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예술연구회

극예술연구회

다른 표기 언어 劇藝術硏究會 동의어 극연, 劇硏

요약 1931년 7월부터 1938년 3월까지 활동한 연극단체.

약칭 '극연'(劇硏)이라고도 함. 창립동인으로는 도쿄 유학생인 김진섭·서항석·유치진·이하윤·이헌구 등 10명이며, 이들은 연극계 선배인 윤백남과 홍해성도 참가시켰으나 윤백남은 모임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1934년에는 박용철·김광섭·이무영 등이 회원으로 들어와서 회원이 42명으로 늘었다. 창립 목적은 극예술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를 넓히고, 우리나라에 진정한 신극 문화를 뿌리내리려는 데 있었다.

연구부와 사업부로 나누어 운영했는데, 연구부는 희곡론·연출론 등을 배워 희곡을 창작하거나 번역하는 일을 했고, 사업부는 연기자를 배출하거나 그밖의 사업을 기획했다. 또한 직속 극단인 실험무대도 만들어 신인 연기자를 뽑아 교육시키기도 했다.

1932년 5월 창립공연으로 조선극장에서 홍해성이 연출한 고골리의 〈검찰관〉을 공연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당시 신문에서는 "토월회 공연 이후 10년 만에 보는 최대의 수확"이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그뒤 입센의 〈인형의 집〉, 체호프의 〈앵화원〉, 유치진의 〈토막〉·〈버드나무 선 동리(洞里)의 풍경〉 등을 공연했다.

주로 동인들이 번역하고, 홍해성과 유치진이 연출을 맡았다. 초기에는 번역극을 주로 공연했으나 차츰 동인들이 '조선감정에 맞지 않는' 외국극을 공연하는 것을 비판하고 나서자 창작극에 더 정열을 쏟았다.

그래서 이무영·이광래·이서향 등의 신인 극작가들을 배출하여 이무영의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 이광래의 〈촌선생〉 등 창작극을 주로 공연했다. 1934년에는 기관지 〈극예술〉을 창간하고 동인들의 연극에 관한 비평을 실었다. 일제 말기 검열이 심해져 동인들을 투옥·소환하는 사건이 잦아지자 1938년 3월 해산했다.

그뒤 서항석·유치진이 '극연좌'를 조직하고 이 단체의 맥을 이었다.→ 극연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