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2세

아우구스트 2세

다른 표기 언어 August II 동의어 강건왕 아우구스트, August Mocny,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Friedrich August I. von Sachsen
요약 테이블
출생 1670. 5. 12, 작센 드레스덴
사망 1733. 2. 1, 폴란드 바르샤바
국적 폴란드

요약 폴란드의 왕이자 작센 선제후(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영). Augustus Ⅱ. August Friedrich라고도 함. 별칭은 August Mocny.

그는 폴란드의 옛 영토인 포돌리아와 우크라이나를 되찾았지만 그가 통치할 때부터 폴란드는 유럽 강대국의 지위를 잃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아우구스트는 형 요한 게오르크 4세의 뒤를 이어 1694년 작센 선제후가 되었다.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죽은 뒤(1696), 아우구스트는 폴란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18명의 후보자에 들었다. 그가 폴란드 왕이 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루터파 교도인 작센 국민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의 아내인 호엔촐레른 왕가의 공주는 그를 떠났다.

폴란드는 1683년부터 '투르크 전쟁'을 시작했고 1695년부터는 아우구스트도 이따금 전투에 참가했는데, 그가 대관식(1697)을 올린 직후에 이 전쟁은 끝났다. 1699년에 맺어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폴란드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카미에니에츠(카메네츠) 및 드네프르 강 서쪽의 우크라이나와 더불어 포돌리아를 돌려받았다.

아우구스트는 당시 스웨덴이 갖고 있던 폴란드의 옛 영토인 리보니아를 되찾아 자신의 가문인 작센 가문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러시아 및 덴마크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 대항했다. 폴란드 의회는 국왕의 이같은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는 1700년에 리보니아를 침략했다. 그결과 폴란드 경제를 파멸로 몰고간 대북방전쟁(1700~21)이 일어났다.

1702년 7월 아우구스트의 군대는 크라쿠프 북동쪽에 있는 클리슈프에서 스웨덴 왕 카를 12세에게 패해 쫓겨났다. 1704년 7월에 폴란드의 한 파벌이 그를 폐위하자 아우구스트는 작센으로 도망쳤고 스웨덴은 1706년에 작센을 침략했다.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아우구스트에게 폴란드 왕위를 정식으로 포기하고 스웨덴 출신의 스타니수아프 레슈친스키를 폴란드 왕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알트란슈테트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1706. 9)(→ 알트란슈테트 조약).

러시아가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을 무찌르자 아우구스트는 이 조약을 무효로 선언하고,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지원을 얻어 그 자신을 폴란드 왕위에 다시 앉히도록 폴란드 의회에 강요했다(1710). 러시아가 아우구스트와 그에게 반대하는 폴란드 귀족들(타르노그루트 동맹) 사이의 국내 분쟁에 개입하고(1716~17) 1720년에 리보니아를 병합하자, 폴란드 왕은 러시아가 폴란드 문제에 대해 점점 더 큰 영향력을 갖는 것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는 폴란드 왕위를 세습제로 만들어 자신의 유일한 적자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결국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3세가 되었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많은 서자들을 위해 다른 영지도 확보하려고 애썼지만 둘 다 실패했으며 강력한 군주국을 세우겠다는 그의 소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 폴란드는 유럽의 주요강대국에서 러시아의 일개 보호국으로 전락했고, 그가 죽자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낭비가 심하고 호사 취미를 가진 그는 작센의 산업과 교역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드레스덴 시를 매우 아름답게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