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파

미래파

다른 표기 언어 Futurismo , 未來派

요약 20세기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
(영). Futurism.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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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래파 그림과 조각
  2. 미래파 문학
  3. 미래파 연극
  4. 미래파 음악

역동성과 혁명성을 강조한 이 운동의 가장 중요하고 뚜렷한 결과는 시각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졌으나 문학·연극·음악에서도 표현되었다. 1909년 이탈리아 시인이며 잡지 편집인인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가 프랑스 파리의 신문 〈피가로 Le Figaro〉에 미래파 선언을 기고한 데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가 만들어낸 미래파라는 용어는 미래와 예술의 새로운 발상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미래파 선언은 일부 건설적인 발상도 들어 있지만 "우리는 박물관·도서관을 파괴할 것이며 도덕주의, 여성다움, 모든 공리주의적 비겁함에 대항해서 싸울 것"이라는 등의 선언으로 과거를 부정하고 대중을 크게 경악시켰다. 정치분야에서 미래파는 사회적 불의가 없어지기를 바라기는 했으나 "우리는 세계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건강법인 전쟁을 찬양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초기 파시즘과 제휴했다.

미래파 그림과 조각

마리네티의 지원으로 화가 움베르토 보초니, 카를로 카라, 루이지 루솔로, 자코모 발라, 지노 세베리니는 1910년 그들 나름의 미래파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후에 미래파 양식이 될 작품들은 아직 만들고 있지 않았지만, '역동적인 감각(운동)'을 창출하고, 대상과 그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를 묘사하며, '그림의 감상자를 그림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들은 입체파 양식을 채택하고 나아가 형태적 특성의 분석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는 입체파 특유의 화풍을 뛰어넘어 현대 생활의 역동성에 함입된 정서적인 면을 강조했다.

입체파 미술이 정물화·초상화·인물화·풍경화를 선호하는 데 비해 미래파 미술은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기차, 경주용자전거, 무희들, 움직이는 동물 등과 같은 대상을 선호하면서 움직임을 찬양했다. 미래파 화가들은 대상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대상의 윤곽을 율동적으로 반복시키는 기법을 자주 썼다.

이 기법은 발라의 약간 익살스러운 그림 〈가죽끈에 매인 개의 역동성 Dynamism of a Dog on a Leash〉(1912, 버펄로 미술 아카데미)·〈신속:동작의 경로+역동적 장면 Swifts:Paths of Movement+Dynamic Sequences〉(1913, 뉴욕 현대미술관)에 잘 나타나 있다. 미래파는 입체파처럼 작품 속에서 동시성도 묘사하려고 했는데, 입체파가 분석된 대상의 여러 측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반면 미래파는 동시에 발생하는 주어진 환경 속의 모든 사물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 예로 보초니의 작품 〈거리의 소음이 집을 관통하다 Noise of the Street Penetrates the House〉(1911, 독일 하노버 니더작센 지방미술관)에서는 작품의 표제가 시사하듯 음향도 한몫을 해 시각뿐 아니라 청각에도 호소하게끔 되어 있다.

보초니는 조각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1912년 봄에는 조각에 대한 미래파 선언을 발표, 곧이어 조각 분야에서 활동을 시작해 매우 독창적인 작품 〈공간속에서의 병의 전개 Development of a Bottle in Space〉(1912, 뉴욕 시 현대미술관)·〈공간에서의 독특한 형태의 연속성 Unique Forms of Continuity in Space〉(1913, 뉴욕 시 현대미술관)을 발표했다.

안토니오 산텔리아는 1914년 건축에 관한 미래파 선언을 발표했다. 건축물은 비영구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신조는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여러 작품들, 예컨대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 대회 때 조각가 프레트 오토가 설계했던 텐트 구조로 된 건축물을 예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산텔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6년 전사해 그의 꿈이었던 〈솟아오르는 건물 soaring buildings〉은 실현되지 못했다.

미래파 미술가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보초니는 1916년에 죽었다. 그의 죽음은 미래파 미술가 집단의 규모가 팽창함으로써 초기의 대담성이 약화 된 것과 전쟁발발 사태와 겹쳐 중요한 역사적 원동력이었던 미래파 운동을 종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미래파 미술가들이 이룩한 성과들은 계속 이어져 다른 영역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미래파의 허무주의는 다다이즘의 성장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로버트, 소니아 들로네와 그밖의 오르피슴 입체파 미술가들도 러시아에서의 광선주의(光線主義)나 절대주의 미술가들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미래파의 영향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는 다비드와 블라디미르 부를리우크가 미래파를 창립했다. 이탈리아 태생의 미국 화가인 조지프 스텔라는 뉴욕시티에서 1920년대에 인상적인 형식의 미래파 미술을 실천했다.

미래파 문학

마리네티는 시인·소설가·극작가였으나 그는 미래파의 이론가이자 제창자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다. 1909년 최초의 포괄적인 미래파 선언을 발표한 후 그는 시, 연극, 건축, 음악, 라디오, 뮤지컬 공연뿐 아니라 비예술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미래파 선언문을 직접 쓰거나 작성에 관여했다.

그는 1905년 파리에서 '위대한 선동시인'들을 위해 잡지 〈포에지아 Poesia〉를 창간했는데, 이 시인들이 그후 1909년 미래파 시인들이 되었다. 그는 훗날 그들의 작품을 출간하기 위해 같은 이름으로 출판사를 설립했다. 마리네티는 미래파 이론을 보급하기 위해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지를 방문해 영국 소용돌이파(Vorticism) 창시자 윈덤 루이스나 입체파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에서는 마리네티의 방문을 계기로 이탈리아 미래파보다 한층 더 정치·사회적 색채를 띤 러시아 특유의 미래파가 뿌리를 내렸다. 마리네티는 러시아 미래파를 확립한 2명의 러시아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벨레미르 흘레브니코프 는 시인이며 신비주의자였고,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는 '혁명시인'이며 당대의 인기있는 대변인이었다(→ 마야코프스키, 흘레브니코프).

러시아인들은 이미 발표된 바 있는 이탈리아의 5월 미래파 선언에 호응하면서 푸슈킨·도스토예프스키·톨스토이 같은 작가들과 결별하고 시의 언어들을 거리의 언어로 끌어내릴 것을 주장하는 미래파 선언문을 1912년 12월 발표했다. 이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전적인 공감을 표시한 최초의 예술가 집단으로서 혁명 후의 문화계를 지배함과 동시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창조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소련 최초의 소비에트 교육인민위원이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의 비호를 받아 중요한 문화적 지위들을 부여받았다.

책이 출판되지도 읽히지도 않던 러시아 내전 때 미래파 예술가들은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작품을 카페나 회합에서 낭독하거나 연극으로 공연했으며 포스터를 제작했고 시사적인 선전문구식의 짧고 간단한 '선동시'를 짓기도 했다. 그들의 전위적 기법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앞서 있었고, 정치성향이 '동반자 작가'에 대해서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러시아의 미래파 운동은 마야코프스키가 죽은 1930년에는 그 영향력이 아주 약해졌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탈리아의 미래파 작가들은 1912년 자신들의 시선집을 처음 펴냈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탈리아의 참전을 섣부르게 지지하다 무솔리니와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 1919년부터 그들의 정치적 활동은 파시즘으로 연계되었고,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운동은 쇠퇴했다. 자신들의 작품에서 논리적 문장구조를 던져버린 미래파 작가들의 문학적 표어는 '말의 자유'(Parole in libertà)였다. 미래파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서는 에즈라 파운드, D. H. 로렌스, 조반니 파피니 등이 있다.

미래파 연극

1909년의 선언은 새롭고 다양한 연극을 요구하고 있었다. 1915년에 마리네티는 에밀리오 세티멜리와 함께 소극에서 비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극 형식을 비판하는 연극 분야의 미래파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대본이 아예 없거나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단 몇 분 간의 공연으로 끝나는 '종합연극' 신테시를 주창했다.

20년간의 사랑을 담은 한 작품에서는 '비올라'라는 단 한 마디의 대사만 나오는데, 이 말은 문맥상 의미가 없는 단어였다. 이 연극들은 배우가 아예 없거나 거의 없이 주로 도구만을 썼고, 무대 디자인과 무대의상을 강조하며,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려 했다. 마리네티는 무대기법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데 대해 경고를 하면서 미래파 연극이론을 영화, 라디오, 뮤지컬 공연에까지 확장했다.

미래파 연극의 영향력은 구성파를 매개로 하여 피란델로와 반스타니슬라프스키 경향의 러시아 감독인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트에게 가장 강하게 미쳤다.

미래파 음악

루이자 루솔로는 1910~12년의 3대 미래파 음악선언을 '소음의 예술'(L'arte de rumori)이라는 용어로 완성시켰다. 이 음악은 음표가 아닌 소리, 즉 단순히 흉내내는 소리뿐 아니라 일상 생활의 소음과 관련되는 소리에 바탕을 두자는 것이었다.

그는 폭발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소음을 '만들어내는' 악기(이 기계들은 제2차 세계대전중 파괴됨)를 계속 창안해냈다. 1921년 파리에서 루솔로의 연주회가 열렸는데, 그가 선보인 악기나 음악적 아이디어는 아르튀르 오네게르, 다리우스 미요, 모리스 라벨, 에드가르 바레즈 같은 음악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바레즈는 루솔로가 마지막 만든 악기인 루솔로포노를 소개했는데, 이 악기는 루솔로의 악기 중 초기장치의 효과들을 결합한 일종의 건반악기였다.

대부분의 미래파 음악작품들이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등장하게 될 전자음악과 구체음악(musique concrete)의 전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