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

다른 표기 언어 Saint Petersburg ,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요약 테이블
위치 러시아 북서부
인구 5,561,294명 (2023년 추계)
면적 1,439㎢
언어 러시아어
대륙 유럽
국가 러시아

요약 러시아 연방 제 2의 도시. 러시아 연방의 북서부 끝에 있으며,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약 640㎞, 그리고 북극권에서 남쪽으로 불과 7° 정도 떨어져 있다. 지난 2세기 동안 제정 러시아의 수도로서 러시아 역사의 중심무대를 이루었으며, 지금도 공업, 문화 도시 및 항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목차

펼치기
  1. 자연환경
    1. 기후
    2. 위치
    3. 시가지
    4. 교외지역
  2. 경제
  3. 교통
  4. 사회와 행정
  5. 교육과 문화
  6. 역사
    1. 초기
    2. 근대도시로의 성장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러시아 연방의 북서부 끝에 있으며,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약 640㎞, 그리고 북극권에서 남쪽으로 불과 7° 정도 떨어져 있다. 이 도시는 지난 2세기 동안 제정 러시아의 수도로서 러시아 역사의 중심무대를 이루었으며, 지금도 공업, 문화 도시 및 항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네바 강의 하구에 세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비롯된 도시로 처음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했다가 1914년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되었고, 1924년 레닌이 죽자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명명되었다. 그후 1991년 11월 7일 사회주의 개혁의 와중에서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본래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다.

이 도시는 1917년 2월혁명과 10월혁명의 현장으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독일군의 극심한 포위공격을 끝까지 버텨낸 곳으로 유명하며, 건축적인 면에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조화로운 도시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자연환경

기후

위도상으로는 상당히 북쪽에 있지만, 대서양의 영향으로 남쪽에 있는 모스크바보다 오히려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그러나 겨울의 추위는 매서워 1월평균기온이 -8℃이며 때로는 -40℃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눈이 덮여 있는 날이 연평균 132일이나 되고 이 도시에서 흐르는 네바 강은 보통 11월에 얼어붙기 시작해서 이듬해 4월이 되어서야 풀린다. 여름철 기온은 7월평균이 18℃로 생활하기에 적당하다. 북극권에 가까운 까닭에 겨울철에는 밤이 길지만 여름 초기에는 백야가 계속된다. 연평균강수량은 약 584㎜로서 여름철에 비가 가장 많이 내린다.

위치

이 도시는 핀란드 만의 꼭대기, 네바 강의 삼각주에 있다.

본래 습지였던 저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으로 홍수의 피해가 큰데 특히 강한 바람이 강물을 역류시키는 가을철과 해빙하는 봄철에 홍수가 많이 발생한다. 1777, 1824, 1924년에는 매우 큰 범람으로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이에 홍수의 피해를 막고 배수를 돕기 위해 많은 운하를 만들었으며, 1980년대에는 핀란드 만을 가로지르는 총길이 28.8㎞의 둑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공 운하들과 천연수로들로 이 도시는 수로와 다리들로 가득해졌고 이에 '북방의 베네치아'라는 별칭을 얻었다.

시가지

이 도시는 네바 강의 지류들을 기준으로 해군부 구역, 바실리예프스키 섬, 페트로그라드 구역, 비보르크 구역 등 크게 4개 구역으로 나뉜다.

해군부 구역은 시의 중심부로 네바 강 본류의 남쪽 좌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네바 강의 2대 지류인 볼샤야[大]네바 강과 말라야[小]네바 강 사이에 시의 기원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가 있는 바실리예프스키 섬이 있다. 페트로그라드 구역은 말라야네바 강과 볼샤야네프카 강이 에워싸고 있는 여러 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구역이며, 비보르크 구역은 볼샤야네프카 강 동안과 네바 강 북쪽 우안에 있다.

해군부 구역은 역사적·문화적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구 해군부 건물이 이 구역의 중심부이며 현재는 해군대학으로 이용되고 있다. 구 해군부 건물의 맞은편 동쪽에는 시에서 가장 오래된 겨울궁전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의 중앙에는 알렉산드르 기념주가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거대한 비는 무게가 무려 600t이고 높이가 50m에 달한다. 광장과 네바 강 사이에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겨울궁전이 있다. 지금은 에르미타슈 박물관이 된 이 궁전은 차르 황실의 주요거처였다.

그리고 겨울궁전의 맞은편, 해군부 구역의 서쪽에는 데카브리스트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의 중앙에 '청동의 기사'로 알려진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과거 원로원 의사당으로 쓰였던 건물과 상트이사크 대성당이 있다. 도로는 구 해군부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 있는데, 그중 겨울궁전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은 네프스키 대로가 가장 중요하다.

이 도로는 초기부터 중심가 역할을 했으며, 도로변에는 스트로가노프·아니치코프·슈발로프 궁전, 카잔 대성당, 푸슈킨 극장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건물들이 많다.

해군부 구역 겨울궁전으로부터 북쪽 네바 강의 강변에는 250개의 조각품을 지닌 여름정원과 여름궁전이 있다. 여름궁전은 1710~14년 표트르 대제가 이 도시에 최초로 건축했던 궁전으로 초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여름궁전에서 북동쪽으로 네바 강이 크게 곡류하는 곳에 유명한 스몰니 학원이 있다. 이 학원은 본래 수녀원으로 러시아 귀족들의 딸들을 가르치는 학교였으며, 1917년 10월 혁명중에는 볼셰비키의 본부로 사용되었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은 방어에 유리한 지리로 인해 이 도시에서 최초로 개발된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도심 중앙부의 북서부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 섬에는 푸슈킨 광장, 멘시코프 궁, 중앙해군박물관, 과학 아카데미, 예술 아카데미 등 중요한 시설과 유적들이 많으며, 지금은 문학 박물관과 푸슈킨 하우스로 알려진 러시아 문학연구소를 수용하고 있는 구세관 건물과 국립대학교가 유명하다. 또한 네바 강 유역에는 10월혁명 때 겨울궁전으로의 진격 신호 포성을 울린 순향함 오로라 호가 영구히 정박하여 혁명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페트로그라드 구역에는 시의 기원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가 있다.

이 요새는 처음에는 토벽이었으나 곧 높이 12m에 벽의 두께가 3.6m인 석벽으로 개축되었다. 19세기에 주로 정치범을 가두는 감옥으로 이용되었던 이 요새에는 오늘날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지금도 요새의 능보에는 300문의 포가 설치되어 있어 정오마다 포를 쏜다. 요새의 성마루 너머로는 1712~33년에 세워진 상트표트르와 상트파벨 대성당의 첨탑이 화살처럼 솟아올라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 성당에 표트르 대제 이후의 역대 황제와 황후들이 묻혀 있다.

비보르크 구역은 가장 늦게 개발된 곳으로 공업지역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공업지역으로 개발된 만큼 1917년 볼셰비키의 혁명을 지지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 구역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네바 강을 사이에 두고 해군부와 마주보는 핀란드 역이다. 핀란드 철도의 러시아 방면 종착역인 핀란드 역을 통해 레닌이 1917년 4월 13일 스위스로부터 귀환했다. 레닌이 이곳에서 러시아의 역사를 바꾼 볼세비키 혁명에 관한 최초의 연설을 했던 일을 기념하여 레닌 동상이 역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교외지역

상트페테르부르크 대도시권은 이 도시를 중심으로 푸슈킨·파블로프스키·가트치나 시 등의 위성도시를 포함하고 있다.

핀란드 만을 따라 면적 1,355㎢의 말편자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이 대도시권은 핀란드 만의 북쪽 해안선을 따라서 서쪽 방향으로 휘어지면서 거의 80㎞ 떨어진 젤레로고르스크까지, 그리고 남쪽 해안선을 따라서도 서쪽 방향으로 휘어져 페트로드보레츠와 로모노소프까지 이르고, 내륙의 동쪽으로는 네바 강을 따라 이반노프스코예까지 이어진다. 시 외곽의 새로 개발된 교외지역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대체로 인구밀도가 낮고 주변에 녹지가 많다. 특히 핀란드 만의 북쪽은 전원적 교외주택지로 일부 상류층의 별장 다차와 요양소, 어린이 캠프, 해수욕장 등이 모래사장과 사구를 끼고 침엽수림 사이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경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연방에서 가장 중요한 공업도시이자 북서부 공업지대의 중심지로 전체 고용인구의 절반 이상이 공업과 건설업에 종사한다. 공업은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이 특화되어 있다. 특히 기계공업 분야가 발달하여 시 공업생산의 1/2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는 이 도시가 일찍부터 공업이 발달해 기계공업에 필요한 숙련 노동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기계공업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화학공업이다. 이 도시의 화학공업은 비료·타이어·합성고무·페인트·플라스틱·약품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이외에 냉장고·라디오·텔레비전 등 가전제품 중심의 소비재 공업과 자동차 공업도 꽤 발달했다. 소비재 제조업은 주로 이 도시를 중심으로 한 시장을 대상으로 한다. 이 도시에서 발달한 최초의 공업인 조선업도 러시아 연방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원자력 쇄빙선 레닌호도 이곳 조선소에서 만들어졌다.

교통

이 도시는 육상·해상·항공 교통의 요지이다. 이곳 항구는 러시아 연방 최대의 무역항으로 각종 수출입품이 드나들며, 여름철에는 여객선이 정기적으로 스톡홀름과 영국의 틸베리까지 운항한다. 이 항구는 또한 네바 강의 하항으로 네바 강과 라도가 호를 거쳐 백해, 북극해, 카스피 해, 볼가-발트 수로 등 유럽권 러시아의 내륙 수로체계와 연결된다.

철도는 러시아 연방 내의 모스크바를 비롯한 주요도시들뿐만 아니라 헬싱키와 바르샤바 등 유럽의 북부 와 중부 각지로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이들 노선의 주요종착역으로 모스크바·바르샤바·핀란드·발트·비테프스크 역 등이 있다. 시내에는 1955년부터 지하철이 개통되어 운행되고 있고, 그밖에도 시 외곽과 위성도시들을 연결하는 교외철도망·버스·전차·무궤도전차 등이 잘 발달되어 있다. 항공로는 베를린·파리·런던 등과 연결되며, 풀코보 국제공항이 시에서 남쪽으로 18㎞ 떨어져 있다.

사회와 행정

이 도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의 주도인 동시에 러시아 연방의 직할시이다(1931~). 16개의 구로 이루어졌으며, 구 밑에는 17개의 도시구역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도시권에는 별도의 지방정부가 관리하는 5개의 시가 있는데 이 시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16개 구와 같은 지위를 가진다. 시민은 대부분 러시아인이다. 혁명 전에는 폴란드인·발트인·독일인 등이 상당히 많았지만, 이들은 스탈린에 의해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추방되었으며 많은 러시아 농민들이 유입되어 전후에는 이주민이 원주민의 수효를 능가했다.

이 도시에는 국가의 각종 핵심부서가 있어 과거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금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위공격을 방어한 공로로 영웅시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주택들은 시의 역사에 비해 현대식 건물이 많다. 그것은 대부분의 주택이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어 전후 대규모의 건설계획에 의해 복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결과 인구의 상당 비율이 일부 고층 아파트를 포함한 비교적 현대적인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런 주택은 대부분 중앙난방식이며, 다른 생활 서비스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다. 차르 시대의 악명 높았던 생활환경과는 달리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깨끗하고, 공공 서비스 시설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시민들을 위한 수백 개의 의원과 함께 종합병원과 병원도 150개에 달한다.

교육과 문화

고용인구 가운데 상당수가 교육·예술·과학 계통에 종사할 정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연방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과 과학연구의 중심지이다. 대표적 교육기관은 1819년 설립된 국립대학교이다. 이 대학교는 모스크바대학교와 함께 러시아 연방에서 가장 큰 대학교로 특히 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했다.

연구소로는 광업연구소(1773), 군사의료 아카데미(1789), 과학기술연구소(1899) 등이 있으며, 1757년에 설립된 예술 아카데미는 국립대학교에 못지 않게 유명하다. 이 외에도 고등교육기관과 전문기술중등학교가 많다. 이곳 연구활동의 중심지는 과학 아카데미의 도서관이다. 과학 아카데미의 본부는 혁명 후 모스크바로 옮겨갔지만, 도서관은 이 도시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초기부터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와 러시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대규모의 공연장과 극장 등의 문화시설이 많으며, 그 질적 수준도 매우 높다. 그중에서 키로프 국립 아카데미 극장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으며, 극장 소속의 키로프 발레단은 자주 해외 순회공연을 갖는다.

박물관으로는 에르미타슈 박물관과 러시아 그림만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러시아 국립박물관이 유명하다. 에르미타슈 박물관은 본래 겨울궁전이었던 곳으로 런던의 영국박물관이나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못지 않은 수준의 소장품을 자랑한다. 이 외에 푸슈킨 하우스 문학박물관도 전문적인 수집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초기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는 핀란드 만 주변에 러시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8~9세기부터이다.

당시 잉거만란트 또는 잉그리아로 알려진 이 지역은 노브고로트에 귀속되었으나 오랫동안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다. 15세기에 이 지역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1617년 스웨덴이 잉그리아를 합병하고 네바 강을 따라 요새를 세움으로써 스웨덴령이 되었다. 그후 제2차 북방전쟁(1700~21)에서 표트르 대제가 노테부르크 요새(지금의 페트로크레포스트)를 공격하여 1703년 함락시키고 이어 네바 강 하류에 있는 스웨덴의 닌스한츠 요새를 점령하여 네바 강의 삼각주를 손에 넣음으로써 이곳은 다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시의 건설은 닌스한츠를 점령한 직후 스웨덴과 전쟁중이던 그해 5월 27일(구력 5. 16) 표트르 대제가 직접 자야치 섬에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주춧돌을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요새 건설 후 곧 표트르 대제는 요새의 반대편 강기슭에 해군부 조선소를 세우고 요새와 조선소를 중심으로 '유럽으로의 창'을 열기 위한 신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1712년 마침내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상트페테르부르크라 명명했다.

많은 귀족과 상인들이 새 수도로 이주해왔으며 그들이 살 집과 궁전, 정부관청 등이 신속하게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목조건물들이 세워졌으나 곧 석조건물들로 대체되었다. 시의 건설을 위해 당시의 유명한 건축가·조각가·장인들이 러시아 전역은 물론 프랑스·이탈리아 등 외국으로부터도 초빙되었다. 당시 세워진 건물 가운데 상인거래소(지금의 해군박물관), 세관(지금의 문학박물관), 해군 병원, 여름궁전 등은 지금도 남아 있다.

표트르 대제는 이러한 시 건설과 함께 서방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얻기 위해 항만시설을 건설하는 한편 170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앙 러시아 및 볼가 강 유역의 내륙 수로망과 연결하는 비슈네볼로트스키 운하를 완공했다. 1727년 네바 강을 건너는 첫 부교를 시작으로 많은 수로와 운하들 사이에 370여 개의 다리를 놓았다.

이런 점에서 이 도시가 세워지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의 결과 시를 건설한 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은 1726년에 이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전체 대외 무역량의 90%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18세기말에 가서는 조선업을 비롯하여 종이·페인트·식료품·의류·신발 제조업 등이 크게 발달했다. 인구도 1/3 이상이 군인이거나 행정관료였지만, 1765년 15만 300명에서 1790년대말에는 22만 200명으로 급증했다.

역대 차르들은 아름다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여름궁전이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와 같이 단순한 양식의 건물들이 지어졌지만, 18세기 중엽에는 라스트렐리·체바킨스키·스타소프 등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에 의해 화려한 색상과 장식을 지닌 러시아-바로크 양식의 겨울궁전, 스트로가노프 궁전 등이 건축되었다. 18세기말에는 순수한 고전양식에 따라 스몰니 수녀원, 국회의사당, 미하일로프스키 궁전(지금의 러시아 국립박물관) 등 훌륭한 건물이 세워졌다.

아울러 학술과 문화 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1738년 러시아 최초의 발레 학교가 세워졌으며, 1773년에는 광업연구소가, 181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862년 러시아 최초의 음악학교가 문을 열고, 그곳에서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한 작곡가들의 음악이 연주되었다.

근대도시로의 성장

19세기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화려한 궁정문화와 함께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을 향하는 산업도시로서의 본격적인 성장을 했다.

그러한 성장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새로운 교통·통신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1810년 마린스키 운하가 새로 건설되고, 그 다음해 티흐빈 운하가 보수되는 등 내륙 수로망과 연결운하가 더욱 정교하게 정비되었으며, 1813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증기선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건조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837년 차르스코예셀로(지금의 푸슈킨 시)와 여름궁전을 잇는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부설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모스크바까지의 철도 건설을 시작하여 1851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간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이어 1861~62년 바르샤바를 잇는 노선이 완성되는 등 이 도시를 중심으로 러시아 내륙과 유럽을 연결하는 철도망이 건설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러한 성장은 1861년 알렉산드르 2세(1855~81 재위)가 단행한 농노해방에 힘입은 바 크다(농노해방령). 농노해방에 형식적인 면이 있긴 했지만, 봉건지주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당시 러시아 최대 공업도시이자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결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구는 1864년 53만 9,400명에서 1900년 150만 명으로 늘어났고 10월 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에는 250만 명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구급증은 당연히 공업발전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의 공급을 원활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급증과 산업발전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차르의 전제정치에 대한 혁명의 온상이 되었다. 국가 기간산업의 집중과 공업의 발달로 191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공장 노동자가 25만 명에 달했다.

특히 이들은 산업이 러시아보다 훨씬 발달한 독일에서보다도 더 대규모 공장에 밀집되어 있었다.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혁명사상의 전파와 조직결성에 있어서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유리했다. 더욱이 공공교통수단이 잘 발달되어 있지 않아 공장노동자들은 대부분 공장 주변에 모여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업장의 환경은 불결하고 비위생적이었다.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면서 더럽고 비좁은 방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자고 먹었다. 중심부에서는 2.59㎢당 18만 명 이상이 거주했으며,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은 티푸스와 콜레라 등 각종 전염병과 직업병으로 죽어갔다.

그러나 1917년 이전에 이미 시 행정은 마비상태에 빠져 수돗물조차 공급되지 못하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첫 반란은 1825년 12월 14일 일어났다. 데카브리스트 봉기라고 하는 이 혁명은 농노제와 전제정치의 폐지를 주장하는 일부 자유주의적 귀족과 군인들에 의해 일어났지만, 곧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그러나 그후에도 노동자들의 혁명적 활동과 저항은 지속되었다. 마침내 1905년 1월 15만 명이 참여한 총파업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은 절정에 다다랐다. 1월 9일 일요일(피의 일요일) 노동자들은 차르에게 호소하기 위해 겨울궁전으로 행진해갔다. 그러나 차르의 군대는 이들에게 발포하여 그 자리에서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상황은 혁명으로 발전하여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봉기는 다시 무참히 진압되었다(1905년 러시아 혁명).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차르를 중심으로 한 애국적 열기를 북돋워 독일식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식인 페트로그라드로 바꾸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의 재난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의 경제사정을 더욱 악화시켰으며, 교통의 마비로 식량과 연료가 거의 공급되지 않았다. 1917년초 페트로그라드는 비축식량이 10일분밖에 되지 않자 배급제를 시작했다. 배고픈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은 드디어 그해 2월 26일 총파업으로 봉기했다. 이번에는 병사들도 노동자의 편이었다. 2월 27일 시위대는 겨울궁전을 점령하고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구성했다.

그리고 3월 2일 차르를 퇴위시키고 케렌스키 중심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레닌과 트로츠키가 주도하는 볼셰비키 노동자와 병사들은 10월 25일 겨울궁전을 습격하여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918년 제헌의회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집되었지만, 볼셰비키는 이를 해산하고 그들의 권력을 더욱 공공히 하는 한편 그해 3월에는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겼다. 볼셰비키는 그들의 정권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1918~20년의 내전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외국간섭으로 페트로그라드는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대부분의 공장이 가동되지 않았으며, 인구도 1920년에는 72만 2,000명으로 혁명 전의 1/3 정도로 줄었다. 1924년 레닌이 죽자 페트로그라드는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28년 국가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이 수립되면서 레닌그라드에 중추적 역할이 맡겨졌다. 이것은 시의 발전을 다시 자극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는 레닌그라드의 공업생산이 소련 전체의 11%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인구도 300만 명을 넘게 되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는 1941년 6월 독일의 전격적인 침공에 의해 다시 한번 파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독일은 레닌그라드를 침공의 첫 목표로 삼고 맹공을 가했으며, 그해 9월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이때부터 레닌그라드는 소련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어 독일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은 1941년 8월 8일에서 1944년 1월 27일까지 장장 872일간의 포위 공격으로부터 시를 방어했다. 당시 기아와 추위, 괴혈병 등으로 발생한 희생자는 66만 명이나 되었다.

소비에트는 전후 첫 5개년 계획에서 레닌그라드의 산업과 유적을 복구하는 데 집중했지만, 회복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려 1960년대가 되어서야 인구가 전쟁 전 수준인 33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후 레닌그라드의 발전은 급속히 이루어졌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1950년대 후반에는 신교외지역에 주택건설계획이 착수되었고, 1970년대에는 도심의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인구도 1980년대에는 400만 명을 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계속되는 시의 확장과 함께 하부구조의 현대화로 구시가지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시 계획가들은 이에 대해 시를 과학기술 중심지로 육성하고 독특한 문화적 유산들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형태의 산업 관리를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