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

아관파천

다른 표기 언어 俄館播遷 동의어 고종 러시아공관 망명

요약 1896년 조선 고종과 세자가 거처를 러시아제국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러시아는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명성황후 세력에게 친러정책 실시를 권유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을 일으켰으며, 친일내각은 단발령 실시를 비롯한 개혁사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명성황후 학살과 단발령은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에게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전제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목차

접기
  1. 정의
  2. 배경
  3. 을미사변
  4. 고종, 러시아 공사관 파천
  5. 역사적 의미

정의

구 러시아 공사관(사적 제253호)
구 러시아 공사관(사적 제253호)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조선 고종과 세자가 거처를 러시아제국 공사관으로 옮겼던 사건. 이를 계기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 개화파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배경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遼東]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1860년대 이후 끊임없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조선 내에도 친러세력을 부식하려 했던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아 조선의 왕실 및 일부 정치세력 내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동안 친일개화파 정권에 의해 눌려 있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러시아 공사 K. 베베르[韋貝]는 미국공사와 함께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 실시를 권유했다.

을미사변

이에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학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했다. 그리고 친일 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의 실시를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명성황후 학살과 단발령은 조선민들의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학살되고 난 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고종, 러시아 공사관 파천

1895년 10월 12일 '춘생문사건'은 친러세력이었던 이범진 등이 춘생문으로 입궐하여 고종을 데려오려는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또다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그당시 친미파였던 이완용·이윤용 등과 모의하여 고종에게 접근,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고종은 마침내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여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으로 개화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가 참형되었고, 내부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도망가던 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은신중이던 친미·친러파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어 내각을 구성했다. 친러내각은 친일내각이 실시한 갑오·을미 개혁사업을 중단하고 내각은 의정부로 환원되어 한동안 약화되었던 전제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되었다.

역사적 의미

이 파천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의 세력다툼의 결과였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러시아 공사관
러시아 공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