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쿠르 형제

공쿠르 형제

다른 표기 언어 Edmond and Jules Goncourt 동의어 에드몽 루이 앙투안 위오 드 공쿠르, Edmond Louis Antoine Huot de Goncourt, 쥘 알프레드 위오 드 공쿠르, Jules Alfred Huot de Goncourt
요약 테이블
출생 1822. 5. 26, 1830. 12. 17, 파리, 프랑스 낭시
사망 1870. 6. 20, 1896. 7. 16, 샹프로제, 오퇴유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형제작가.
정식 이름은 Edmond-Louis-Antoine Huot de Goncourt, Jules-Alfred Huot de Goncourt.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

형은 에드몽 드 공쿠르, 아우는 쥘 드 공쿠르이다.

같이 저작활동을 한 형제는 병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감수성의 소유자였으며 그러한 감수성으로 인해 자연주의 소설과 사회사·미술비평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일기 Journal〉와, 에드몽의 유언에 따라 매년 뛰어난 프랑스 문학가에게 주는 공쿠르상으로 특히 유명하다.

미망인인 어머니로부터 일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자, 귀중품보관소 점원으로 일하던 에드몽은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뒤 그들의 삶을 지배한 것은 미적 감각과 방종이었다. 아마추어 화가로서 처음에는 프랑스·알제리·스위스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가, 파리의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질서정연한 살림을 하고자 지나칠 정도로 노력했으나, 위장병·불면증·신경쇠약·소음 등으로 끊임없이 시달렸다.

모두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일기〉에 나오는 여인들은 모두 쥘의 연인들인데, 그의 치명적인 발작은 매독 때문인 듯하다.

형제는 그림에서 연극으로 관심을 바꿔, 1851년에 소설 〈18××년에 En 18〉를 출판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52년 신문기자 시절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성애시(性愛詩)를 기사에 은근히 인용하여 풍기문란죄로 체포당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854년부터 일련의 사회사를 출판하여 성공을 거두었는데, 사적인 편지와 신문기사·팜플렛, 심지어는 식사 메뉴나 옷 모양까지도 인용함으로써 프랑스 역사 중의 특정시대의 생활을 재현하려고 하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미술비평서 〈18세기 화가L'Art du dix-huitième siècle〉(1859~75)은 앙투안 와토를 위시한 당시 거장들의 명성을 되찾아주었다.

1860년대부터는 다양한 사회와 직업환경을 다루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상류·하류 계급을 솔직하게 그려내고 사회관계를 냉정하게 분석함으로써 에밀 졸라와 조지 무어 등에게 자연주의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었다. 가장 오랫동안 읽힌 소설 〈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1864)는 그들의 못생기고 착해보이는 하녀 로즈가 돈을 훔쳐서 밤의 유흥과 사내들의 관심을 끄는 데 쓰는 이중생활을 소재로 했으며 노동자계급의 삶을 다룬 프랑스 최초의 사실주의 소설로 손꼽힌다.

형제는 1851년부터 그 유명한〈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나 1870년 동생 쥘이 죽자 에드몽 혼자서 26년간 계속해서 기록해나갔다.

이 일기는 〈제르미니 라세르퇴〉의 배경이 되는 오두막집에서부터 그당시의 저명인사가 붐비는 만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평, 음담패설, 묘사적인 단편, 문학계의 소문, 간단한 인물묘사 등으로 가득 찬 〈일기〉는 흥미로운 자서전일 뿐 아니라 19세기 파리 사회사와 문학사의 금자탑이다. 1937년에는〈일기〉를 발췌한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1867년 이들 형제가 처음 생각해낸 공쿠르상은 1903년 공식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