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사실주의

다른 표기 언어 realism , 寫實主義

요약 사실주의는 상상력에 따른 이상화를 거부하고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자세히 관찰한다. 넓은 의미의 사실주의는 여러 문화의 다양한 예술적 경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주의가 하나의 미학적 계획으로서 의도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였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주창자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갖고 있는 인위성을 거부하고 중하류층의 서민들과 평범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꾸밈 없는 사람들의 삶과 모습, 그런 사람들의 문제와 관습 및 도덕관을 묘사하려고 애썼다.
사실주의는 19세기 초에 이루어진 독일의 반낭만주의 실증주의 철학, 전문적 언론의 등장, 사진술의 발달 등의 지적인 발전에 영향을 받았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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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실주의 회화
  2. 사실주의 문학
  3. 사실주의 연극
  4. 사실주의 영화

사실주의는 상상력에 따른 이상화를 거부하고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자세히 관찰한다. 넓은 의미의 사실주의는 여러 문화의 다양한 예술적 경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미술에서는, 검투사와 노파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사실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카라바조, 네덜란드의 풍속화가들, 호세 데 리베라와 디에고 벨라스케스 및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같은 스페인의 화가들, 프랑스의 르냉 형제 등을 비롯한 17세기 화가들의 작품은 그 접근 방식이 사실주의적이다.

18세기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디포, 헨리 필딩 및 토바이어스 스몰릿 등의 작품도 사실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주의가 하나의 미학적 계획으로서 의도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였다. 1850~80년에 나온 프랑스 소설과 그림에서는 사실주의가 주류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1826년 〈메르퀴르 프랑세 뒤 디즈뇌비엠 시에클 Mercure fran이미지ais du XIXe siècle〉지(誌)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여기에서는 과거의 예술적 업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현실생활이 제공하는 모델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바탕을 두는 예술가 원칙을 나타내기 위해 이 낱말을 사용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주창자들은 아카데미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갖고 있는 인위성을 거부하고 예술작품이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려면 동시대 의식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을 같이했다. 그들은 중하류층의 서민들과 평범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꾸밈 없는 사람들의 삶과 모습,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문제와 관습 및 도덕관을 묘사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그들은 그때까지 무시당했던 동시대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 즉 심적인 태도, 물리적 배경, 물질적 조건 등을 재현하는 작업에 진지하게 몰두했다.

사실주의는 19세기초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지적인 발전에 자극을 받았다. 즉 주로 평범한 사람을 예술 작품의 주제로 삼는 독일의 반낭만주의 운동, 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회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기록하는 전문적 언론의 등장,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 사진술의 발달 등이었다. 이런 모든 발전은 동시대의 삶과 사회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다.

사실주의 회화

사실주의 미학을 의식적으로 선언하고 실천한 최초의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그의 대작 〈화가의 작업실 The Studio〉(1854~55,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거절당하자, 그는 특별히 지은 가설 천막에 '사실주의, G.쿠르베'라는 이름을 달고 이 작품과 함께 여러 작품을 모아 전시했다. 쿠르베는 그의 그림을 통해 이상화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고, 평범하고 동시대적인 것에 예술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그는 일상생활상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적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앞서 1850~51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던 〈오르낭의 매장 Burial at Ornans〉(1849, 루브르 박물관)과 〈돌 깨는 사람들 Stone Breakers〉(1849, 이탈리아 밀라노, 개인 소장)은 검소한 농부와 노동자들을 꾸밈 없이 사실대로 묘사하여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쿠르베가 농부들을 미화시키지 않고 대담하고 거칠게 제시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미술계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주제와 표현 양식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닦아놓은 터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바르비종파는 1830년대 테오도르 루소,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장 프랑수아 밀레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그 지방의 특징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프랑스 바르비종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독특한 화풍과 서로 약간씩 다른 관심사를 갖고 있었지만 자연의 웅장하고 위풍당당한 측면보다 소박하고 평범한 측면을 강조하여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 그들은 문자 그대로 그림처럼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형태를 충실하게 묘사했다. 밀레는 〈키질하는 사람들 The Winnower〉(1848) 같은 작품에서 농부들을 위엄있고 장대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때까지 중요한 인물들을 묘사할 때만 사용했던 모습을 보잘것없는 서민에게도 적용한 최초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주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로 프랑스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가 있다.

그는 프랑스 사회와 정치를 풍자화한 전형적인 도시 화가였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노동계층의 남녀, 비열한 변호사, 사악한 정치가 들을 그림의 주제로 선택했다. 그 역시 쿠르베처럼 열렬한 민주주의자로 풍자 화가의 명분을 정치적 목적에 직접 활용했다. 도미에는 프랑스 사회의 부도덕성과 추악함을 힘찬 윤곽선, 대담하게 강조한 사실주의적 세부 묘사, 거의 조각 같은 형태 처리 등의 기법을 사용하여 비판했다.

미술에 있어서 사실주의는 프랑스 이외에 19세기 미국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윈슬로 호머의 바다를 주제로 한 힘차고 표현력이 풍부한 그림들, 토머스 에이킨스의 초상화와 뱃놀이 광경 등은 당시의 삶을 솔직하고 냉정하며 정확하게 관찰한 그림들이다.

사실주의란 20세기 미술의 뚜렷한 흐름의 하나로서 일상생활에 대해 좀더 정직하고 예리하며 대상을 이상화시키지 않는 시각을 제시하고자 하는 미술가들의 욕망과, 이 미술을 사회·정치 비판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8인회'(The Eight)라 불리는 미국 화가들은 도시생활의 어두운 면을 신문 기자처럼 신랄하게 묘사한 풍경화를 그렸고, 한편 독일의 미술운동인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의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의 냉소적인 사고방식과 환멸을 사실주의 양식으로 표현했다.

또한 사회사실주의라 부르는 대공황기의 미술 운동도 그당시 미국 사회의 불공평과 해악을 가혹하고 노골적인 사실주의로 묘사했다. 1930년대초부터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후원을 받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삶을 충실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실주의와 거의 관계가 없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직함'이란 국가의 이데올로기 및 선전의 필요성과 일치해야 했고, 용감하고 강인한 노동자와 기술자들의 초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대개 대상을 자연주의적으로 이상화하는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용했다.

이런 그림에 묘사된 노동자와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영웅적인 적극성을 보여주는 대신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부족하다.

한국에서 사실주의는 통칭 '구상'이라는 용어와 동일시되어왔다. 이는 서구의 아카데미 사실화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유입되어 미술교육의 근간을 이룸으로써 사실상 구상적인 미술 전체가 이러한 아카데미 사실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카데미 사실화란, 사실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면서 시민계층의 삶을 인상 깊게 묘사하고 찬미하는 방식으로 생겨났던 서구 사실주의 미술이 19세기 중·후반에 들어와 보다 아카데미적이며 관습적·상업적인 '부르주아 사실주의'로 변화해간 것을 말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미 관례화된 주제(풍경·정물·누드·인물) 시각에 대한 기법적인 혹은 감각적인 변용에 그쳤고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한국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인상파의 한 갈래인 양식과 혼재되어 형성되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는 묘사중심의 회화를 형성했지만 기본적으로 피상적 수준에서의 현실재현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서구의 아카데미즘적인 사실주의 화풍을 직접적으로 들여온 화가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리에서 유학했던 이종우였으며 이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우리의 아카데미즘의 한 양식으로 굳어졌다. 주요작가로는 이종우·김인승·심형구·김창락 등이 있다.

사실주의 문학

문학에서는 소설가인 오노레 드 발자크〈인간희극 La comédie humaine〉에서 프랑스 사회 전체를 백과사전처럼 자세히 묘사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의 선구자로서 지적된다.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그러나 문학에서 의식적으로 사실주의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 것은 1850년대에 와서였고, 그후 사실주의 문학은 화가인 쿠르베의 미학적 입장에서 영감을 얻었다. 쿠르베의 화풍을 널리 소개한 프랑스의 언론인 샹플뢰리는 〈사실주의 Le Réalisme〉(1857)에서 쿠르베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했다. 샹플뢰리는 비평문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비범한 인물보다는 평범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57년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장편소설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이 출판되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불행한 중산층 가정주부의 심리 변화를 낱낱이 검토하고 부르주아의 정신적 경향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은 사실주의 문학의 걸작이며 유럽에 사실주의 운동을 뿌리 내리게 한 작품이기도 했다. 루이 필리프 시대 프랑스의 거대한 전경을 제시한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L'Éducation sentimentale〉(1870)은 또 하나의 주요한 사실주의 작품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
감정교육(L'Éducation sentimentale)
감정교육(L'Éducation sentimentale)

공쿠르와 에드몽 공쿠르 형제도 중요한 사실주의 작가였다. 그들은 대표작인 〈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1864)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사회 및 직업 환경을 다루었고, 상류층과 하류층의 사회적 관계를 솔직하게 묘사했다.

이러한 사실주의 문학가들의 정신은 1860~70년대 유럽 문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초연함과 객관성, 정확한 관찰을 강조하고, 사회환경과 관습을 명쾌하면서도 절도있게 비판하며, 도덕적 판단 밑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는 사실주의는 소설 형식이 한창 발전하는 동안 근대소설의 구조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영국의 찰스 디킨스와 앤서니 트롤로프 및 조지 엘리엇, 러시아의 이반 투르게네프와 레프 톨스토이 및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미국의 윌리엄 딘 하웰스, 그리고 독일의 고트프리트 켈러와 초기의 토마스 만 등은 모두 자신의 소설에 사실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였다.

문학에서 사실주의가 낳은 중요한 결과는 자연주의였다. 자연주의는 현실을 의도적으로 고르지 않고 훨씬 더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19세기말 20세기초의 문학운동이었다. 자연주의의 주도적 인물로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있다.

한국에서 사실주의 문학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신소설이 등장한 1900년대 중반 이후로 볼 수 있다.

물론 그전에 〈허생전〉·〈양반전〉 등 박지원의 한문소설과 〈춘향전〉 등의 판소리문학에서도 사실주의 경향을 찾아볼 수 있으나, 이 작품들의 근대 지향성과 사실주의 경향은 지극히 부분적인 데 그쳐 진정한 의미의 근대 사실주의 문학으로 보기는 어렵다. 신소설 가운데 특히 이인직과 이해조의 초기 신소설은 봉건체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 변혁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는 가운데 당대의 현실을 충실하게 그려냈을 뿐 아니라, 인물의 개성적 성격화에도 상당한 진전을 거둠으로써 근대 사실주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계몽주의적 문학관의 압도적 영향으로 인해 신소설은 중세문학의 관념성과 추상성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신소설의 통속화가 급속히 진행되자 초기 신소설의 진보적 전통을 새로이 계승하려는 노력이 이광수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은 인물의 개성적 성격화, 언문일치제의 수립, 구성의 치밀성, 관념성 극복 등에 있어 신소설보다 한 걸음 나아간 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무정〉은 일면적이고 허구적인 근대주의와 비현실적 낙관주의로 인해 당대 현실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신소설의 사실주의적 성취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의 사실주의 문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특히 염상섭의 〈만세전〉은 평범한 일본 유학생이 귀국 후 다양한 사건을 겪으면서 민족의 현실을 자각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식민지조선의 여러 모습을 냉철하고 꼼꼼하게 그려냈다. 또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등도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비판적으로 폭로하여 사실주의 문학의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의 문학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또는 추상적 휴머니즘에 머물러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데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적 생산관계와 계급대립의 측면에서 현실을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1923년을 전후하여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신경향파'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최서해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당시 민중의 극한적 궁핍과 지주와 소작인의 계급대립을 다루었다. 한설야의 〈황혼〉, 채만식의 〈태평천하〉, 이태준의 〈농군〉 등도 이 시기의 중요한 사실주의 문학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사실주의 연극

연극에 있어서 사실주의는 희곡작품과 공연에서 실제 생활을 좀더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19세기 후반기의 일반적인 동향이었다. 많은 사실주의 극작가들 중에서도 특히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헨리크 입센과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와 막심 고리키 등은 잘 짜인 연극의 복잡하고 인위적인 줄거리 구성을 거부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동시대 사회의 갈등과 주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시적 언어와 과장된 말투 대신 일상적인 행동과 말처럼 보이는 연기와 대사를 사용했다. 사실주의는 과거의 연기에서 볼 수 있는 웅변조의 대사 전달과 지나친 기교를 피했고, 이런 표현양식 대신 자연스러운 동작·몸짓·대사를 채택했으며 일상적인 환경을 정확히 재현하는 무대 배경을 이용했다.

한국에 처음 사실주의 연극을 선보인 것은 1920년대인데, 이때 다양한 사조들이 짧은 기간에 한꺼번에 밀려들어왔기 때문에 사실주의는 낭만주의·표현주의 등과 한데 뒤섞여 특정한 표현양식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까지 연극계의 주도권을 잡았던 프롤레타리아 연극은 사실주의를 표현양식 중심이 아니라 세계관 중심으로 해석해낸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1930년대 연극계의 다른 한 줄기인 극예술연구회도 사실주의를 목표로 내세웠는데, 이 계열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유치진의 경우를 보면 사실주의를 순수한 표현양식의 문제로 다루면서 세계관의 측면에서는 허무주의, 낭만주의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주의 영화

20세기의 연극이나 문학과 마찬가지로 영화 예술의 주제와 구성은 19세기의 사실주의 전통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러나 영화가 현실과 허구의 중간쯤 되는 사실주의를 채택한 것은 영화의 본질로 미루어볼 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신사실주의라고 부르고 프랑스에서는 '시네마 베리테'(cinéma vérité)라고도 부르는 영화들은 배우가 아닌 사람들을 주역으로 기용하고 실제 기록영화의 일부 장면을 줄거리에 삽입함으로써 기록영화 같은 객관성을 얻으려고 애썼다(→ 네오리얼리즘 영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Open City〉·〈파이산 Paisan〉과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 The Bicycle Thief〉 등의 영화들이 이런 장르의 대표적인 보기이다.

한국 영화사에서 대체로 사실주의는 대중문화의 주된 흐름인 신파, 즉 한국적 멜로드라마와 결부되어 드러났다. 이 계열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는 나운규의 〈아리랑〉,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 김소동의 〈돈〉, 강대진의 〈마부〉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이러한 특성 때문에 '신파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6·25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피폐한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영화가 다수 등장하는데, 유현목의 〈오발탄〉으로 대표되는 이 작품군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에 비견될 만한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금자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