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북방전쟁

제2차 북방전쟁

다른 표기 언어 Second Northern War , 第二次北方戰爭 동의어 대북방전쟁, Great Northern War

요약 발트 해 지역에 대한 스웨덴의 패권에 러시아·덴마크-노르웨이·작센-폴란드 등이 도전함으로써 야기된 군사적 대결(1700~21).
Great Northern War라고도 함.

전쟁의 결과로 발트 해 지역에서 스웨덴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으며 러시아가 이 지역의 주요세력으로 부상했다.

16, 17세기 스웨덴이 발트 해 연안에서 영토를 팽창함에 따라 이웃한 국가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러시아로서는 스웨덴이 카렐리아·잉그리아·에스토니아 및 리보니아 등을 장악함으로써 발트 해로의 접근을 봉쇄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주(州)들, 특히 스코네를 스웨덴에 빼앗긴 것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또 스웨덴이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가문과 제휴함으로써 덴마크는 남부를 봉쇄당했고,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작령을 재흡수하는 것을 저지당했다. 독일의 군주들은 스웨덴이 신성 로마 제국에서 행사하고 있는 권력에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특히 브란덴부르크는 스웨덴이 차지하고 있던 포메라니아를 탐내고 있었다.

폴란드 공화국 내의 많은 세도가들은 여전히 스웨덴의 리보니아 지역을 폴란드 영토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97년 스웨덴의 카를 11세가 죽고 그의 후계자 카를 12세가 14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덴마크-노르웨이는 이를 반(反)스웨덴 동맹을 형성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반스웨덴 동맹(1698~99)이 결성되자 폴란드의 왕이자 작센 선제후인 아우구스트 2세는 1700년 2월 리보니아를 공격했으며, 덴마크-노르웨이의 프레데리크 4세는 같은 해 3월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으로 진군했다.

프레데리크 4세 (Frederik IV)
프레데리크 4세 (Frederik IV)

또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그해 10월 나르바를 포위했다(나르바 전투). 카를 12세는 덴마크에 대항해 전력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우선 대응해나갔다. 코펜하겐으로부터 수㎞ 떨어진 지점에 상륙한 카를 12세와 그의 군대는 프레데리크 4세가 반스웨덴 동맹에서 탈퇴하게 만들고 또한 트라벤탈 조약(1700. 8)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 조약은 기존의 상황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카를 12세는 러시아 군대와 맞섰는데 1700년 11월 30일 나르바에서 러시아 군대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폴란드와 작센측을 향해 공격의 방향을 전환한 카를 12세는 쿠를란트를 점령하고서 아우구스트 2세를 폴란드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아우구스트 2세를 폐위시키고자 마음먹은 카를 12세는 6년간이나 그와 맞서 싸움을 벌였으나 스웨덴군이 작센을 침공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아우구스트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나는 데 동의하고 러시아와 동맹관계를 단절했다(1706. 9. 알트란슈테트 조약).

카를 12세 (Karl XII)
카를 12세 (Karl XII)

한편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이러한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군대를 재정비하고서 발트 해 동부연안지역에 터전을 확립했다.

표트르 대제는 17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와 해군기지인 크론슈타트 항을 건설했다. 카를 12세가 1707년말 러시아를 재차 공격하자 표트르 대제는 이듬해 10월 레스나야에서 카를 12세의 지원군을 격파한 데 이어 1709년 7월 8일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의 주력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폴타바 전투). 투르크로 피신한 카를 12세는 투르크를 설득해 1710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유도했다.

폴타바 전투 (Battle of Poltava)
폴타바 전투 (Battle of Poltava)

그러나 투르크는 프루트 강에서 승리를 거둔 후 아조프 해(海)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다준 강화협상에 만족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중단했다. 이러한 가운데 폴타바 전투 이후 다시 형성된 반스웨덴 동맹은 1709년 가을 발트 해 연안을 따라 스웨덴 점유지들을 빼앗기 시작했다. 1713년 5월 홀슈타인 퇴닝에서 이들 동맹세력은 자체 영토 방어를 위해 1712년 소집된 스웨덴 군대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1714년 러시아는 한코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했으며 올란트 군도를 장악하고 스톡홀름을 위협했다. 1714년 11월 카를 12세는 스웨덴으로 귀환했다(오스만 제국).

이무렵 발트 해 연안을 따라 위치한 스웨덴 영토 대부분은 반스웨덴 동맹세력에 의해 장악되거나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하노버 선제후였던 영국의 조지 1세는 전쟁에서 계속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스웨덴측에게 영토를 요구했으나 카를 12세로부터 거절당하자 동맹에 합류했다. 카를 12세는 1715년 12월 스웨덴 본토 남부에 돌아왔으며 새로운 단계의 전쟁에 대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1717~18년 평화협상을 시작함과 동시에 새로운 공세를 학수고대하면서 병력을 6만 명으로 증강했다. 그는 1718년 9월 노르웨이 남동부를 침공했으나 11월 프레데릭스할트를 공략하던 중 전사했다.

카를 12세는 자식이 없었으며 따라서 왕위는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그의 남편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스웨덴의 프레드리크 1세가 됨)에게 넘어갔다.

프레드리크는 1719~21년 전쟁상황의 평화적 타결을 위해 여러 차례의 협상을 수행해나갔다. 스톡홀름 조약(1719~20)에 의해 스웨덴과 작센 및 폴란드는 전쟁 전의 현상유지 상태로 되돌아갔으며 덴마크는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정복지를 스웨덴에 반환했다. 스웨덴은 브레멘을 하노버에 양보했으며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영토의 일부와 슈테틴(슈체친)을 프로이센측에 넘겨주었다.

1721년 9월 10일 체결된 니슈타트 조약으로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이 종결되었으며 스웨덴은 잉그리아·에스토니아·리보니아 및 핀란드령 카렐리아의 일부 영토를 러시아에 양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