(1918, 1924, 1936, 1977)의 지배하에 있었다. 1980년대 후반까지 소련정부의 모든 구조는 각각의 단계에서 전권을 지닌 공산당에 의해 지배되었고, 공산당의 지도자가 사실상 국가 지도자였다.

소비에트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소비에트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소비에트 헌법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명목상 노동자와 농민으로부터 나온 권력에 의한 사회주의 국가였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와 생산·분배·교환 수단을 전 인민이 소유하는 공유재산제도가 연방 경제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자리잡게 되기 전에 이미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이전의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벗어나 소비에트 정부 구성을 결정했다. 1918년 1월 제3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공식 수립했으며, 7월에는 연방공화국 최초의 헌법이 공포되었다. 내전(1918~20)이 진행되는 동안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러시아 내전).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를 위시한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결성했으며, 2년 뒤에는 소비에트 연방 헌법이 비준되었다.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헌법이 각 구성 공화국들의 연방 탈퇴권을 보장한 것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1937년 1월 임시 제17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채택된 1936년 헌법으로 확립된 연방 구조는 이후 50여 년 간 존속하면서 1978년 개정에도 별다른 영향을 입지 않았다.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자치공화국들과 자치주, 자치관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성 공화국들을 형성할 정도가 못되는 소수민족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 자치주, 자치관구를 구성하며 각기 연방공화국과 연방공화국 내 일반행정구역인 지구·주에 속한 각 행정단위는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소비에트나 러시아연방의 최고 소비에트에 대표를 파견하여, 최고 소비에트는 두 경우 모두 연방 소비에트와 민족 소비에트의 양원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자치공화국은 독자적 헌법과 함께 입법·행정·사법 기관을 갖추고 있는 등 상당한 정치적 자유를 누리며 소련과 러시아 공화국의 최고 소비에트에 대표를 파견했다. 자치주와 자치구에서도 대표를 파견하지만 자치공화국의 경우와는 달리 자치권에 내정에만 국한되었다.

이 체제 아래서 국가의 최고 권력 기관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최고 소비에트였으며, 여기에서 행정기구인 각료회의가 조직되었다. 각 자치공화국에는 최고 소비에트와 각료회의가 있었고, 지역단위의 소비에트는 주·지구·관구·구·도시와 그밖의 지방의 제반 업무를 관할했다. 이 모든 공화국 행정은 최종적으로 소비에트와 각료회의의 결정에 귀속되었다.

1988년까지 모든 선거는 후보자의 대다수가 사실상 공산당에 의해 지명, 선출되는 단일 선거에 지나지 않았다.

② 과도기 :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데모크라티자치야(민주화) 정책이 집행되었던 1980년대 후반부터 1991년까지 정치체제와 소련의 정부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것은 소련의 성격과 지방 공화국들의 위상·권력도 바꿔 놓았다. 가장 먼저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1988년 소비에트 연방 최고 소비에트가 소련 인민대표회의와 각 구성공화국의 인민대표회의를 발족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킨 일이었다. 1989년 선거가 실시되었고, 비록 대다수가 공산당원이었지만 처음으로 국민들은 비당원이 포함된 후보자들 중에서 지지하는 후보를 선택할 수 있었다. 1/3은 지역구에서, 또다른 1/3은 전국구에서, 나머지 1/3은 공산당, 노동조합, 직능단체 등의 조직들로부터 선출되었다.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이후 전개상황에는 가속도가 붙어 1991년에는 그 정점에 도달했다. 1990년 6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인민대표회의는 러시아 법이 소비에트 법보다 우선함을 공포했다. 1991년 4월에는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러시아연방의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직을 신설했으며, 6월 보리스 옐친이 처음으로 민주적 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강경파의 8월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대부분의 소련 정부 조직들이 붕괴되었고, 행정부 내에서의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이 폐지되었으며, 공산당 자체가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잇달아 공화국들은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나섰고 12월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해체되었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연방과 이전 소련의 공화국중 10개의 공화국은 소련을 대체하는 느슨한 국가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를 결성했다. 러시아는 CIS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지배적인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③ 러시아연방 결성 : 후의 정부 새 러시아 정부의 구조는 이전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부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주로 헌법이 부여한 권리에 대한 문제와 경제개혁, 민주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속도에 대해서 행정부와 입법부가 벌이는 힘겨루기로 특징지워졌다. 1993년 9월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러시아의 의회를 해산했을 때 이런 갈등이 표출되었는데, 의원들과 그 지지자들은 이에 강하게 저항했고 군사개입에 의해 겨우 진정되었다.

1993년 12월 옐친이 새 헌법안을 제안했고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받아 새롭게 의회가 구성되었다. 1993년 12월 22일부터 효력을 발생한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이전과는 달리 상당한 권력을 부여했다. 대통령은 각료뿐만 아니라 총리 및 핵심 법관을 임명하며, 의회의 결정을 무효화 할 수 있고 나아가 의회를 해산할 수도 있게 되었다. 새 의회인 연방의회는 연방위원회(89개의 공화국·지역에서 선출된 의원 178명으로 이루어진 상원)와 국가두마(정당비례대표제로 선출된 의원과 단일 선거구에서 선출된 의원 450명으로 이루어진 하원)로 나누어져 있다. 신헌법에 의해 지역들의 위상은 상당부분 위축되었고, 모든 지역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신헌법에 포함된 조항으로 복지, 사회보장, 연금, 무료진료와 안정적인 가격의 주택 공급 등이 있다.

공화국 자치공화국 자치주
다게스탄 고르노알타이 예브레이스카야
마리 아디게이
모르도바 카라차이체르카시야
바슈키리야 하카시야
부랴티야
세베르나야오세티야
야쿠티야
우드무르티야
잉구셰티야
체체니아
추바시야
카렐리야
카바르디노발카리야
칼미키야
코미
타타르스탄
투바
러시아1)각주1) 의 공화국·자치공화국·자치주
사법제도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의 러시아 최고의 사법기관은 최고 소비에트가 선출하는 5년 임기의 최고재판소였다. 최고재판소는 자치공화국의 최고재판소와 기타 행정단위의 재판소를 포함한 공화국 내 모든 사법기관의 활동을 규제·감독했다. 지금도 최고재판소가 러시아 최고 사법기관이다. 1991년 러시아 법과 조약의 재심리를 위해 헌법재판소가 설치되었다. 러시아의 사법절차는 러시아어나 유력한 소수민족의 언어로 이루어지며, 법원의 공식어를 모르는 경우 통역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모국어로 증언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법원은 모든 시민은 법 앞에 동등하며 소비에트 법의 적용에 있어서도 동등하다는 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헌법상의 정의를 실현한다. 법관은 법률에 의거하여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피의자는 공개재판의 원칙하에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갖는다. 과거에 이러한 법의 이상은 많은 경우 무시되었고 스탈린 시대에는 수백 만의 시민들이 비합법적 사법처리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비록 소규모이기는 해도 비합법적 사법처리의 관행은 1980년대초까지 공공연히 지속되었다.

군사제도

러시아 군은 육군, 해군, 공군, 방공부대와 전략미사일 부대로 이루어지며 대통령의 지휘체계 아래 있다. 전체 군인의 절반 정도가 징집병으로 복무기간은 육군 18개월, 해군 24개월이다. 대상은 18세 이상의 남성이지만 복무회피가 만연해 있다. 예비군 수가 엄청나다. 러시아의 군사기지는 몇몇 옛 소련의 공화국들에 분산되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CIS군에 속한다. 소련 붕괴 이후 군사력은 점점 쇠퇴추세이지만 여전히 러시아군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이며 방대한 핵무기도 보유하고 있다.

해외와 국내 정보수집을 위해 각각 대외정부와 연방정보국이 있는데, 두 기관은 1991년 소련 KBG로 알려졌던 국가보안위원회가 사라진 후 설치되었다. 고위공직자들은 경호부대의 호위를 받는다. 지방 경찰들은 시장경제 도입 이후 갑자기 늘어난 조직 범죄에 대항하면서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잘 훈련된 시설보안요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교육제도

1990년대가 시작되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소련의 교육제도는 중앙집권화되어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의 교육제도는 아직까지 소련의 옛 교육제도와 유사한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포함해 특히 공산당의 해체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운동의 결과 많은 학습과목에 있어서 주요 학습내용이 크게 개정되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골자로 한 강제적인 사상교육이 사라졌다. 한편 유치원 교육이 매우 발달하여 비의무교육임과 동시에 학부모들의 재정적 부담이 요구되는데도 불구하고 취학전 아동 가운데 많은 수가 보육원이나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무상·의무 교육은 7세에 시작되어 최소한 8년 동안 지속되는데, 학령아동의 60% 이상이 10년까지 학교교육을 받고 있다. 고등교육은 특정대상에게만 허용되며 경쟁도 매우 치열하다. 대학과정을 수료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5년이 소요된다. 비러시아인 학령아동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로 교수를 받지만, 러시아어는 중등교육 과정에서는 필수적인 학과목이다. 러시아의 고등교육은 대부분 러시아어로 이루어지지만, 소수민족 공화국에 있는 몇몇 고등교육기관에서는 그 지역의 토속어로 교수된다. 러시아에 있는 많은 대학교 가운데 가장 유명한 대학으로는 모스크바대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가 있다.

사회제도

근로자와 공무원들의 월평균임금은 공공복지기금에서 지불되는 수당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임금은 업무의 종류, 특히 노동의 정도를 포함해 근로조건이나 산업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등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건설업이나 운송업, 탄광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에게는 평균치보다 높은 임금이 지불된다. 집단농장의 근로자들은 다른 모든 의무지출금(세금·의무투자금·종자준비금)을 먼저 지불한 후에 남는 것을 임금으로 받는다. 토지소유와 재산의 매매·양도는 여전히 소련 이후 러시아가 풀어야할 문제로 남아 있다. 1993년 법안을 통해 토지의 사적소유가 허용되었지만 매매·양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 1996년 2번째 법안이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입안되었다. 국가예산이나 기업체, 노동조합에서 지불되는 공공복지기금은 러시아 내 근로자들의 생활수준을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널리 이용된다. 공공복지기금 가운데 많은 부분이 무상의료혜택이나 교육·연금·장학금을 위해 할당된다. 러시아의 모든 근로자나 전문 직업인들은 최고 1개월까지의 유급휴가를 받는다. 국민의 보건상태나 물질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사망율이 감소하고, 위험한 전염병이 사라졌으며 평균수명이 연장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평균수명은 급격히 낮아졌고 특히 남성의 경우가 더했다. 러시아는 1991년 출생률의 급격한 하락과 사망률 상승으로 마이너스 인구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결과가 나타난 밑바탕에는 사회적·생태학적·경제적 요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경제적 혼란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농업·공업 폐기물로 인한 음식과 식수의 오염, 영양 결핍, 독성물질에 노출되는 작업현장, 높은 수치의 담배와 술 소비율이 그것이었다. 고도로 산업화된 지역의 대기오염은 지역주민들의 높은 폐암 발생률로 나타났으며, 탄수화물 섭취는 많고 과일·야채·우유와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가 적은 지역에서는 위암 발생률이 높았다. 젊은 층에 높게 나타난 알코올중독증과 마약중독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비록 러시아가 많은 의사를 충원하고 있지만 서투른 집중치료와 응급치료 능력,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의료요원, 약품 부족, 산과 병원과 호스피스와 같은 전문의료 부족 등으로 보건 의료의 질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문화

개요
러시아
러시아

이곳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련의 문화는 1917년 소련의 출발에서부터 1991년 해체되기까지 소련의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독창적인 문화활동의 결실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에는 소련의 문화정책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러시아의 예술가와 문화와 관련된 사회제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소련의 문화에 관한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더이상 이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련의 문화를 꽃피우던 소련이라는 국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실체가 소련을 대신하더라도 소련 문화를 구성하던 사회적인 제도들은 지난 74년간에 걸쳐 그것이 발전되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구성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볼 때 소련의 문화가 창출될 수 있었다는 것은 소련의 건국과 관련된 다른 많은 가정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소련의 영토에 수세기에 걸쳐 존속해오다가 소련이라는 연합국가의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된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지닌 수백 개의 민족집단으로부터 단일적인 민족문화를 도출해낸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지라도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1917년 소련의 수립 이후 문화정책 입안자들과 독창적이며 활동적인 예술가들이 직면한 문제는 아주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혁명 전 제정 러시아의 정권이 일관되게 추진했던 러시아 중심의 획일적인 문화·교육 정책에서 탈피하여 러시아어, 러시아 문화뿐만 아니라 비(非)러시아인들의 민족언어와 그 문화도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에 정치가들과 볼셰비키 정부의 정치이상을 지지하던 예술가들은 혁명의 이념을 표현하고 전소련 인민과 전세계에 전시할 통일된 국민문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반되는 이 두 주류는 만족스런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타협의 일환으로 비러시아 민족문화권이 자신들의 전통예술을 계승해온 대규모 공연예술단을 통해 발전적인 문화예술 활동을 펴는 것은 허용하지만 독창적인 예술활동은 어느 정도까지 중앙(주로 러시아)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절충안에 이르렀다.

소련 문화의 창작가들이 직면했던 또 하나의 커다란 난제는 생활의 전영역에서 소련 공산당의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전체적인 국가이념과 다양한 예술적 표현방법 및 개개의 예술가들이 지닌 예술관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는 했지만 예술가들이 획일적인 국가조직과 충돌하면서 자유를 주장할 법한 사태가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처음 몇 년 동안 정부가 문화와 관련된 토론활동에서 행했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했기 때문이다. 소련 정부는 문화정책에 앞서 러시아 내전(1918~20)과 경제회복에 전력했다.

1920년대에는 권력의 통합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소련 정부의 초대 교육부장관인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는 모든 형태의 실험적 문화활동에 대해 매우 관대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와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혁명 이후 10년 동안 문학·미술·영화·연극 등의 분야에서 독창적이며 실험적인 창작품들이 많이 쏟아져나왔고, 그 대부분이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오히려 이 기간중에 통합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주체는 대개 정부가 아니라 예술가들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전제정치하에 놓인 1930년대에는 점차 독창적인 예술이 사라지고 국가조직으로부터의 압력이 강화되었다.

단일한 소련 문화가 부각되기 시작했고, 소련 정부는 정부의 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이 출판·전시·공연 활동을 벌일 수 없도록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특히 상징적인 2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 첫째는 1930년에 일어난 천재시인 블라드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자살사건이다. 마야코프스키는 열렬한 혁명지지자였던 동시에 강한 개인주의적·독자적 성향을 가진 예술가였다.

많은 예술가들은 그의 죽음을 상반되던 2개의 문화주류가 공존했던 시대의 종식으로 받아들였다. 또다른 사건은 1934년에 소비에트 작가동맹이 결성되고 동맹의 제1차 작가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소련 문학과 문학비평의 기본방법으로 채택한 것이다. 얼마 후 소련에서 유일한 창작방법론이 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실제적인 개념정의는 동맹의 회장인 막심 고리키가 주도한 여러 작가들과, 스탈린 문화정책의 추종자였던 안드레이 주다노프, 이후 곧 숙청될 운명을 가졌던 니콜라이 부하린을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이 함께 토론을 거쳐 정리했다.

소비에트 작가동맹의 작가대회에서 채택한 개념정의에 따르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역사 속에서 혁명적 발전단계에 따라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예술이론으로 볼 수 있다.

이 이론을 실제적인 예술활동에 적용하는 데 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해는 불명확했지만, 이것이 실험예술이나 추상예술을 허용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드러났다. 1930~4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문학 분야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고, 뒤이어 시각예술, 영화, 심지어 음악에도 적용됨으로써 점차 상투적인 예술사조로 자리를 굳혀갔다.

모든 소설은 젊은 혁명당원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공장이나 농장 또는 건설현장을 부흥시키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파괴행위자, 간첩, 그밖의 장애요인들을 제거하고 승리를 쟁취한다는 내용으로 일관되었다. 시각예술의 경우 1920년대에 형상이나 색채를 통해 추상성을 띠는 실험예술이 성행했으나 스탈린 시대에 들어서는 작업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현실적 대상인 농민과 근로자를 주제로 한 기념적인 풍경회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음악에서는 단순하고 활발하며 애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멜로디가 주로 작곡되었으며 복잡한 하모니, 무조음악, 음렬음악 등은 금기사항이 되었다. 국가가 인정하는 예술형식에 부합되는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들은 상과 함께 대부분의 시민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재화를 제공받고 큰 명성을 누릴 수 있었다. 반대로 정부가 지시하는 예술형식을 거부한 예술가들에게는 다양한 처벌방법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관대한 처벌은 출판·전시·공연활동을 금지하는 것이었지만, 수많은 위대한 소련 예술가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 구류·감금되었고 그중 많은 사람들은 다시는 그곳에서 되돌아오지 못했다.

더욱 끔찍스러운 일은 1937~53년 소련 정부가 수백 명에 달하는 뛰어난 예술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던 수백만 명의 시민들을 처형했다는 사실이다. 문화영역에 미친 이같은 정부의 강압정책의 결과 1930년대에서부터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소련에서 창작된 위대한 예술작품의 대부분은 소련인들의 표현을 빌리면 '책상서랍' 속에 쌓아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들은 출판이나 전시, 공연활동을 위해 결코 제출되지 않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떤 경우에는 1980년대말까지 숨겨져왔으며 서로 친한 측근들에게만 알려지거나 예술가 혼자만이 알고 있기도 했다.

스탈린의 사망 후, 특히 흐루시초프가 1956년 스탈린을 전제적인 독재자로 비난한 유명한 연설 이후에 '해빙기'(러시아어로 오테펠이라 하며 1954년 발간된 일리야 에렌부르크의 소설 제목에서 비롯되었음)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물론 이 시기의 자유는 1920년대 예술가들이 누렸던 자유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스탈린 치하의 오랜 암흑시대를 겪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예술계로의 복귀가 점진적으로 허용되었으며 신진작가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 Doktor Zhivago〉와 같이 이념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작품들이 소련 영토 내에서 발행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검열제도는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1964년 흐루시초프가 축출되기 이전에 이미 그가 집권했던 초기의 몇 년간을 상징하던 비교적 자유로운 문학의 해빙기는 다시 이전의 암흑기로 되돌아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레오니트 브레주네프가 서기장으로 집권하는 동안 더 심해졌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주요 사건으로는 시인 요시프 브로드스키와 작가이자 비평가인 안드레이 시냐프스키의 유명한 재판사건을 들 수 있다. 브로드스키는 공식적인 직업이 없이 시인으로서 생계를 이어갔다는 이유로 1964년 소련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불로죄(不勞罪)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소련은 물론이고 서방세계의 진보적인 지식계층 사이에 회자되었으며 브로드스키는 결국 1965년말 석방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시냐프스키와 율리 다니엘이 체포되었고, 두 사람은 1966년 해외에서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 역시 대대적인 시위를 야기시켰으며 이후 널리 확산된 반체제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평가된다.

다시 부활된 국가의 탄압정책에 대응하여 예술가와 작가들은 여러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거나 읽기 시작했다. 집에서 출판한 서적을 돌려서 읽거나 수집가의 집이나 화가의 화실에서 그림을 몰래 감상했다. 그러나 브레주네프 집권시절중 가장 가혹했던 기간의 탄압정책도 스탈린 시대의 탄압정책만큼 잔인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예술가들이 처형당하는 일은 없었다. 반체제 작가들은 다른 나라로 이주할 것을 강요받았으며 끝내 국가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반체제 예술가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한 후 서방세계로 추방되었다.

소련 문화의 마지막 시기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글라스노스트를 선언한 후에 시작되었다. 검열제도는 완화되다가 결국 철폐되었고 독립적인 출판사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추방되거나 이주한 예술가들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또한 많은 잡지들이 오랫동안 금지되어온 서적에 대한 출판권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련 경제가 몰락함에 따라 잡지나 신문사들이 출판을 계속하고 예술가들이 생계를 해결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붕괴로 예술가들은 복잡한 상황 속에 빠지게 되었다. 즉 예술가들은 혁명 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나 엄혹했던 체제하에서도 예술가에게 지급되던 정부의 장려금이 중단되어 판매시장이라는 새로운 압력요인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점차 경제적인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술

① 문학 : 1917년 소련에 편입된 영토에 살고 있던 많은 민족집단들은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예로 쇼타 루스타벨리가 12세기말에 조지아어로 지은 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 Vepkhis-tqaosani〉와 역시 비슷한 시기에 키예프 주변 어느 지역에서 씌어진 〈이고리 원정기 Slovo o polku Igoreve〉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세계 문화영역에 발자취를 남긴 것은 19세기 러시아인들의 문학이며, 소련 문학 자체도 대부분 러시아 문학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19세기초의 대표적 작가들로는 러시아어로 씌어진 문학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리고 동시에 가장 많이 애독되는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 Yevgeny One-gin〉(1823~31)을 저술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과 지금까지도 많은 나라의 언어로 출판되어 세계의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희비극적 대작 〈죽은 혼 Myortvye dushi〉(1842)의 저자 니콜라이 고골리를 들 수 있다.

19세기 중엽은 3명의 위대한 소설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아버지와 아들 두 세대 간에 벌어지는 러시아인들의 심리적·사회적 갈등을 묘사한 소설 〈아버지와 아들 Otsy i deti〉(1862)로 가장 잘 알려진 이반 투르게네프, 〈죄와 벌 Prestupleniye i nakazaniye〉(1866)·〈백치 Idiot〉(1868~69)·〈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 Bratya Karamazovy〉(1879~80) 등의 소설에서 인간의 심리상태를 깊이 파헤친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애독되는 소설 〈전쟁과 평화 Voyna i Vmir〉(1865~69)·〈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5~77)의 저자 레프 톨스토이가 바로 그들이다.

19세기말에는 소설이 주춤하고 희극(안톤 체호프의 연극)과 시(상징주의 시인들인 알렉산드르 블로크·안드레이 벨리·뱌체슬라프 이바노프가 등장)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혁명의 전후기에는 천재성을 지닌 난해한 시인들의 작품활동이 두드러지게 활발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친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인물로 안나 아흐마토바를 꼽을 수 있다. 그녀는 잘 다듬어진 투명한 서정시로 초반부터 큰 명성을 얻었으나, 후반에 정부의 탄압정책으로 심한 고초를 겪은 뒤 〈진혼곡 Rekviem〉(1935~40) 등의 장편을 발표했는데, 이 시들 속에서 작가는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희생자들을 회고하고 있다.

스스로를 미래파라고 규정한 벨리미르 흘레브니코프와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와 같은 시인들은 시어를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혁신적인 시도를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마리나 츠베타예바 역시 위대한 실험 시인이었는데, 그녀의 주요작품 대부분이 이민 시기에 집필된 것이다. 츠베타예바는 1939년 소련으로 귀환했으나 194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시기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문학적으로 힘과 깊이가 있는 서정시를 많이 썼으며, 오시프 만델스탐은 자신의 박식함을 총동원하여 러시아어로 쓴 작품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기억에 남는 서정시를 창작했다.

그러나 파스테르나크와 만델스탐은 둘 다 작품을 출판하는 데에 점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만델스탐은 1933년 이후로 단 한 작품도 출판하지 못했으며 파스테르나크는 1936년 이후 주로 번역출판에 한해서 출판활동을 허가받았다. 파스테르나크는 스탈린의 잔혹한 탄압정책 기간을 무사히 겪어냈지만, 만델스탐은 1938년경 소련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혁명 직후에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한 작가 가운데 상당수가 산문, 특히 단편소설과 중편소설로 전향했다.

일부 작가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 혁명과 러시아 내란에 많이 집중했는데, 이러한 작가들로 〈굶주린 해 Goly god〉(1922)의 저자 보리스 필냐크, 여러 편의 단편소설과 반유토피아적 소설 〈우리들 My〉(1920~21, 소련에서는 글라스노스트 선언 이후에 출판됨)을 쓴 예브게니 자먀틴, 〈기병대 Konarmiya〉(1926)의 저자 이사크 바벨, 4부작의 서사시 〈고요한 돈 강 Tikhy Don〉(1928~40)을 비롯한 여러 작품으로 196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하일 숄로호프 등이 있다.

그밖에 소련이라는 새로운 국가체제하에서의 생활상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신랄한 풍자를 통해 묘사한 작품들이 있는데 미하일 조시첸코의 단편소설, 일리야 일프와 예브게니 페트로프의 희극소설, 유리 올레샤의 단편소설 〈질투 Zavist〉(1927)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혁명 후 10년 동안에는 문학이론과 비평이론에 있어 새로우면서도 중요한 접근법이 등장했다.

모스크바 언어학협회의 회원(로만 야콥슨·오시프 브리크·보리스 토마셰프스키)들과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오포야스(OPOYAZ : 시어연구협회)의 회원(빅토르 슈클로프스키, 보리스 예이헨바움)들이 서로 연합하여 형식주의 문학비평을 개발했는데, 이는 문학작품의 내부구조를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둔 사조였다.

이들의 통찰력은 소련과 서방세계의 문학적 연구방법을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학이론가이자 언어철학자인 미하일 바흐틴은 특히 자신의 관심분야인 소설에서 윤리적 문제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고차원적인 분석방법을 제시했다.

1920~30년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른바 고전적 작품들이 나왔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지금은 재미없고 따분하다고 평가받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표적인 작가에 해당하는 표도르 글라트코프의 〈시멘트 Tsement〉(1925), 발렌틴 카타예프의 〈시간이여, 앞으로! Vremya, vperyood!〉(1932),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Kak zakalyalas stal〉(1932~34) 등은 그런대로 읽어볼 만한 작품들이다.

한편 그 당시에 창작된 대작 가운데 많은 작품들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출판되지 못했는데, 러시아의 암울한 농촌과 도시근교의 생활상을 그린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작품과 미하일 불가코프의 기묘한 희극적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 Master i Margarita〉 등이 그 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에 소련의 문단에는 관심을 끌 만한 작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며 흥미로운 작품도 발표되지 않았다. 만델스탐, 필니야크, 바벨은 숙청되었고 마야코프스키와 츠베타예바는 자살했으며, 자먀틴은 탄압을 받다 추방된 후 1937년 사망했다. 불가코프는 1940년 소련에서 사망했으며, 파스테르나크, 아흐마토바, 플라토노프 등은 소련에서 자신들의 창작품을 출판할 수 없었다.

1941년 6월 독일이 침공한 후에 문화 전반에 걸친 검열제도는 많이 완화되었으며, 아흐마토바와 조시첸코를 비롯하여 오랫동안 도외시되어온 많은 작가들이 새로운 작품 중 일부를 출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플라토노프와 같이 종군기자로 다시 문학활동을 할 수 있게 된 작가들도 있었다. 소련의 승리로 전쟁이 종식된 후에, 전반적으로 국가의 탄압정책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오히려 강력한 단속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스탈린의 절친한 동료이자 작가인 안드레이 주다노프가 쓴 여러 편의 기사에도 잘 반영되어 있는데, 그는 특히 조시첸코를 '야비한 불량배'라 부르고 아흐마토바를 '덜떨어진 수녀나 매춘부'와 같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기까지 했다.

문학 분야의 진보는 1953년 스탈린이 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기에 몇몇 신진작가들과 새로운 문학사조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기성작가들이 출판활동을 재개했다. 스탈린이 죽고 난 처음 몇년 간에 출판된 가장 재미있는 소설로는 일리야 에렌부르크의 〈해빙 Ottepel〉(1954)와 블라디미르 두딘체프의 〈빵만으로 살 수 없다 Not by Bread Alone〉(1956)를 꼽을 수 있다.

파스테르나크는 소설 〈의사 지바고〉를 1957년 이탈리아에서 출판하고 이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나 소련에서는 1980년대말까지도 그의 작품이 출판되지 않았다. 한편 요시프 브로드스키, 예브게니 예프투셴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와 같은 정력적인 젊은 시인들이 등장했으며, 강제수용소에서 돌아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자전적인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Odin den iz zhizni Ivana Denisovicha〉(1962)를 발표하여 소련과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계속해서 〈암병동 Rakovy kor-pus〉(1968)·〈제1의 원 V kruge pervom〉(1968)을 발표했지만, 두 작품 모두 당시 소련에서는 출판되지 않았다. 바실리 악쇼노프와 블라디미르 보이노비치를 비롯한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신세계'를 뜻하는 〈노비 미르 Novy Mir〉지를 통해 자신들의 창작물을 발표했다. 이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알렉산드르 트바르도프스키는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출판하기도 했다.

1960년대말에 이르러서는 브로드스키, 악쇼노프, 보이노비치, 솔제니친이 소련에서 강제추방되었으며, 훌륭한 작품들은 다시 '책상서랍' 속에 쌓이게 되거나 서방세계에서 출판되었다.

사실상 1960년대말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소련에서 출판이 허용되었던 좋은 작품이란 소위 '전원적 산문작가'라 불리던 작가들이 쓴 작품으로 이들은 대개 현대생활과 농촌의 전통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을 사실적인 문체로 묘사했다. 그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작가로는 발렌틴 라스푸틴과 단편소설로 유명하고 영화감독으로도 명성을 얻었던 바실리 슉신을 꼽을 수 있다.

문학적 성격은 다소 틀리지만 도덕적으로 복잡한 구성을 갖춘 소설로 유명한 유리 트리포노프도 이 시기의 작가이다. 그러나 1930~40년대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주요작품들은 대부분 국외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유명한 작가들로는 바르람 샬라모프, 안드레이 시냐프스키, 베네딕트 예로페예프, 예브게니 포포프 등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에 최초로 다시 등장한 문학 장르는 시였다. 물론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명확해지겠지만 이 시기에 시인들이 가장 훌륭한 작품의 대부분을 창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 드미트리 프리고프가 주도하는 개념주의자들의 작품과 후에 은유시라 불리게 된, 알렉세이 파르시치코프를 비롯한 시인들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② 시각예술 :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각예술 분야에서도 혁명전 수년에 걸쳐 독창적인 사조들이 많이 등장했다.

러시아의 화가들은 유럽 화가들과 빈번한 교류를 가졌으며, 유럽의 시각예술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의 수년 동안 미술계에는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크 샤갈, 나탈리야 곤차로바, 미하일 라리오노프, 카지미르 말레비치, 블라디미르 타틀린과 같은 훌륭한 화가들이 대거 등단하고 있었다.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는 소련에서 전혀 활동하지 않았지만, 그외의 예술가들은 소련이 설립된 후 처음 몇 년 동안 소련의 미술계에서 커다란 활약을 했다. 말레비치와 샤갈은 모두 비테프스크(벨라루스)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후에는 직접 운영을 맡기도 했다. 탈린과 칸딘스키도 소련의 미술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1920년대초 샤갈과 칸딘스키는 소련의 미술계에 불어닥친 변화의 조류에 동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외국으로 이주했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시각예술 분야에서도 1920년대에는 실험주의 운동이 계속되었다. 가장 주요한 화파로 구성주의파를 들 수 있는데, 엘 리시츠키(처음에는 비테브스크에서 샤갈, 말레비치와 함께 일했음)와 알렉산드르 로트첸코(칸딘스키와 탈린의 제자)가 주도한 이 화파는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와 뚜렷한 사실적 도안을 선호했다.

많은 구성주의자들은 새로 건설된 국가인 소련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공간적·형태적 측면에서 생생하게 표현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들은 또한 가구·도자기·의류 디자인을 비롯해 건축에도 관계했는데, 이러한 분야에서의 작품들은 대량으로 생산하지 않았으며, 그결과 지금은 작가들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벨 필로노프와 마리야 옌데르를 비롯한 비(非)구성주의 화가들도 역시 이 시기에 주요작품들을 많이 창작했다.

그러나 1920년대말 문단의 실험작가들에게 가해졌던 압박이 미술계에도 몰아닥쳤다. 정통 리얼리즘으로 복귀하라는 정부의 정책이 공표되었고 1920년대 초기의 위대한 화가들은 점차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내 이들의 작품은 박물관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잊혀졌다.

이 시대 러시아 화가들의 위대한 작품들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비로소 다시 대중 앞에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실험적 시도들은 사라지고 대신 소련인들의 일상생활을 희망적으로 묘사하는 그림들이 주류를 이루며 다량으로 쏟아졌다.

스탈린 암흑시대로부터 벗어나는데 있어서 미술계는 문학계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 1960~70년대에 이르러서야 주로 지하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미술인들의 무리가 등장했다. 이 시기의 주요 화가들로는 에른스트 네이즈베스트니, 일리야 카바코프, 미하일 셰먀킨, 에리크 불라토프, 뱌체슬라프 칼리닌, 예브게니 두프스키 등이 있다.

이들은 원시주의, 하이퍼 리얼리즘, 그로테스크, 추상주의와 같은 다양한 표현방법을 구사했으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화풍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국외로 이주했고, 그중 많은 이들이 세계의 화단에서 인정받는 유명화가가 되었다.

③ 음악 : 혁명 후 처음 10년 동안 소련의 음악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2명의 작곡가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는 정부의 음악관계자들과 심각하게 대립했지만 둘 다 스탈린의 잔혹한 탄압시기에도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실내악·오페라·발레곡 등 훌륭한 작품을 많이 발표했지만,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는 무엇보다도 15편의 교향곡이 유명하다. 프로코피예프의 작품 가운데서는 발레곡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Alexandr Nevsky〉(1938)를 위해 작곡한 음악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역시 실내악·교향악곡·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그밖의 주요 작곡가들로 로디온 시체드린과 아르메니아의 아람 카차투리안이 있는데, 둘 다 발레 음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동시대의 작곡가 중에는 알프레트 시니트케의 난해한 작품이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자주 연주된다.

고전주의 음악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모스크바 음악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학교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주자를 많이 배출했다.

그중 가장 명성을 얻은 음악인들로는 바이올린 연주자 다비트 오이스트라흐와 기돈 크레메르, 첼로 연주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피아니스트인 스뱌토슬라프 리치테르, 에밀 길렐스, 벨라 다비도비치, 가수 엘레나 오브라스초바와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 등이 있다. 대중음악 분야에서도 유명 음악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면서 작곡가를 겸했던 발라드 가수들이 큰 업적을 이룩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배우이자 음악인이었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노래는 1960~70년대에 수많은 해적판 카세트를 통해 소련 전역을 휩쓸었는데, 그는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에서 가장 사랑받는 연예인의 자리를 지켰다. 시인으로도 알려졌던 조지아 출신의 불라트 오쿠자바 역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대중가수 알라 푸가체바는 1970년대에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록 밴드인 아콰리움(악바리움)과 키노는 1980년대에 큰 인기를 누렸다.

④ 무용 : 발레는 소련 시대에 가장 성공을 거둔 예술 분야로 꼽히는데 이는 어떤 혁신적인 방안을 새롭게 도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스크바의 볼쇼이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키로프 같은 훌륭한 발레단이 이미 혁명전 러시아 시대에 완성의 경지에 다른 고전무용의 찬란한 전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무용학교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무용가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그 가운데 마야 플리세츠카야, 루돌프 누레예프, 미하일 바리슈니코프 등은 탁월한 무용가들로 꼽힌다.

⑤ 연극 : 소련 연극계의 상황은 다른 분야의 예술과 거의 유사하여 혁명 후 10년간 성공적으로 시도되었던 독창적인 실험연극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에는 급격한 쇠퇴현상을 보여왔다.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 프세볼로트 메이에르홀트, 알렉산드르 타이로프 등 뛰어난 3명의 연출가가 혁명 직후 소련 연극계를 주도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 단첸코와 함께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단을 창설했는데, 그는 배우들에게 역사적 정확성, 선명한 리얼리즘, 강한 심리적 요소를 복합시킨 연기를 강조함으로써 공연하는 작품마다 계속 성공을 거두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각본과 그 연출방법은 전세계 연극계에 영향을 끼쳤다. 메이에르홀트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수제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는 리얼리즘에 관하여 스승과 주장을 달리 했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했고 자신의 재능과 정력을 새로운 국가에 부합되는 새로운 연극을 만드는 데 모두 쏟아부었다. 1920~30년대에 그는 당대의 작품과 고전작품을 모두 수용하여 독창적이며 뛰어난 연극을 연이어 공연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그의 인습타파적인 연극형태는 대중의 인기를 잃게 되었고, 그는 1940년에 체포되어 얼마 후 처형당했다.

타이로프는 모스크바 카메르니 극단의 청설자이자 연출가로 배우인 아내 알리사 코넨과 함께 1920년대에 많은 주요작품을 연출했다.

스탈린의 암흑시대가 끝난 후에도 소련의 연극계는 초기의 전성시대를 회복하지 못했는데, 대부분의 극단들은 러시아와 세계적인 고전작품을 위주로 하여 구성면에서는 완전하지만 단조로운 공연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류 가운데 타간카 극단은 유일하게 예외적이었는데 이들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엽까지 주로 유리 류비모프의 예술적 영감에 의해 연출된 작품들을 공연했다.

류비모프의 작품은 종종 소련의 검열제도와 마찰을 일으켰지만,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각색하여 크게 인기를 얻은 작품을 비롯해 혁신적이며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공연했다. 큰 성공을 거둔 다른 형태의 연극으로 인형극이 있는데, 세르게이 오브라스초프가 창립한 모스크바의 국립중앙인형극단과 레조 가브리아제가 창설한 조지아의 트빌리시 국립 마리오네트 극단은 모든 연령층의 관객들이 즐길 만한 재미있는 공연을 했다.

또한 전세계를 돌며 대대적인 갈채를 받았던 모스크바 국립 서커스단의 다채롭고 훌륭한 묘기공연 역시 큰 인기를 누렸다.

⑥ 영화 : 소련의 영화계 역시 혁명 직후의 문화시기 동안에는 독창적인 작품들을 많이 창작해냈다. 가장 유명한 감독으로는 메예르홀드의 제자로 〈전함 포툠킨 Battleship Potemkin〉(1925)과 〈알렉산드르 네프스키〉(1938) 등의 대작을 만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을 들 수 있다.

그밖에 1920년대의 주요감독으로는 지가 베르토프, 우크라이나의 알렉산드르 도브젠코와 프셰볼로트 푸도프킨 등이 있다.

영화 역시 그 구성에 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속박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제작된 〈날아가는 두루미 The Cranes are Flying〉(1957, 미하일 칼라토조프 감독)와 〈어느 병사의 발라드 Ballad of a Soldier〉(1959, 그리고리 추흐라이 감독)를 비롯한 몇 편의 작품들은 예술적인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0~60년대에는 고전적인 작품들을 각색한 영화들이 많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특히 그리고리 코진체프 감독이 제작한 〈햄릿 Hamlet〉(1964)·〈리어왕 King Lear〉(1971)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60~70년대에는 훌륭한 감독들이 많이 등장했으며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뛰어난 감독으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비롯하여 조지아 출신의 아르메니아인 세르게이 파라드자노프, 니키타 미할코프 등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통제가 완화되자 그동안 탄압을 받았던 많은 영화들이 발표되었다. 라스푸틴과 니콜라이 2세의 왕정을 다룬 옐렘 클리모프 감독의 〈시련 Agony〉(1975)과 조지아 출신의 텡기즈 아불라제 감독이 스탈린 시대의 정치상을 풍자한 〈회한 Repentance〉(1984) 등이 그러한 작품에 속한다.

문화·교육기관

① 언론 : 소련은 19세기에 엄격한 체제의 전통을 확립한 신문잡지계를 물려받았고, 혁명 직후의 기간에는 일간신문을 포함해 정치와 예술을 주제로 하는 모든 종류의 월간잡지가 계속 발행되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정보와 선동의 근원이 되는 언론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재빨리 드러냈고, 결국 1920년대초에 대부분의 독자적인 신문들을 페간시켰다. 소련 전역에 걸쳐 유일하게 발행되었던 일간지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인 〈프라우다 Pravda〉와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가 발행하는 국영신문 〈이즈베스티야 Izvestiya〉 등 2개 신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노련한 독자들은 이 신문들이 보도하는 기사가 모두 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밖에 콤소몰의 기관지, 군(軍) 기관지 등이 발행되었지만, 모두 같은 검열제도의 관리하에 놓여 있었고, 주요기사를 모두 같은 소식통으로부터 입수해 천편일률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말까지도 조금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잡지의 경우는 신문에 비해 상황이 나은 편이었는데, 특히 문학작품을 출판하는 잡지들이 더욱 그러했다. 〈크라스나야 노프 Krasnaya Nov〉와 〈레프 LEF〉를 비롯한 많은 잡지들을 통해 1920년대에 주요 문학작품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노비 미르 Novy mir〉가 이러한 전통을 부활시켰으며, 1980년대에 다시 발행된 〈오고뇨크 Ogonyok〉와 통합되었다.

텔레비전은 소련에서 처음 방송을 시작할 때부터 당에 장악되어 주로 당의 선전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방송 프로그램 대부분이 당과 관련된 직접적 혹은 간접적 선전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간간이 수준높은 예술물(영화화한 콘서트나 연극 등)과 이류 공포영화를 방송하기도 했다.

글라스노스트 기간에 텔레비전은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앞장서서 제작하여 소련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상황을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② 박물관 :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박물관들이 있다. 모스크바의 푸슈킨 미술박물관에는 서유럽 미술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는 러시아 미술의 걸작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슈 박물관은 세계 제일의 미술박물관으로 꼽히며, 역시 같은 곳에 있는 러시아 박물관은 러시아 미술의 뛰어난 전형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밖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외곽도시들인 파블로프스크·푸슈킨·페트로드보레츠에 있는 차르 시대의 궁전들이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③ 대학교 : 대부분의 대학이 스탈린의 숙청기간 동안 극심한 고난을 겪었지만 많은 대학들이 특히 과학분야에서 최상의 교육을 실시했다.

가장 주요한 대학교로는 모스크바M. V. 로모노소프국립대학교,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 노보시비르스크국립대학교 등이 꼽힌다. 1960년대에 유리 로트만이 이끄는 에스토니아타르투대학교의 연구진과 보리스 우펜스키와 뱌체슬라프 이바노프가 이끄는 모스크바국립대학교의 연구진으로 이루어진 기호학파는 러시아와 소련의 문화 및 문학에 관한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스포츠와 오락

스포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의 선수들이 올림픽 대회를 비롯한 세계 스포츠계에서 이룩한 업적은 국가적 자부심을 이끌어내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운동선수들은 원칙적으로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지만 국가 스포츠 위원회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단체종목 중에서는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한 아이스하키와 배구, 그리고 후에는 농구 등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한편 소련의 남녀 체조선수 및 육상·역도·레슬링·권투 선수들은 계속해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석권했다.

훌륭한 체육 시설과 설비가 부족하여 대다수 일반 시민들은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수 없어 국민의 전반적 체육 수준은 매우 저조한 편이다. 그러나 조깅·축구·낚시 등의 스포츠 활동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한 많은 소련인들이 체스를 매우 즐겼는데 20세기 최고의 체스 선수들은 대부분 소련 출신이었다.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수교 초기

1860년의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이 연해주 일대를 획득, 국경을 접하면서부터 조선과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주요 관심은 표트르 대제 이후의 남하정책에 따라 부동항 확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조선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1876) 체결을 시발로 열강들과 잇달아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청의 지위가 강화되고 영국과 미국의 압력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견제세력의 하나로서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1884년 7월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한·러 수호조약이 체결되고 갑신정변으로 수구파와 청의 압박이 가중되는 가운데 한·러 밀약이 인준됐다. 한·러 밀약은 오래도록 소망해온 영흥만 조차를 가능하게 했으나 밀약의 전말을 탐지해낸 영국은 1884년 4월 거문도를 점령, 이를 제재하고 나섰다. 거문도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동아시아 군사정책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후 시베리아 철도부설계획이라는 육군 중심의 방위전략을 채택하게 됐다.

3국간섭과 아관파천

3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가 세력을 만회하고 조선정부의 노골적인 인아거일정책이 을미사변을 초래한 뒤, 국제여론은 오히려 일본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고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다. 러시아 공사는 고종을 상대로 끊임없는 이권획득활동을 전개했다. 1896년 4월 경원·종성 일대의 광산채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같은 해 8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상인 Y. 브린네르의 명의로 압록강·두만강 유역과 울릉도의 산림벌채권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관파천이라는 절대절명의 호기를 맞은 러시아가 조선 정부의 불신을 사게 된 주요 원인은 외무장관 S. Y. 비테의 관심이 새로운 만주횡단철도에 집중돼 있었고, 국제적인 압력과 함께 내부의 금융·산업 위기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3월의 포경합동조약안이나 1899년 9월 1일과 1900년 3월 30일의 마산포 조차 기도는 정책담당자의 최종결정에 따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의화단의 봉기가 만주지역까지 파급됐을 때 러시아의 자제정책은 의미를 잃게 됐다. 러시아는 연합국의 대열에서 베이징의 교섭에 임하는 한편 중국의 지방관리와 단독 접촉해 만주의 보호령화를 추진했고, 이에 대한 선제조치로서 한반도의 중립화안을 제의했다. 중립화안에 촉각을 곤두세운 영국 정부는 일본의 동맹제의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여왔던 그간의 자세에서 탈피해 1902년 1월 이른바 영·일 동맹을 결성했다.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

이에 따라 러시아군의 만주철병이 이뤄지고 외무장관 비테는 실각했으며 대신 베조브라조프가 아시아 전략을 수행하게 됐다. 그러나 압록강 산림이권의 이용 통고와 용암포 점령으로 이어지는 베조브라조프의 ‘진정책’은 일본과의 전쟁을 촉발시켰다. 러일전쟁은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했고 일본의 조선 보호를 인정한 포츠머스 조약은 장차 일본의 조선병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해방과 소련의 북한 진주

1905년 이후 광복이 이뤄질 때까지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상태에 놓이게 됐다. 1945년 8월 민족의 해방은 찾아왔으나 북위 38˚선 이북은 소련이, 그 이남은 미국이 점령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38˚선은 미국이 구상하고 제안한 것이었으나 잠정적으로 제안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게 된 데에는 소련의 책임 또한 적지 않았다. 포츠머스 조약은 을 세력권 내에 편입시키려는 소련의 야심은 결국 북한에 소비에트 정치체제를 이식시켰고, 소비에트 연방은 위성국가의 수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8월에야 대일선전포고를 발령했다. 함경북도 웅기로부터 평안도를 거쳐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은 자생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받아들이고 이를 소련에게 유리하도록 개편한 후 배후조종을 꾀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민족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국이 5년 동안 신탁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의 의정서가 발표됐다.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에서도 의정서의 원칙들을 강력하게 고수했고, 이러한 비합법적인 자세가 회담 결렬의 주된 이유가 됐다.

6·25 전쟁과 냉전시대

점차 격화돼가는 미·소 간의 냉전구조는 남북의 분단을 기정사실화했다.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공산정부가 탄생하고, 소련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라는 점령초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정권수립 이후 소련 정부가 제공한 막대한 군사·경제 원조들은 고스란히 남침준비를 위해 충당됐다. 요시프 스탈린의 남침계획 승인은 미국의 전쟁 불개입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나 트루먼 행정부는 국제연합의 이름 아래 연합국의 참전을 결정하는 강경한 대응조치를 강구했다.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적극 권유했고,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휴전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1951년 6월 소련측에 의해 휴전이 제안되고 1953년 7월 마침내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1958년까지 계속된 북한주둔은 소련과 북한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그 후 북한은 친중국·친소련 노선을 거듭하면서 일련의 줄타기 외교를 벌였다. 소련과의 갈등은 요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2월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1인독재체제를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시작됐다.

1960~61년 중·소분쟁의 격화시기에 북한은 중국을 선택했으나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새로운 지도층이 등장하자 군사원조협정이 체결되고 중단됐던 군사원조가 재개됐다. 소련은 1968년 1월 북한이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4월 해군 정찰기 ET-121기를 격추시켰을 때 비합리적이고 무책임한 북한의 행동을 비난했으며, 이에 대해 북한은 1969년 세계공산당대회에 불참하고 1970년 3월의 조·소 공동해양연구를 보이콧했다. 1970년대의 긴장완화와 국제정세의 다원화 속에서 북한은 새로운 대외관계좌표를 설정했다.

북한의 자주노선 표방

즉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익을 추구하려는 자주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은 북한의 자주노선과 그 이념적 배경을 이루는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종 정도로 취급했고 1976년말 이후 대북한 지원을 대폭 격감시켰다. 군사지원과 무역량의 축소가 곧 기본적인 유대관계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82년 이후로도 과학기술협조협정·철도협정·국경협정·영사협정·경제기술협정·원자력발전소건설협정 등이 체결됐다.

소련의 38˚선 이북 점령과 북한정권의 수립으로 말미암아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적대적인 성격을 지닌 채 출발했다.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소련의 팽창주의를 동맹조약으로 견제하려는 미국의 반공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상호불신관계는 제2공화국에서도 지속됐고, 1961년에 시작된 군정에서도 반소·친미 정책은 강화됐다. 소련 관영통신은 군사정부를 비난했고, 군사정부 역시 소련과의 접촉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제3공화국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소련은 한·일 기본관계조약을 미국이 주도하는 동북아시아의 나토(NATO)라고 규탄했으며,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비난했다.

양국 외교관계 개선 노력

적대감 속의 한·소 관계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닉슨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미국의 세계정책이 바뀌고 동서진영의 데탕트가 시작됨에 따라 한국도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 1971년 8월 당시 김용식 외무장관은 소련이 한국에 대해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외교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며,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특별외교선언문을 발표, 공산권에 대한 문호개방의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고 그들 역시 호혜적인 조치를 강구해주도록 요청했다.

소련은 1973년부터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들의 입국을 허용했으며, 비공식이지만 양국의 무역계약이 이뤄졌고 다양한 형태의 문화교류가 전개됐다. ‘2개의 조선’을 고정화시키려는 책동이라는 중국과 북한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이에는 은밀한 접촉이 계속됐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국의 외교관계는 개선과 악화가 교차되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1983년 9월 1일의 ‘대한항공(KAL)기 격추사건’은 소련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감을 환기시켰고, 이듬해 5월 조·소 정상회담과 군사유대강화는 소련이 북한의 군사모험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한·소 관계는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소련 외무부 영사단 일행이 입국, 외교문서의 하나인 구상서를 교환한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계기를 맞이했다. 예술단이 서울에 왔으며 올림픽 대회에는 788명의 선수단이 파견됐다.

한소 외교관계 복원

1989년 4월 3일 소련 연방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가 개설됐고 7월에는 무역진흥공사 모스크바 사무소가 설치됐다. 12월 8일 양국은 서울과 모스크바에 영사처를 개설하기로 합의를 이뤄 1904년 러일전쟁 패권으로 러시아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 86년만에 공식외교관계를 복원시켰다. 1990년 6월 4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워싱턴의 미·소 정상회담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담화를 가졌고 수교원칙에 합의했다. 이어 9월 30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과 최호중 외무장관이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접촉했고 이날 대사급 외교관계의 수립에 동의했다.

한국은 10월 30일 소련 주재 대사관을 개설하고 공노명 초대 소련 주재 영사처장을 초대 대사로 발령했다. 12월 7일 초대 한국 주재 소련 대사 올레그 소콜로프가 부임했다. 양국은 11월 23일 이중과세방지협정, 12월 8일 투자방지협정에 가조인했으며 한·소 관계는 12월 14일부터 17일까지 노태우 전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데 이어 1991년 4월 고르바초프 대통령 내외가 1박 2일동안 제주도에 체류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소련 해체와 러시아연방 수립

비교적 순탄하던 한·소 관계는 1991년 8월의 보수파 쿠데타를 계기로 소련 연방의 급속한 해체가 진행됨으로써 재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정부는 러시아연방·우크라이나 등 11개 구성 공화국을 12월 30일 각각 독립된 주권 국가로 승인하고 각 공화국들과의 개별적인 긴밀외교를 하기로 결정했다. 12월 4일 유럽공동체(EC)가 러시아를 승인했으며 미국도 26일 러시아를 소련의 공식적인 계승자로 인정하고 나섰다. 서울의 소련 대사관은 주한 러시아 대사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정부는 그 밖에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등 주요공화국에도 별개의 대사관을 설치해 기타 공화국들의 외교업무를 대행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소련의 해체로 대소 경제협력 30억 달러의 계속집행 여부가 관심을 모았는데, 앞으로의 차관 제공은 각 공화국과의 직접 교섭에 의해 이행보증서를 받은 연후에 집행하기로 결정됐다. 1992년 11월 18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공식방한이 이뤄져 한·러 기본관계조약에 서명하고 한국전쟁과 KAL기 격추사건에 대해 사과를 표명했다.

한·러 군사의정서 체결

특히 한·러 군사의정서는 양국 간 군사분야협력을 최초로 명문화한 것으로, 러시아가 북한과 유지하고 있는 실제적인 군사협력수준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94년 6월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공조방안 및 양국간 교류 확대 방안에 협의했다. 러시아는 1995년 9월 북한에, 1996년 9월로 효력이 끝나는 상호원조조약(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연방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제1조에 규정된 전쟁시 자동개입조항의 수정을 요구했다.

이로써 러시아와 북한의 기존 군사동맹관계는 완전히 폐지됐다. 2001년 러-북 정상회담, 한-러 정상회담이 개최된 후 2002년 러-북 철도장관회담이 진행되면서 철도 연결에 관한 문제가 대두됐다. 2003년 한-북-러 3자 철도장관회담이 개최되고 한국은 철도연결에 관해 협의하기로 결정했다. 이 협의는 2008년까지 계속해서 논의됐으나 북한에 김정은 정권이 출범하면서 핵실험 등의 문제로 논의가 중단됐다.

2013년 푸틴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하면서 철도사업이 다시 주목되기 시작했지만 계속되는 북한의 핵실험에 따라 2016년 한국은 철도 프로젝트에서 빠지게 됐다. 철도 사업에서는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한국과 러시아는 에너지 산업 부문, 과학기술 등에서 협력하며 양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1992년 1억 9,000만 달러로 시작한 양국 간의 교역량은 2012년 224억 달러의 규모로 20년 만에 약 100배의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승용차, 자동차부품, 합성수지, 플라스틱제품 등이다. 2023년 기준 한국의 대러시아 수출액은 39억 6,876만 달러이고, 대러시아 수입액은 61억 4,248만 달러이다.

2008년 한국과 러시아의 FTA 협상이 잠정 중단된 후 다시 추진하기 위해 많은 회담을 거쳤고 아직 FTA가 체결되진 않았지만 밝은 전망을 앞두고 있다. 이 밖에도 대한민국 정부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정부간의 과학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1991), 대한민국과 러시아연방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1993),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간의 영해바깥 해상에서의 사고방지에 관한 협정(1994),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간의 소득에 대한 조세의 이중과세회피를 위한 협약(1995)이 체결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간의 영해바깥 해상에서의 사고방지에 관한 협정의 개정을 위한 각서교환(1996), 서울소재 구러시아 공사관 부지문제 해결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간 협정(1997),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간의 관광 분야에서의 협력에 관한 협정(2001), 1992년 3월 18일 체결된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공화국 정부간의 사증발급에 관한 양해각서의 개정에 관한 의정서(2002)가 체결되었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정부간의 위험한 군사행동방지 협정(2003),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정부간의 외교관여권 소지자에 대한 사증요건의 면제에 관한 협정(2004),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정부간의 중거리 지대공 유도무기체계 사업의 상호 협력에 관한 협정(2005),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정부간의 가스산업에서의 협력에 관한 협정(2006),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정부간의 외기권의 탐색 및 평화적 목적의 이용 분야에서의 협력과 관련된 기술보호에 관한 협정(2007), 단기 방문사증 발급 간소화에 관한 협정(2010) 등이 체결돼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한국에서는 각종 문화예술이 발달된 러시아에 유학을 가거나 여행을 가는 등 러시아의 문화를 접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도 관광 목적으로 한국에 오는 경우가 늘면서 양국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023년 기준 러시아에는 124,811명의 재외동포가 있다. 2023년 기준 한국에는 일반체류자, 유학생 등을 포함한 15,251명의 러시아 국적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문헌

・ 코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