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심 고리키

막심 고리키

다른 표기 언어 고리키 , Maxim Gorki 동의어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 Aleksei Maksimovich Peshkov
요약 테이블
출생 1868. 3. 28(구력 3. 16), 러시아 니주니노브고로트
사망 1936. 6. 14
국적 러시아

요약 고리키의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이며, 도시빈민과 부랑자, 노동자의 삶과 의식을 다룬 이야기로 주목을 받은 러시아 사회주의 작가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어린시절과 각지를 떠돌며 온갖 막일로 목숨을 잇던 청년기를 보냈으며 정식 학교교육을 받은 기간도 몇 달에 불과해 거의 독학으로 글을 깨우쳤다. 러시아 사회 하층민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희곡과 소설을 발표하여 20세기 초 러시아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어린시절
  3. 초기작품
  4. 희곡과 소설
  5. 마르크스주의와 정치활동
  6. 망명과 혁명
  7. 마지막 10년
고리키(Maxim Gorki)
고리키(Maxim Gorki)

개요

부랑자와 사회에서 버림받는 사람들을 다룬 이야기로 관심을 끌기 시작하여, 유명한 〈밑바닥에서 Na dne〉(1903)를 비롯한 희곡과 소설을 썼다.

어린시절

고리키는 아스트라한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실내장식공이던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선박회사의 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재혼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외가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가난한 염색업자였는데 그를 몹시 학대했다. 그나마 어린 그를 보살펴준 사람은 외할머니뿐이었다.

그는 8세가 되던 해에 외할아버지의 명령으로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몇 달밖에 정식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다.

덕분에 그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이면을 잘 알게 되었다. 제화점 보조원, 성상화가(聖像畵家)의 심부름꾼, 볼가 강을 오르내리는 기선의 접시닦기 등 온갖 직업을 전전했는데, 그때 기선의 요리사가 그에게 책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곧 독서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되었다. 걸핏하면 고용주들에게 얻어맞고 굶주리고 헐벗으면서 그는 다른 러시아 작가들이 거의 알지 못했던 러시아 생활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되었다. 어린시절의 이 쓰라린 경험 때문에 '고리키'(쓰라림이라는 뜻)를 필명으로 삼았다.

10대 후반에는 카잔에서 제빵공과 부두노동자, 또는 야간경비원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인민주의자들을 만나 러시아 혁명사상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나, 나중에는 러시아 농민을 이상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그들의 사상을 비판했다. 그는 비참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권총으로 자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21세 때 카잔을 떠나 러시아 남부지방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막일을 하며 목숨을 이어갔다.

초기작품

조지아의 트빌리시에서 고리키는 짤막한 소설을 지방신문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작품은 〈마카르 추드라 Makar Chudra〉(1892)였고 뒤이어 터무니없이 낭만적인 전설과 우화들을 썼으나, 이것들은 단지 자료로서만 관심을 끌고 있을 뿐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일류잡지에 〈첼카슈 Chelkash〉(1895)를 발표한 뒤, 그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그 누구보다도 극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의 뛰어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인 〈첼카슈〉는 항구에서 화려한 절도행각을 벌이는 어떤 도둑의 이야기인데,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요소들이 적당히 섞여 있다.

이때부터 고리키는 러시아 사회의 하층민들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칭송받는 고리키의 '떠돌이 시기'이다. 그는 그때까지는 객관적으로만 묘사했던 떠돌이나 범죄자들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의 힘과 결단력에 공감을 나타냈다. 제빵공장의 형편없는 노동조건을 묘사하고 있는 〈26명의 남자와 한 소녀 Dvadtsat shest i odna〉(1899)는 여러 단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작품들이 너무나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갑자기 높아졌고, 톨스토이나 체호프와 거의 같은 수준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희곡과 소설

그뒤 발표된 희곡과 장편소설들은 초기의 단편들만큼 뛰어나지는 못했다.

첫번째 장편소설인 〈포마 고르데예프 Foma Gordeyev〉(1899)에서는 거만한 화물운반선 선주이며 신진 자본가인 이그나트 고르데예프의 힘센 육체와 굳은 의지를 찬양하고 있다. 이 인물은 그가 창조해낸 많은 주인공들처럼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연약하고 지적인 아들 포마 고르데예프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때부터 러시아 자본주의의 등장은 고리키가 소설에서 가장 관심있게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이 시기에 쓴 다른 장편소설들은 모두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서술에서 힘찬 표현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으며, 인생의 의미를 이야기하다가 자꾸만 빗나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Mat〉(1906)는 그의 장편소설 가운데 가장 성공하지 못한 작품이지만, 러시아 혁명을 다룬 고리키의 유일한 장편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고 있다. 영화감독인 프세볼로트 푸도프킨은 이 작품을 훌륭한 무성영화로 만들었고(1926),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희곡으로 각색했다(1930~31). 고리키는 희곡도 몇 편 썼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밑바닥에서〉이다.

고리키가 단편소설에서 자주 등장시킨 싸구려 여인숙을 무대로 하여 밑바닥 인생을 극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치활동

1899~1906년 고리키는 주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았으며 사회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1903년 이 당이 갈라졌을 때 볼셰비키파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볼셰비키 지도자인 레닌과는 자주 의견대립을 보였다.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던 고리키는 그 대부분을 레닌의 당에 기금으로 내놓아 당조직은 거의 그 돈으로 운영되었지만, 그가 정식으로 당원이 된 적은 없었다.

1901년 마르크스주의 잡지인 〈지즌 Zhizn〉('인생')은 〈바다제비의 노래 Pesnya o burevestnike〉라는 고리키의 짤막한 혁명시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다.

고리키는 체포되었지만, 폐결핵에 걸렸기 때문에 곧 풀려나서 크림으로 갔다. 1902년 그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치적 이유로 그 선출이 취소되자 체호프와 코롤렌코도 아카데미에서 사퇴했다. 고리키는 즈나니예(Znaniye:지식)라는 출판사를 세워 즈나니예파(派)가 출현하게 되었다.

엄격한 검열제도가 존재하던 당시 혁명가의 기질을 가지고 '경향적'인 작품을 쓰는 젊은 작가들에게 지면을 제공하는 것이 이 출판사의 목적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비평가와 독자들은 이 '경향적'이라는 용어를 대개 칭찬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고리키는 1905년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이듬해 체포되었지만, 당국은 이번에도 그를 곧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에서 항의가 빗발친 것도 석방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는 애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거의 추방되다시피 그곳을 떠났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뉴욕을 묘사한 단편 〈노란 악마의 도시 Gorod zholtogo dyavola〉(1906)에 뚜렷이 드러나 있듯이 미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망명과 혁명

고리키는 1906년에 러시아를 떠난 뒤 7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그는 주로 카프리 섬의 별장에서 지냈으며, 그곳은 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는 러시아인들에게 지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의 일반독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지식층으로부터 이전에 누렸던 인기는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지식인들이 고리키의 결점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리키는 여전히 레닌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혁명운동에 협력하고 있었지만, 장편소설 〈고백 Ispoved〉(1908)에 드러나 있듯이 '건신주의'(建神主義 bogostroitelstvo)라는 종교철학적 경향을 지지했기 때문에 혁명세력의 호의마저 다소 잃게 되었다.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를 이단자라고 비난했다. 고리키는 무소속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정치적으로 성가신 존재였지만,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강력한 영향력은 그런 사소한 결점을 충분히 메워낼 수 있었다.

그는 1913년에 러시아로 돌아왔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볼셰비키와 함께 러시아의 참전을 반대했다. 그는 1917년 11월 볼셰비키의 정권장악을 반대했고, 자신이 창간한 신문 〈노바야 지즌 Novaya zhizn〉을 통해 레닌의 독재를 계속해서 공격했다.

그러나 1918년 7월 레닌은 엄격한 검열을 지시하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1919년부터 고리키는 레닌 정부에 협력했고, 혁명 이후 초기 몇 년 동안 비참한 생활을 하는 동료작가들을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들에게 번역거리라도 주어서 생활비를 벌 수 있게 해준 적도 많았으며 예술작품의 보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지막 10년

1923년까지 10년 동안 그의 가장 위대한 걸작인 자전적 3부작 〈유년시대 Detstvo〉(1913~14)·〈세상 속으로 V lyudyakh〉(1915~16)·〈나의 대학들 Moi universitety〉(1923)이 발표되었다.

마지막권의 제목은 퍽 냉소적이다. 그가 다닌 유일한 대학은 인생대학이었고, 카잔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방대한 작품은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자서전 중의 하나이다. 고리키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만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초기에 보여주었던 지나치게 철학적인 경향을 버리고 다소 외향적인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강인한 힘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기 가족과 수많은 고용주들, 그리고 사소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의 파노라마를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소상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고리키 자신에 대한 얘기가 지극히 적어 자서전이라 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자살을 기도했던 일에 대해서도 고작 한두 줄밖에는 씌어 있지 않다. 이 책은 삶의 신비와 잔인함·미묘함에 대한 경탄으로 가득 차 있다. 고리키는 옛날처럼 삶을 이해하거나 해명하려고 애쓰지 않고 그저 묘사하는 데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메시지가 들어 있으며 공공연한 설교보다 넌지시 암시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는 이유없는 잔인함에 항의하고, 강인함과 자립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근면의 가치를 매우 수사학적인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1921~28년 이탈리아 소렌토의 별장에서 이 3부작을 완성했다. 독일과 그밖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나 그는 러시아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건강도 좋지 않았고,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8년 귀국하라는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의 60회 생일을 축하하는 공식행사에 참석했다. 생일축하 행사는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호화로웠다. 이듬해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그의 귀국과 스탈린 지배체제의 확립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으므로 고리키는 스탈린의 정치적 정통성을 떠받쳐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러시아 문단의 지도자로서 그의 명성은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여 1934년에 결성된 소비에트 작가동맹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학적 방법론을 확립하는 일에 이바지했는데, 소련의 모든 작가들은 이 방법론을 의무적으로 받아들여 사실상 노골적인 정치선전꾼이 되어야만 했다.

고리키는 작품활동을 계속했으나 이무렵에 쓴 소설들은 거의 모두 혁명 이전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소설 가운데 하나인 〈아르타모노프 일가의 사업 Delo Artamonovykh〉(1925)은 그가 계속 관심을 보였던 혁명 이전 러시아 자본주의의 성장과 몰락을 다루고 있다. 그는 또 〈예고르 불리초프와 그밖의 사람들 Yegor Bulychov i drugiye〉(1932)과 〈도스티가예프와 그밖의 사람들 Dostigayev i drugiye〉(1933)을 비롯하여 많은 희곡을 이때 썼다.

가장 널리 칭송받는 작품은 러시아 작가들에 대한 회고록인 〈톨스토이에 대한 회상 Vospominaniya o Tolstom〉(1919)과 〈작가들에 대하여 O pisatelyakh〉(1928)이다.

이 작품은 뛰어난 러시아 작가들을 연구할 때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성인전식(聖人傳式) 방법론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주 생생하게 톨스토이를 추억하고 있기 때문에 고리키의 걸작으로 꼽힌다. 고리키의 체호프 연구도 그에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그는 또 한편으로 화제의 사건 및 문제와 관련하여 스탈린주의의 잔인한 면을 미화하는 소책자를 쓰기도 했다.

그의 죽음에는 석연하지 않은 점이 있다.

1936년 병을 치료받다가 갑자기 죽었는데 이 죽음이 자연사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이것이 1938년 부하린 일당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검사는 고리키가 '우파와 트로츠키파 진영'의 반(反)소비에트 음모에 희생되었다고 주장했으나 피고인 가운데 전직 경찰서장이었던 야고다는 고리키를 죽이라는 명령을 했다고 자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