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

러시아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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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러시아어로 씌어진 문학작품.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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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 러시아 문학
  2. 고대 키이우 시기의 러시아 문학
  3. 고대 러시아 지방문학의 발달
  4. 통일 러시아 문학
  5. 1917년 혁명 전 근대 러시아 문학
  6. 러시아 고전주의 문학의 발생
  7. 근대 러시아 문학의 정치적·감상적 주제
  8. 19세기 러시아 문학
  9. 20세기초의 러시아 문학
  10.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 문학
  11. 러시아의 5개년계획 문학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12. 러시아의 전쟁문학과 주다노프시치나
  13. 스탈린 이후의 러시아 문학

러시아 문학의 적용범위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기록문학이 생겨난 11~16세기는 류리크 왕조가 지배하는 동슬라브족의 동맹체인 크이우 루시의 문학을 가리키며, 16~20세기초는 통일 러시아 문학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중심부 문학이지 전체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다. 1917년 이후의 러시아 문학은 러시아 공화국만의 문학을 가리키며 소비에트 연방의 다른 공화국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러시아 문학은 보통 11~17세기말의 고대와, 그후 근대의 두 시기로 크게 나눈다. 근대는 다시 17세기말부터 1917년까지의 혁명 이전과 혁명 이후로 구분한다. 러시아의 고대문학은 대략 서유럽의 중세문학에 해당되는데 처음에는 크이우 루시가 문학을 주도했으나 몽골의 침략기인 13세기에 지방 문학의 중요도가 높아졌고 15세기말~16세기초에 이르는 동안에는 모스크바가 문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대 러시아 문학은 크이우의 대공 블라디미르가 988년에 동방정교회로 개종해 루시와 비잔틴 제국, 그리고 문학과 정교회가 결합하면서부터 내내 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학에서는 동슬라브족이 예로부터 입으로 전하던 구전서사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Vladimir Vladimirovich Mayakovsky)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Vladimir Vladimirovich Mayakovsky)

근대문학의 시작은 서구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미 17세기에 서구화는 눈에 띌 만큼 이루어졌으나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18세기초부터 20세기초까지는 서구, 특히 프랑스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영국의 영향도 찾을 수 있는데, 18세기 중엽에 정기간행물이 많이 창간된 것이나 감상주의의 융성 등을 들 수 있다. 유럽의 시각에서 볼 때 러시아 문학이 세계문학에 크게 영향을 끼친 전성기는 19세기였다.

1917년의 혁명은 근대 러시아 문학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혁명 이후의 문학은 고대부터 혁명 이전까지 쌓아온 전통을 발판으로 발전했지만 어느 정도 정치상황에 좌우되었으며 생활과 문화의 모든 분야에 걸친 소련 공산당의 엄중한 통제와 지도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작가와 국가(당)간의 심화되는 갈등이었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 사후에는 유럽 문학과의 접촉이 재개되었고 작가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고대 러시아 문학

고대 러시아 문학 최초의 작품은 11세기에 씌어졌다(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고대 러시아란 관례적 용어는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러시아인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를 포함하는 다른 슬라브족의 문학도 가리키기 때문이다).

본래 러시아 문학의 발달이 988년에 키예프 루시에서 이루어진 것은 블라디미르 대공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백성을 개종시킨 것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초기의 문학은 주로 종교적·교훈적이었다. 이런 특징은 그리스 작품을 번역한 비잔틴 문학의 영향 때문이다.

세속문학은 키예프에 기록문학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슬라브족에게 내려오던 구전서사시의 영향을 받았다. 이 지역 민속의 가장 가치있는 유산은 '빌리나'(bylina)라 불리는 영웅서사시로, 10세기경부터 키예프·노브고로트·갈리치아 등지에서 지어졌다.

고대 키이우 시기의 러시아 문학

고대 러시아 문학의 첫번째 시기인 11~13세기초의 시기를 키이우 시기라 하는데 그뒤 몽골 민족인 타타르족이 침입한 데서 몽골 전기(前期)라 부르기도 한다.

문학활동의 중심지는 키이우였지만 북부와 남부의 다른 도시에서도 키이우와는 상관없이 별도의 작품들이 씌어졌다. 북부와 남부 문학에서 사용된 언어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언어, 즉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대교회 슬라브어의 여러 요소를 흡수한 동슬라브족의 고대 문학어였다.

키이우 시기의 문학은 처음부터 다수의 번역서를 포함했다.

그 대부분은 그리스어를 번역한 것이었지만 라틴어를 번역한 것도 있다. 번역서 중에는 전례서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고대 불가리아어로 씌어졌고 기도문과 찬송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성서와 관련된 서적도 여러 종류 있었으며 그중 하나인 〈아프라코스 복음서 Aprakos Gospel〉 에는 전례의 일부로서 낭독할 복음이 요일별로 배열되어 있다.

〈아프라코스 복음서〉 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1056~57년에 기록된 〈오스트로미르 복음서〉이며 가장 오래된 4복음서 필사본으로 알려진 것은 〈갈리치아 복음서〉(1144)이다. 그밖의 번역서로는 경외서, 성자전, 연대기, 창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 로맨스, 트로이 전설, 다양한 비잔틴 로맨스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광범위하게 발달한 가장 오래된 문학 장르의 하나는 연대기이다.

이미 11세기 중엽에 연대기 편찬이 시작되어 12세기초에는 역사적·문학적으로 의의가 돋보이는 연대기 편찬이 뚜렷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지난 세월의 이야기 Povest vremennykh let〉(〈러시아 원초연대기〉)이다. 원본은 1112년경에 키이우 페체르스크(동굴) 수도원의 수사 네스토르가 편찬한 것으로 추측된다.

키이우 시기 문학에서는 설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가장 훌륭한 설교는 1051년 이전에 힐라리온이 쓴 〈율법과 은총에 관한 설교 Slovo o zakone i blagodati〉이다. 12세기에는 러시아인으로서 2번째로 키이우 대주교에 오른 클리멘트 스몰랴티치와 투로프의 주교 키릴이 키이우 루시의 수사적인 종교문학을 대표했다. 키이우 시기 초기의 성자전 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블라디미르 대공의 두 아들인 보리스와 글레프 공(公)에 관한 작자 미상의 〈전설 Skazaniye〉이다.

전통적인 비잔틴 양식의 성자전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전설에 더 가까운 이 작품은 서정적인 비탄과 독백, 기도와 명상으로 가득 차 있다.

13세기초에는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교부전(敎父傳) Kievo-Pechersky paterik〉이 씌어졌다. 이것은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수사로서 당시 블라디미르의 주교였던 시메온과 그 수도원의 수사 폴리카르프 사이에 오고간 서신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키이우 루시 시대에는 또한 성지순례문학이 생겨났다. 이 종류의 대표작으로는 체르니고프 수도원의 원장인 다닐이 1106~08년에 성지 팔레스타인을 다녀온 뒤 쓴 〈순례기 Khozhdeniye〉가 있다.

키이우 루시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은 〈이고리 원정기 Slovo o polku lgoreve〉로, 1185년에 노브고로트-세베르스키의 이고리 공이 다른 공후들과 함께 동방 유목민인 폴로베츠족과 싸우다 패하는 이야기이다. 1185~87년에 씌어져 단 1권의 필사본이 전해져오다 1795년에 발견되었으나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때 모스크바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소실되기 전에 만들어진 사본들은 원작과 같음이 입증되었다. 이고리 원정기는 실제의 원정 직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러시아 지방문학의 발달

크이우 루시가 존속했던 짧은 기간 동안에 창조된 문학은 기교적·이념적으로 모두 뛰어나다. 그러나 12세기 중엽부터 크이우 루시는 쇠퇴하기 시작해 13세기의 몽골족의 침입으로 더욱 타격을 받았으며 문예활동도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타타르족의 침입은 13세기의 많은 작품에 끔찍한 재앙으로 표현되었다.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은 〈바투 칸[汗]의 랴잔 함락 이야기 Povest o razoreni Ryazani Batyem〉이다. 크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장 세라피온의 감동적이고 격렬한 설교는 타타르 침략에 대한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

13세기말~14세기초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공의 일대기가 전통적인 성자전 형식으로 씌어졌으나 사실은 군담에 더 가까웠으며 알렉산드르의 서사적인 모습이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13세기 갈리치아와 볼리니아(당시에는 각각 독립 공국이었음) 문학의 대표작으로는 1201~92년의 사건을 기록한 〈갈리치아 볼리니아 연대기〉이다. 이것은 1420년대에 각지의 연대기를 한데 모은 〈이바체프 연대기 집성〉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러시아 문학이 지방마다 다른 성격을 띠는 것은 여러 공국간에 교류가 점차 단절된 결과였으며 14세기와 15세기의 문학에도 이 지역성은 여전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15세기초에 모스크바 문학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모스크바가 14세기 중엽부터 대(大)러시아 민족주의를 위한 통일 주체세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통일의 기운은 14세기말 쿨리코보 전투(1380)에 관해 쓴 〈마마이의 패주 Mamayevo poboishche〉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1453년 투르크군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은 네스토르 이스칸테르의 〈차르그라드 점령기 Povest o vzyati Tsargrada〉를 낳았다. 주로 전통적인 전쟁담의 수법으로 쓰인 이 작품에서 러시아는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이며 정교의 옹호자로 그려져 있다. 15세기말과 16세기초에도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 계승자로서의 러시아를 주제로 한 이야기들이 모스크바에서 씌어졌다.

아파나시 니키틴의 〈3대양 여행기 Khozhdeniye za tri morya〉도 15세기 작품이다. 트베리의 상인인 작자 니키틴은 1466~72년의 6년 동안 인도와 페르시아를 여행하고 생생한 러시아어 구어체와 페르시아어·아랍어·터키어를 섞어서 이 작품을 썼다.

15세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무롬 공 표트르와 그의 비 페브로니아 이야기 Povest o Pëtre i Fevroni〉에서도 지방문학적 체취는 느껴지지 않는다. 15세기의 지방문학 중에서는 노브고로트 문학이 특히 발달해 노브고로트의 정치적 독립과 교권의 독립을 옹호하는 작품들을 생산했다. 모스크바 문학과 경합을 벌인 트베리 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은 1453년경의 정교회 대공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를 찬양하는 송사이다.

프스코프 문학의 대표작은 1510년 모스크바의 프스코프 정복을 묘사한 〈프스코스 점령에 관하여 O pskovskom vzyati〉이다. 14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문학 부흥의 기운은 투르크에 정복당한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성직자들이 러시아에 유입해 끼친 영향 때문이었다. 한편 남슬라브 문학의 내용과 문체가 그리스어를 재번역한 형태로 성자전을 통해 러시아에 도입되었다.

통일 러시아 문학

1480년 타타르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러시아는 마침내 숙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대공국이 통일 러시아의 기초를 확립하고 모스크바에 대항하는 다른 공국을 마지막으로 복종시킨 것은 이반 뇌제(雷帝)가 치세하고부터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반 뇌제(1584 죽음)는 강력한 봉건적 대귀족들을 상대로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이 싸움이 문학에도 반영되었다. 이반 뇌제가 대귀족에 대항해서 구성한 신귀족계층의 가장 유명한 대변자는 이반 페레스베토프로, 수편의 정치선전적 이야기와 이반 뇌제에게 보내는 2통의 청원서를 남겼다.

대귀족의 입장을 대표한 사람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정치평론가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쿠르프스키 공이었다. 그는 1560~70년대에 걸쳐서 쓴 〈모스크바 대공의 경력 Istoriya o velikom knyaze moskovskom〉에서 무고한 귀족들을 처형시킨 이반 뇌제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16세기 중엽부터 모스크바는 학문과 러시아 정교 및 정치적 권위의 중심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교회적·정치적 전통을 찬미하고 강화하며 또한 그 전통이 러시아의 건국시기부터 이어진 것임을 증명하기 위한 일련의 문학적 사업이 수행되었다. 1552년에는 모스크바의 대주교 마카리가 편찬한 방대한 백과사전적 저서인 〈성자전 집성 Velikiye Minei-Cheti〉이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교회 문학의 번역서와 창작물이 포함되었다. 1563년에는 마카리의 후계자가 완성한 〈대공 계보집 Stepennaya kniga〉이 편찬되었는데 역대 러시아 대공과 교회 지도자들의 일대기가 실려 있다.

이 시기에는 또한 창세기부터 1560년대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삽화 연대기 Litsevoy svod〉를 비롯하여 중요한 모스크바 연대기 편찬물이 수집되었다. 〈가훈 Domostroy〉·〈100항 조례집 Stoglav〉과 같은 것은 도덕·사회·정치에 관한 생활규범을 강화하기 위해 쓴 저술이다. 이 시기에 모스크바에 도입된 인쇄술은 러시아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으며 1564년에는 〈사도행전 Apostol〉이 최초로 인쇄되었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까지는 반봉건적 투쟁의 정치적 대격변기였다.

농노제로 피폐해진 농부들과 신귀족에게 패배한 대귀족 모두가 투쟁에 나섰다. 스웨덴과 폴란드군의 개입으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지만 러시아 국민은 합심해 외세를 물리쳤다. '혼란시대'의 사건들은 수많은 이야기에 묘사되었으며 이들 작품은 사회적·정치적 대격변을 반영하는 동시에 외국의 간섭에 대항해 끓어오르는 애국심을 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문학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우아함과 기교가 이 시기에 와해되었고 낮은 신분 출신의 새로운 작가와 독자들이 세속적인 주제와 사실주의, 민속적 요소들을 문학에 도입했다.

예를 들어 돈 카자크인들에 의한 1637년의 아조프 함락이나, 1641년 투르크군에 포위당한 아조프의 이야기들은 탁월한 문학작품이다. 모스크바 공국의 대외관계로 유럽으로부터의 세속문학 도입이 원활해졌다. 세속문학의 번역, 기사도 이야기, 그리고 익살스러운 이야기들이 비잔틴의 종교적·교훈적 문학을 대신하거나 그와 나란히 공존하게 되었다. 민간전승 또한 눈에 띄게 유입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최초의 세속 문학은 17세기 후반기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보수적인 교회문학 전통을 따르던 이야기들과 나란히, 도덕적·종교적인 원칙에서 벗어난 〈프롤 스코베예프 이야기 Povest o Frole Skobeyeve〉·〈카르프 수툴로프 이야기 Povest o Karpe Sutulove〉 등의 희극적인 이야기가 등장했다. 궁정과 교회, 재판에 대한 풍자와 패러디도 씌어지기 시작했다. '복고신앙파'의 지도자인 대사제 아바쿰 페트로비치가 1672~75년에 쓴 자서전 〈대사제 아바쿰 페트로비치의 자서전 Zhitiye protopova Avvakuma, im samim napisannoye〉은 전형적인 성자전 형식을 변형시켜 생생한 구어체로 된 통렬한 논쟁 문학을 탄생시켰다.

1917년 혁명 전 근대 러시아 문학

근대 러시아 문학의 기원은 종교서적이나 공무서적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문학작품이 출판되기 시작한 18세기 초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문학의 주류는 고전주의였으나 세기말에는 감상주의가 들어섰고, 1800년을 기점으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고전주의 문학의 발생

18세기초의 가장 뛰어난 문필가는 표트르 대제의 측근인 노브고로트 대주교 페오판 프로코포비치였다. 그는 정적을 공격하는 수단으로서의 풍자와 독재정부 옹호라는 2가지 주된 주제를 러시아 문학에 심어놓은 장본인이었다.

고전주의의 대표적 작가로는 러시아 최초의 세속 시인인 안티오흐 드미트리예비치 칸테미르, 당대에 가장 박식한 인물로 꼽히던 바실리 키릴로비치 트레디아코프스키, 시인·문법학자·과학자·문학비평가인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로모노소프,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수마로코프를 들 수 있다. 칸테미르는 주로 연애시와 9편의 풍자시로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 풍자문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트레디아코프스키는 프랑스 작가 폴 탈망의 〈사랑의 섬 여행 Voyage de l'Isle d'Amour〉(1663)을 번역하면서 문예활동을 시작했는데 이것은 러시아에서 출판된 최초의 연애물이었다. 그는 또한 러시아 작시법의 개혁에도 기여해 러시아 신고전주의를 특징짓는 유명한 '3문체론'을 제창했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고문체'(高文體)는 영웅시와 송시에, '중문체'는 구어를 사용하는 드라마에, '저문체'는 희극·경구·가요·산문으로 씌어진 서간문, 그리고 정확해야 하는 묘사에 각각 적합하다고 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어의 이론적 연구를 발전시켰으며 러시아어 어휘의 풍부함·아름다움·힘 등은 다른 어떤 유럽어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최초의 고전적 비극 〈호레프 Khorev〉(1747)를 쓴 수마로코프는 여러 장르에 능통했으며 로모노소프의 '화려한' 문체에 반대해 평이하고 세련된 문체를 썼다. 그는 수편의 연애시·비가·전원시·목가 등으로 유명해졌고 그밖에 〈햄릿 Hamlet〉을 자유롭게 각색한 작품을 포함해 6편의 비극과 4편의 희극을 썼다. 라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의 비극은 귀족들에게 도덕적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쓴 것이며, 심지어 희극조차 러시아 귀족의 도덕적 향상을 목적으로 했다.

자신이 발간한 잡지 〈부지런한 꿀벌 Trudolyubivaya pchela〉에서는 관료의 부패를 폭로하고 지주들의 농노학대를 비난했으나 사회적 불평등은 자연스럽고 합법적이라고 옹호했다. 그가 쓴 풍자적 논문과 우화시는 이후 10년간 풍자문학의 초석이 되었다.

고전주의에서 최초로 이탈한 작가는 미하일 마트베예비치 헤라스코프였다. 그는 볼테르의 〈앙리아드 Henriade〉를 본뜬 2편의 서사시로 유명한데, 첫번째 서사시는 1771~79년에 쓴 〈로시야다 Rossiyada〉(1799)로 이반 뇌제의 카잔 점령을 다루었고, 〈부활한 블라디미르 Vladimir Vozrozhdyonny〉(1785)는 러시아를 개종시킨 성 블라디미르를 다루었다.

근대 러시아 문학의 정치적·감상적 주제

1773~75년에 걸쳐 일어난 푸가초프 반란의 영향으로 이 시기의 작가들은 농노제를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았다.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은 크게 강화되어 독자층이 늘어나고 모든 계층이 문학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수마로코프는 자신의 마지막 3편의 비극에서 지금까지의 전제군주제를 공격하고 계몽군주제를 옹호했다. 페늘롱의 〈텔레마크 Télémaque〉를 자유롭게 번안한 〈틸레마히다 Tilemakhida〉(1766)에서 트레디아코프스키는 모든 국민이 차르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차르 역시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영국의 잡지 〈스펙테이터 Spectator〉를 모방해 잡지를 손수 편집했는데 이 잡지를 통해서 트레디아코프스키를 조롱했다.

이 시기의 가장 탁월한 작가는 극작가 데니스 이바노비치 폰비진과, 작가이자 잡지발행자인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노비코프였다.

폰비진은 젊어서 우화시를 번역했으나 나중에는 스스로 풍자적인 우화시를 창작했다.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은 직후에 쓴 〈여우와 훈계자〉(1762)에서 그는 여제의 위선적인 조신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폰비진에게 극작가로서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2편의 산문 희극 〈여단장(旅團長) Brigadir〉(1783)〉·〈미성년 Nedorosl〉(1783)이었다. 노비코프도 폰비진처럼 풍자의 초점을 농노제 자체가 아닌 지주들의 권력남용에 맞추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소설가는 표도르 알렉산드로비치 예민이었다. 그의 걸작 〈에르네스트와 도라브라의 편지 Letters of Ernest and Doravra〉(1776)는 루소의 〈신 엘로이즈 La Nouvelle Heloïse〉를 자유롭게 번안한 작품으로 러시아 소설사에서는 최초로 보통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심리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층민 출신의 통속 소설가인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출코프는 독자를 즐겁게 하는 데 주력해 그의 소설에는 고전주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고상한 도덕적 설교를 찾아볼 수 없다.

고전주의의 쇠퇴 기미는 이폴리트 표도로비치 보그다노비치의 통속적인 설화시들, 특히 라 퐁텐의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 Les Amours de Psiché et de Cupidon〉을 마음대로 번안한 〈두셴카 Dushenka〉(1775)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감상주의 작가들은 보그다노비치를 자신들의 시조로 여겼다(감상적 소설).

고전주의에서 감상주의로의 전환을 가장 활발하게 표현한 작가는 18세기 러시아 최대의 시인 가브릴라 로마노비치 데르자빈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인 서정시와 송시에서는 로모노소프와 수마로코프의 영향이 엿보이지만 곧 사회악에 대해 독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메시체르스키 공의 죽음에 부치는 그의 송시(1779)는 인생무상과 죽음의 불가피성에 관한 명상으로 가득 차 있지만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 특유의 유쾌함으로 운명의 신을 맞아들이면서 끝을 맺는다. 데르자빈은 그후 10년 동안 최성기를 맞아 〈이스마일 함락에 부치는 송시〉·〈귀족에게 보내는 송시〉 등을 썼다. 그의 가장 훌륭한 시 역시 이 시기에 쓴 것으로 격조 높은 송시 〈폭포 Vodopad〉(1794)·〈공작〉 혹은 고대 그리스 시인 아나크레온의 전통을 따른 〈정찬에의 초대〉(1798)·〈즈반카의 생활〉(즈반카는 시인의 작은 영지 이름) 등이 있다.

데르자빈은 농노제를 자연스럽고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시를 썼으나, 사실적인 필치로 일상적인 삶을 그리고 구어체를 도입해 시어를 단순화한 것은 시의 민중화에 힘쓴 것이라 할 수 있

1790년대의 러시아 문학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통일체로서의 국민의 역할을 주제로 제시했다.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라디시체프는 〈자유에 부치는 송시 Ode to Liberty〉(1781~83)에서 미국 혁명을 찬양하고 농노제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편으로 전제정치에 대한 탄핵이었기 때문에 예카테리나 2세는 이 시를 '반역적인 시'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 송시에서 황제를 처형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카프니스트의 유명한 희극 〈중상 Chicane〉(1793~98) 같은 격렬한 풍자물을 별도로 친다면 이 시기의 주류는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카람진을 필두로 하는 감상주의였다. 러시아 감상주의에서 주관적 감각은 고전주의적 추상화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연상태를 이상화하는 경향과 결합되어 있다.

카람진은 이성을 강조하는 고전주의에 맞서, 시란 감정의 표출이며 대상의 객관적인 가치 여하에 관계없이 작자의 주관적 체험이나 인생관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상주의자들은 더욱이 예술의 정서적 토대를 강조하면서 섬세한 감수성이 미적 인상의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데르자빈과는 달리 카람진은 현실 자체보다는 현실이 시인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분위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에 따르면 가장 위대한 시적 창조는 "지치고 슬픔에 잠긴 심정의 토로"였다.

카람진의 후기 시를 특징짓는 이러한 비가적 분위기는 그의 유명한 소설 〈불쌍한 리자 Bednaya Liza〉(1792)에 잘 표현되어 있다. 러시아 소설로는 처음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된 묘사 부분이 작품의 중요한 구성요소를 이룬다. 카람진은 소설 〈율리아〉에서 전원생활과 '자연의 품'으로의 귀속을 이상화했다.

그의 다른 소설 〈본홀름 섬〉(1793)·〈시에라 모레나 Sierra Morena〉(1793) 등은 러시아 낭만주의 소설의 선구가 되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

19세기초의 가장 위대한 시인은 알렉산드르 푸슈킨이다.

그의 초기 시에서도 탁월한 기교와 주제의 다양성을 볼 수 있지만 그를 어떤 시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올려놓은 작품은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 Yevgeny Onegin〉(1823~31)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이념과 등장인물의 조화, 도시와 시골 사회의 묘사, 가볍고 유머러스한 논평과 인간심리의 사실적 통찰의 결합, 단순하고도 깊이있는 언어의 구사 등을 이루어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초기의 장편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yudmila〉(1820)·〈카프카스의 포로 Kavkaski plennik〉(1822)·〈바흐치사라이의 샘 Bakhchisaraysky fontan〉(1824) 등은 대체로 가볍고 민속적이거나 낭만적 형식으로 씌었다.

그러나 〈집시 Tsygany〉(1824)·〈눌린 백작〉(1825)·〈콜롬나의 작은 집 Domik v Kolomne〉(1830) 등에서는 인간의 약점에 대한 해학적인 동정심을 가미해 더욱 사실주의적인 기법과 장난스러운 풍자적 문체를 사용했다. 이 시기에 푸슈킨은 가장 뛰어난 서정시이자 흔히 인용되는 수사적인 시 〈예언자 Prorok〉를 썼다. 1820년대 후반과 1830년대 초반에 쓴 걸작으로는 〈폴타바 Poltava〉(1892)와 역작인 운문 동화 〈살탄 왕〉 등이 있다. 1833년에는 〈청동기사 Medny vsadnik〉를 썼는데, 이 작품에서는 표트르 대제가 보잘것없는 인간을 휩쓸어버리는 자연의 힘으로 묘사되어 있다.

푸슈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장대한 건설 이념과 그 저변에 깔린 공포를 그린 이 〈청동 기사〉를 능가하는 작품을 다시 쓰지 못했다. 그의 시적 드라마로는 사극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31)가 있다.

이 시대 또 한 사람의 대시인 미하일 레르몬토프는 1837년에 푸슈킨의 죽음에 부치는 시를 써서 갑자기 유명해졌는데 그로 말미암아 카프카스로 추방당했다.

미하일 레르몬토프(Mikhail  Lermontov)
미하일 레르몬토프(Mikhail Lermontov)

낭만주의적 경향이 가장 뚜렷한 그의 서사시 〈므치리 Mtsyri〉(1840)·〈악마 Demon〉(1829) 등은 카프카스에서 얻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푸슈킨 이전의 작가 중에서 이반 안드레예비치 크릴로프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우화를 러시아 문학의 보고에 남겨놓았다. 푸슈킨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바실리 주코프스키는 시인이자 번역가였으며 카람진의 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시어 창조에 기여했다.

푸슈킨과 동시대의 시인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독창적인 사람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바튜슈코프와 예브게니 아브라모비치 바라틴스키가 있다. 이 시기의 '시민' 시인(시는 사회적·시민적 명분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시인들) 중에서는 데카브리스트인 콘드라티 표도로비치 릴레예프가 가장 뛰어났다. 그는 재정의 압제에 반감을 표현하고 이에 대해 싸우다 맞이하는 죽음을 찬미했다.

19세기 러시아 시인들 중에서 가장 철학적인 시인은 표도르 이바노비치 튜체프로 유명한 시 〈마지막 사랑〉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가장 독보적인 시인은 시민시의 대표자인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였다. 그의 장편설화시 〈코가 빨개지는 추위 Moroz krasny-nos〉(1863)는 농민들의 삶을 묘사하면서 사실주의와 전설을 잘 융합한 것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에서 시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고 산문창작활동의 위대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푸슈킨은 만년에 차츰 산문에 힘을 기울였다. 레르몬토프의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 Geroy nashego vremeni〉(1840)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소설의 바이런적 주인공은 레르몬토프 세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물로, 재능은 뛰어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파괴적 욕구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전형이었다.

19세기 소설가 중 처음으로 폭넓은 인기를 누린 작가는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자고스킨이었다.

1612년에 러시아가 폴란드군을 물리친 전투를 다룬 그의 소설 〈유리 밀로슬라프스키 Yuri Miloslavsky〉(1829)는 조야한 민족주의 정신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가장 인기있는 낭만주의 소설가는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베스투제프(필명 마를린스키)였다. 러시아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산문작가로는 니콜라이 고골리가 있다.

우크라이나 태생인 고골리는 이방인의 시각에서 러시아인을 관찰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과장된 문체와 묘사를 통해 러시아인들 스스로가 사회의 도덕적 결함을 깨닫도록 해주었다. 고골리의 풍자적 희극 〈검찰관 Revizor〉은 1836년에 상연됨으로써 그의 비상한 영향력을 입증해주었다. 이 작품은 어느 지방도시에 사는 타락한 관리들을 다루었지만 사실상 러시아라는 국가 전체의 소우주를 제시한 셈이었다. 이 작품이 상연 금지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고골리 자신이 유일하게 긍정적 인물이라 칭했던 웃음 덕분이었다.

얼마 후 그는 유럽 여행을 떠나 잠시 로마에 체류하면서 유명한 소설 〈죽은 혼 Myortvye dushi〉(1842)의 제1부를 완성했다. 그러나 고골리는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이며 전제주의의 옹호자였으므로 비평가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처럼 이전에 그를 러시아 문학에서 '자연주의'파의 지도자이자 농노제의 적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고골리의 마지막 작품의 하나인〈외투 Shinel〉(1842)는 자연주의파 형성에 기여했다.

니콜라이 고골(Nikolay Gogol)
니콜라이 고골(Nikolay Gogol)

이 작품을 기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하급관리를 다룬 소설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고골리의 가장 뛰어난 계승자는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였는데 〈가난한 사람들 Bednye lyudi〉(1845) 등의 초기 작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와 가난하고 타락한 하급관리를 주로 다루었다. 1849년에 그는 혁명조직에 가담한 죄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형집행 직전에 감면되어 추방당했다.

10년 뒤에야 그는 유럽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잡지 〈브레먀 Vremya〉의 편집장으로서 문학적 명성을 회복하려 했으나 1863년 폐간되었고 2번째 잡지 〈에포하 Epokha〉 역시 엄청난 빚만 남긴 채 파산했다. 그는 이렇게 절박한 상태에서 최초의 위대한 장편소설 〈죄와 벌 Prestupleniye i nakazaniye〉(1866)을 썼다.

그의 다른 대작들 〈백치 Idiot〉(1868~69)·〈악령 Besy〉(1871~72)·〈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Bratya Karamazovy〉(1879~80) 등은 모두 작가의 놀라운 극적 재능, 사상적 소설가로서의 폭넓은 사실주의, 심리적 통찰력의 깊이, 삶의 비극적 측면을 묘사하는 능력, 그리고 탁월한 순간적인 조명을 보여주었다.

카라마 조프의 형제(Bratya Karamazovy)
카라마 조프의 형제(Bratya Karamazovy)

이반 투르게네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깊이와 비극적인 영역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단편소설이나 장편소설도 단순히 시사적인 여러 문제만을 다룬 것은 아니었다.

농노가 지주보다 우월하게 묘사된 〈사냥꾼의 수기 Zapiski okhotnika〉는 러시아 농촌을 시적인 분위기로 묘사해 공감을 자아내는 농부들의 모습과 결합시켜 결과적으로 농노제 폐지에 기여했다. 처음 발표한 몇 편의 소설로 그는 진보적 사상가이자 당대의 우수한 산문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세대차의 쟁점을 다룬 그의 최대 걸작 〈아버지와 아들 Otsy i deti〉은 젊은 인텔리겐치아를 격분시켰는데(그들은 소설의 허무주의적 주인공 바자로프가 자신들을 희화화한 것이라 생각했음), 이후 그는 진보적인 젊은이들의 인기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러시아 사회의 모든 계층에 관한 씁쓸한 진실을 토로한 〈연기 Dym〉(1867)와 러시아 혁명운동을 분석하고 커져가는 지배계급의 세력을 예언적으로 조명한 〈처녀지 Nov〉(1877)는 급진파의 반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19세기의 또다른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는 대체로 문학계에서 초연했다.

2편의 대작 〈전쟁과 평화 Voyna i mir〉(1865~69)·〈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5~77)는 그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가 1870년대말 급진적 그리스도교로 '회심'한 뒤에 그때까지의 자신의 예술을 부정했을 때조차 이 최고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톨스토이가 지닌 작가적 특성은 체험이라는 물리적 현실을 거의 영화적인 기교와 회화적 정확성으로 묘사함으로써 등장인물들을 강렬하게 조명하는 천재적인 능력에 있었다. 동시에 그는 많은 인물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심리적으로 분석해 그들의 도덕적 문제와 진리추구를 규명해낼 수 있었다.

〈크로이처 소나타 Kreytserova sonata〉(1891)·〈이반 일리치의 죽음 Smert Ivana Ilyicha〉(1886)·〈부활 Voskreseniye〉(1899) 등에서 발휘된 창조적 천재성은 많은 후기작품들의 오점이라 할 철학적·종교적 신념을 압도했다.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는 그의 뛰어난 소설 〈오블로모프 Oblomov〉(1859)에서 사실주의적 세부묘사를 거듭함으로써 게으른 주인공을 완벽하게 형상화했다.

또 다른 주요소설가 알렉세이 피셈스키는 〈천(千)의 혼 Tysyacha dush〉(1858)에서 지방관료의 출세와 파멸을 그렸다. 19세기의 위대한 풍자작가 미하일 살티코프는 급진주의 운동의 대들보로서 19세기 가장 탁월한 소설 중의 하나인 〈골로블료프 일가 Gospoda olovlyovy〉(1876)를 썼다. 주인공 이우두슈카('작은 유다'를 뜻함)는 게으르고 쓸모없는 술고래로 고골리가 창조한 가장 추악한 인물을 능가했다.

러시아 최초의 주요 희곡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그리보예도프의 운문희극 〈지혜의 슬픔 Gore ot uma〉(1822~24)이다.

고골리의 〈검찰관〉에 버금갈 만큼 러시아 희곡 발전에 질적·양적으로 크게 기여한 작가는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오스트로프스키로 〈파산 Bankrot〉(1850)·〈뇌우 Groza〉(1860) 등의 작품에서 모스크바 상인 계층의 비열한 상업윤리·무지·잔인성 등을 폭로하고 비난했다.

회고문학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특히 풍부하게 발견된다.

이 분야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작품은 세르게이 티모페예비치 악사코프의 〈가족 연대기 Semeynaya khronika〉(1856)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제1세대를 회고하는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지난 날과 생각 Byloye i dumy〉(1852~68)이다.

단편소설은 〈주술에 걸린 방랑자 Ocharovanny strannik〉(1873)의 저자 니콜라이 레스코프, 광기를 예리하게 분석한 〈붉은 꽃 Krasny tsvetok〉(1883)의 저자 프세볼로트 가르신 등 많은 작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러나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인정받은 작가는 희곡의 탁월한 혁신가이기도 한 안톤 체호프였다.

체호프는 정치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최초의 러시아 작가였다. 그의 단편 대부분은 의과대학생이었던 시기와 그뒤 젊은 개업의사로 활동하던 시기에 쓴 것이다.

그는 〈대초원 Step〉(1888)·〈지루한 이야기 Skuchnaya istoriya〉(1889) 등의 위대한 단편과 4대 희곡 〈갈매기 Chayka〉(1896)·〈바냐 아저씨 Dyadya Vanya〉(1897)·〈세자매 Tri sestry〉(1901)·〈벚꽃 동산 Vishnyovy sad〉(1903~04) 등에서 의사를 등장시켜 작중인물을 통해 인간의 약점과 괴로움을 전문적으로 진단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쌓은 의학수련을 반영했다.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쿠프린, 러시아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등은 모두 20세기초 산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작가는 노동자계급에 대해 동정과 연민을 토로한 막심 고리키였다. 가난과 학대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독학으로 공부한 그는 일찍부터 혁명활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낭만적인 산문시 〈바다제비의 노래 Pesnya o burevestnike〉(1901)는 "폭풍이다! 폭풍이 몰려온다!"라는 후렴으로 혁명운동의 힘찬 구호가 되었다.

첫번째 희곡이자 가장 인기를 얻은 〈밑바닥에서 Na dne〉(1902)로 고리키는 사색하는 낙오자들을 러시아 무대에 올려놓았다. 〈어머니 Mat〉(1906) 등의 초기 장편소설을 제외하면 그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자전적 3부작 〈유년시절 Detstvo〉(1913)·〈세상속으로 V lyudyakh〉(1915~16)·〈나의 대학들 Moi universitety〉(1923)이다.

20세기초의 러시아 문학

19세기말의 상징주의 운동에서 비롯된 시의 부활을 주도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솔로비요프였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세계는 추상적·형이상학적 실체를 나타내는 상징의 체계라는 믿음을 표현했다.

콘스탄틴 발몬트와 발레리 브류소프도 재능있는 시인이었지만 가장 위대한 시인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크였다. 혁명과 신을 묵시록적인 전망 속에서 결합시킨 그의 〈열둘 Dvenadtsat〉(1918)은 12명의 적군 병사가 그리스도의 인도로 신세계의 사도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밖의 주요 상징주의 시인으로는 뱌체슬라프 이바노비치 이바노프, 표도르 솔로구프, 안드레이 벨리 등이 있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전문지식을 현실개념에 도입했다. 그리스 학자인 이바노프는 그리스도와 디오니소스 일체설을 주장했고,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 벨리는 고골리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소설들로 자신의 철학을 나타냈다.

상징주의의 지배에 대한 반동으로 시인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구밀료프는 1911년에 장인기질과 표현의 명징성을 강조하는 아크메이즘이란 시 운동을 창시했다(→ 아크메이스트). 아크메이즘의 지도적 시인은 구밀료프의 부인 안나 아흐마토바였다. 그녀는 혁명 전에 감동적인 서정시로 폭넓은 인기를 누렸지만 소비에트 시기에는 탄압을 받았다.

1910년에는 벨리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흘레브니코프가 가장 혁명적인 시 운동을 창시했다. 미래파의 창립 선언은 1912년 〈공공 취향에 가하는 따귀 Poshchochina obshchestvennomu vkusu〉라는 제목으로 등장했는데, 여기에 서명한 예술가 가운데는 혁명 후 여러 운동의 '계관시인'적 존재가 된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코프스키도 있었다. 미래파는 인위적으로 보이는 기존의 문학형식을 버리고 일반대중의 언어를 채택함으로써 독자의 의식을 자극하려고 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처음에 소비에트 정권을 지지했으나 후기의 풍자극 〈빈대 Klop〉(1929)·〈목욕탕 Banya〉(1930) 등에서는 소비에트 관료제에 대한 환멸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정치적 환멸 속에서 1930년 자살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미래파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1917년에는 〈누이는 나의 삶 Sestra moya zhizn〉(1922)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를 출판했다.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 문학

1917년 혁명의 동력은 빛나는 문학실험을 꾀하게 함으로써 여러 문학 집단을 출현시켰다. 이들은 특히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위해 19세기 문학 유산을 폐기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이 시기의 소설은 내전의 잔혹함을 다룬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사크 엠마누일로비치 바벨의 카자크 이야기집 〈기병대 Konarmiya〉(1926)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파데예프의 〈궤멸 Razgrom〉(1927)은 모두 사실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신구세계의 갈등에 관심을 둔 작가들(트로츠키는 그들을 가리켜 혁명의 동반자에 불과하다고 했음) 중에는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페딘, 레오니드 막시모비치 레오노프, 유리 카를로비치 올례샤, 그리고 풍자가 발렌틴 페트로비치 카타예프 등이 있다.

러시아의 5개년계획 문학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창작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동반작가'와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공산당에 종속되어야한다는 좌익작가 사이의 논쟁이 매우 첨예하게 대립되어 당중앙위원회는 어떤 그룹의 활동도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자 당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연맹(RAPP) 및 공장건설과 농업집단화라는 주제에 전념하는 다른 좌익 그룹을 후원했다. 당중앙위원회는 1932년 RAPP를 해산시키고 모든 문학그룹을 단일한 동맹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1934년에는 전국적인 소비에트 작가동맹이 조직되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창작활동의 새로운 원칙으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문학은 '혁명적 발전'을 통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요구되었고 이는 사실상 당의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선전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 시기는 경제성장과 '인민 전선' 운동의 시기였으므로 당의 통제는 심하지 않았다.

미하일 숄로호프나 레오노프 같은 능력있는 작가들은 이 점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Tikhy Don〉(1928~40)의 주인공 멜레호프는 작품 전편에 일관해 비극적인 '백군' 카자크로 나타난다.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Kak zakalyalas stal〉(1932~34)에서 '새로운 소비에트형 인간'을 창조했고 대부분의 작가는 그의 모델을 답습했다. 당은 공산주의 실현에 바치는 영웅적 노력을 이상화하는 낙천적 주제와 '긍정적 주인공'을 요구했다.

미하일 알렉산드로 숄로호프(Mikhail Aleksandrovich Sholokhov)
미하일 알렉산드로 숄로호프(Mikhail Aleksandrovich Sholokhov)

문학비평가들은 당이 제시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고집하면서 서로를 모방했다. 작가들 중에는 스탈린주의자의 숙청으로 '사라진' 사람도 있었으며 정교한 시적 기교를 갖춘 안나 아흐마토바, 소비에트 최고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파스테르나크는 침묵을 강요당했다.

러시아의 전쟁문학과 주다노프시치나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문학의 질은 다소나마 개선되었다. 작가들은 모두 열렬한 애국심을 불태웠으며 그들 중 다수가 종군기자로 전선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전쟁 전의 문학 관료들이 선호했던 종합적인 다양성 대신 진정한 공포와 진정한 위험과 진정한 영웅들을 직접적으로 묘사했다.

그러한 체험을 통해 씌어진 가장 유명한 소설은 파데예프의 〈젊은 근위대 Molodaya gvardiya〉(1945)였다. 이 작품은 독일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도네츠 탄광에서 청년 공산당 연맹원이 벌이는 저항운동을 생생하고 영웅적인 필치로 묘사했다. 빅토르 네크라소프의 〈스탈린그라드의 참호 속에서 V okopakh Stalingrada〉(1947)는 한 병사의 시각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묘사했는데 다소 불필요한 사실주의 요소가 있지만 파데예프의 작품 못지 않게 효과적이었다. 전시 서정시 가운데는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 시모노프의 작품이 큰 인기를 누렸다. 현재까지 폭넓게 읽히는 작가로는 올가 베르골츠, 마르가리타 알리게르, 베라 미하일로브나 인베르 등이 있다. 알렉산드르 트리포노비치 트바르도프스키는 적군 사병이 겪는 인생의 부침을 그린 장기 베스트셀러인 운문소설 〈바실리 툐르킨 Vasily Tyorkin〉(1941~45)을 통해 독자에게 감동과 흥미를 주었다.

전시에 누린 상대적인 자유가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은 1946년 8월, 모든 예술은 반드시 정치적 영감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는 중앙위원회의 강령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그 강령은 스탈린의 문화정책 고문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주다노프가 작성한 것으로 이후 주다노프시치나(Zhdanovshchina)라는 말은 곧 소비에트의 문학 정책과 그 정책이 생산한 진부한 작품을 가리키게 되었다.

당의 정신과 국수적인 애국심은 모든 공식적 문학작품의 특징이 되었다. 일부 작가가 전쟁이라는 주제로 도피해 전쟁을 다룬 많은 소설들이 씌어졌다. 다른 작가들은 당의 요구에 부합하는 평화로운 재건을 주제로 글을 썼다. 심지어 가장 충성스러운 작가 파데예프까지 〈젊은 근위대〉가 당의 역할을 축소시켰다는 이유로 다시 써야 했다. 안나 아흐마토바와 풍자작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조시첸코의 작품은 공격대상으로 분류되어 '이념적 허무주의'와 '외국 것에 대한 노예근성'으로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스탈린 이후의 러시아 문학

1953년 이후는 두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인 1962~63년에는 문학이 형식에서나 소비에트 사회의 비판이라는 의미에서 모두 전보다 자유로워진 기간으로서 머뭇거리는 해빙의 조짐이 드문드문 일어났다. 그러나 이 때에도 파스테르나크가 오랜 침묵 끝에 쓴 〈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는 출판이 금지되었다. 파스테르나크는 원고를 서유럽으로 반출시켰고 결국 1957년 이탈리아에서 책이 출판되었다. 그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당했고 이 건을 계기로 러시아 문학은 지리적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대부분의 훌륭한 작품, 특히 정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작품은 러시아어로 씌어졌을망정 서유럽에서 출판되었다.

한때 정치범이었던 랴잔의 이름없는 교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1962년에 스탈린 강제수용소의 일과를 진솔하게 그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Odin den iz zhizni Ivana Denisovicha〉를 발표하자 당국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그뒤 당국과 작가동맹 관료들은 그러한 폭로를 방지하고 긍정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나타내는 낙천적 문학을 부활시키기 위해 새롭게 입지를 밝혔다. 〈암병동 Rakovy korpus〉(1968)·〈제1원 V kruge pervom〉(1968) 등의 스탈린 사회의 묘사를 전개시킨 솔제니친의 후기소설은 소련 내에서 출판이 금지되었다. 이 작품들은 타자기로 직접 쳐서 만든 사본, 즉 사미즈다트(samizdat)인 자가출판의 형태로 얼마 동안 유통되다 마침내 서유럽으로 반출·출판되었다.

솔제니친은 1974년에 국외로 추방당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해빙기의 작가동맹과 주요문예지들은 젊은 작가들의 등단을 도와주었다. 가장 유능한 신예 작가들은 얼마 후 문학형식과 소비에트 생활을 탐구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허용된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경계선을 넘었기 때문에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의 선례를 따라야만 했다.

그들 중 가장 탁월한 작가는 블라디미르 보이노비치,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블라디모프, 바실리 파블레비치 악쇼노프 등이었다. 보이노비치의 〈이반 촌킨 일등병의 삶과 기이한 모험 Zhizn i neobychaynye priklyucheniya soldata Ivana Chonkina〉(1975)은 순진하고 예민하며 나약한 주인공을 내세운 통렬한 풍자이며 블라디모프의 〈충실한 루슬란 Verny Ruslan〉은 수용소에 있는 개의 눈을 통해 스탈린 치하 러시아와 그 유산을 조명하고 있다.

악쇼노프의 가장 훌륭한 소설 〈화상 Ozhog〉(1980)은 1960년대의 젊은이들이 조국의 이전 시대를 재발견하고 현재를 재평가하면서 고통스럽게 성숙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부 훌륭한 산문작가들이 갈등과 논쟁이 한창인 중에서도 국내에서 계속 출판을 했다.

그중에서도 농촌작가들이 가장 뛰어났는데, 이들은 시골이라는 소우주를 통해 기술적 '진보'의 시대에 인간의 정신적 발전을 조명했다. 바실리 벨로프, 표도르 아브라모프, 발렌틴 라스푸틴이 이 작가군에 속한다. 바실리 슉신의 함축성있는 단편소설은 최근에 도시화된 농촌 주민의 해체된 의식을 반영했다. 반면에 유리 트리포노프는 섬세한 심리적 통찰력이 엿보이는 아주 모호한 산문을 통해 현대 소비에트 지식인의 윤리적 딜레마를 노출시켰다.

그의 작품은 때로 소련 역사를 바라보는 공적인 시각 전체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듯이 보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초에 시 낭송은 어느 정도 허용되던 정치적·문화적 주제에 관한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었고 종종 넓은 운동장을 꽉 메우는 공공행사가 되었다. 예브게니 예프투셴코의 웅변적인 시민시는 이런 행사에 적합했다. 당국이 시 낭송회에 점차 우려를 표명하자 테이프 녹음이 좀더 편리한 수단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민요, 수용소 노래, 가요 등을 배경으로 기타 반주를 곁들인 불라트 오쿠자바, 알렉산드르 갈리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등의 서정시를 감상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서정시인으로는 철학적 성향의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와 요세프 브로트스키(1972 망명), 실험적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그리고 부드럽고 회고적인 벨라 아흐마둘리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