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12세

카를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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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82. 6. 17, 스웨덴 스톡홀름
사망 1718. 11. 30, 노르웨이 프레드릭스할
국적 스웨덴

요약 스웨덴의 왕(1697~1718 재위).
(영). charles ⅩⅡ.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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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군사지도자 시절(1700~09)
  4. 투르크 주둔시절(1709~14)
  5. 스웨덴의 쇠퇴
  6. 카를 12세에 대한 평가

개요

대북방전쟁 때 18년 동안 나라를 지켰고 중요한 국내개혁을 추진한 절대군주로 러시아 침공(1707~09)을 단행했지만 파멸로 끝났다.

이로써 스웨덴 군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스웨덴은 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나 그는 계몽주의 시대 초기의 통치자로서 중요한 국내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

초기생애

스웨덴의 카를 11세와 덴마크의 울리카 엘레오노라 사이에서 태어난 2번째 아이이자 맏아들이며, 생존한 유일한 아들이었다.

어린시절은 행복하고 평안했지만, 1693년 어머니가 죽자 화목한 가정에 금이 갔다. 카를 11세는 주로 후계자인 카를 왕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서 위안을 얻었고, 그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시찰 여행과 모든 공식행사에 수행했다. 1697년 4월 부왕이 서거하자 카를 12세는 불과 15세의 어린 나이에 절대군주(그는 절대주의 시대에 태어난 처음이자 마지막 스웨덴의 왕이었음)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카를 11세는 섭정들을 정해놓았지만 그들은 모든 결정에서 새 국왕의 동의를 얻고 싶어했고, 결국 같은 해 11월에 소집된 스웨덴 의회는 카를 12세가 통치연령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카를 12세는 훌륭한 가정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왕으로서의 직무에 착실히 대비해왔다. 그는 보기 드문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고, 가족과 가정교사들의 종교적·도덕적 가르침에서 얻은 기준에 고집스러울 만큼 충실하다는 것을 거듭 입증했다.

카를과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5세의 딸인 외사촌 누이의 결혼 협상이 덴마크의 주도로 시작된 뒤, 카를의 조언자들은 덴마크와 다른 열강들의 협상 결과가 알려질 때까지 뒷전에 물러나 있었다.

이 협상은 사실상 덴마크와 작센 및 러시아의 제휴로 이어졌고, 이들이 1700년 봄에 스웨덴을 공격함으로써 대북방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 동맹국이 기대한 신속한 승리는 실현되지 않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스웨덴의 귀족들이 절대 군주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도 헛소문으로 밝혀졌다.

군사지도자 시절(1700~09)

초기 전투, 즉 덴마크로 하여금 전쟁에서 손을 떼게 만든 셸란 섬 기습전투(1700. 8), 러시아군을 스웨덴의 발트 해 연안지방에서 몰아낸 나르바 전투(1700. 11), 서(西)드비나 강을 건너(1701) 아우구스트 2세(작센 선제후이며 폴란드의 왕)의 군대를 지리멸렬하게 만든 전투는 모두 부왕의 신하였던 장군들이 계획하고 지휘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군사적 수완을 키우면서 여러 나라의 연합공격에 의한 희생자인 스웨덴을 위해 신념과 종교적 색채가 짙은 낙천주의 및 놀라운 용기로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데 값진 공헌을 했다.

군사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에서 카를의 책임은 점점 늘어나 1702년부터는 대다수 장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조정의 원로 대신들도 죽거나 병들어 은퇴했기 때문에 정치적 결정에도 점점 더 많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가 직접 내린 결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폴란드에서 아우구스트 2세와 싸우고, 분열된 폴란드(폴란드는 아우구스트의 지지자와 반대자로 나뉘어 있었음)를 통일하여 러시아와 결전을 벌일 때 동맹국 겸 원정기지로 삼겠다는 결정이었다.

아우구스트를 폴란드 왕위에서 몰아내고 스웨덴과 기꺼이 협력할 폴란드 태생의 왕을 그 자리에 앉히면 이 목적은 달성될 수 있었다. 이 계획이 성공하여 스타니수아프 레슈친스키가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었을 때(1706년 9월에 스웨덴군이 작센을 침략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트는 협상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음) 카를 12세는 이미 장군으로나 정치가로서 완전히 성숙해 있었다.

카를은 중부 유럽과 서유럽에서 스웨덴이 맡아야 할 역할에도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가 가톨릭교도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와 싸우는 슐레지엔의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한 것은, 스웨덴이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의 이행을 보증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유럽의 대동맹국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1660년부터 스웨덴 통치자와 정치가들은 적절한 상황에서 무력 중재를 통해 국위를 선양하고 영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이런 역할을 줄곧 갈망했다.

그러나 1706년 카를 12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러시아에 대해 스웨덴의 지위를 안전하게 보장하는 것이었다. 표트르 대제가 다스리는 러시아는 1703년부터 카를 12세가 폴란드 원정에 골몰하는 틈을 이용해 러시아군을 훈련하고, 스웨덴의 발트 해 동부 지방을 조금씩 점령하기 시작했다. 카를의 군대는 1707년 늦가을에 작센을 떠나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1708년 7월 호우오프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 때문에 모스크바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우크라이나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후 러시아군은 스웨덴군의 연락을 성공적으로 방해했고, 1709년 여름에 이르자 카를 12세는 러시아군과 싸우거나 아니면 다시 폴란드로 퇴각할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카를은 다리를 다쳐 직접 군대를 지휘할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택해 7월 8일(구력 6. 27, 스웨덴력 6. 28) 폴타바에 있는 러시아군의 요새를 공격했다.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3일 후 스웨덴군의 대부분은 페레볼로치나에서 러시아군에게 항복했다(→ 폴타바 전투). 그때 카를은 이미 투르크 영토로 가고 있었다. 거기에 가면 동맹자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투르크 주둔시절(1709~14)

투르크는 표트르 대제한테서 아조프를 되찾고 싶어했고, 이는 투르크가 카를 12세에게 협력하리라는 좋은 징조였다.

그러나 투르크가 러시아에 대해 4차례나 전쟁을 선언했는데도 스웨덴에서 오리라 기대했던 군대가 끝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웨덴 왕은 계획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는 투르크가 꾸미는 음모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 다시 폴란드 왕위에 오른 작센의 아우구스트에게 그를 넘기려고 하는 투르크의 음모를 피하기 위해 1713년 2월 벤데르(지금의 몰다비아 공화국 벤데리)에서 정식으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전염병 때문에 투르크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경이 폐쇄되고, 스페인 계승전쟁에서 프랑스와 맞서 싸우는 동맹국들은 스웨덴이 독일에 있는 기지를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카를 12세는 행동의 자유를 더욱 제한받았다. 왕이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 국내에서 사실상 국사를 처리하고 있던 스웨덴 자문회의는 덴마크의 위협에 대처하느라 다른 데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카를이 전비의 부담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자원과 효율성을 늘리기 위해 투르크에서 공표한 행정 및 재정 개혁안은 국내의 계획적인 지연 전술로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개혁안은 카를이 신분을 숨긴 채 합스부르크 제국과 독일 영토를 14일 동안 밤낮으로 달려 1714년 11월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로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시행되었다.

스웨덴의 쇠퇴

포메라이나에 온 카를은 스웨덴군을 되도록 오래 독일 땅에 주둔시키기 위해 1년이 넘도록 지연 전술을 폈다.

이렇게 함으로써 스웨덴군의 위신을 회복하고, 스웨덴 본토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막았으며 1714년 하노버와 프로이센의 가담으로 더욱 세력이 커진 동맹국을 분열시키기 위한 외교 공세를 준비할 시간을 벌려고 했다. 1715년 12월 카를이 독일의 슈트랄준트와 비스마르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프랑스와 맺은 원조협정, 영국 왕위에 오른 하노버 선제후의 지위를 위협하기 위해 재커바이트(스튜어트 왕가의 망명한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와 꾸민 음모, 적들과 벌인 개별 협상은 오히려 스웨덴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의 모든 협상, 특히 1718년 내내 올란드에서 러시아와 벌인 협상은 어느 정도는 시간을 벌기 위한 지연 전술이었다. 그해 가을까지 카를은 6만 명의 병력을 모았지만, 그가 세운 전략구상은 끝내 완전히 펼쳐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노르웨이를 침략한 초기에 벌어진 프레드리크스할(지금의 할덴) 포위공격에서 카를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카를은 요새로부터의 포화에 몸을 노출시켰고, 날아온 총알이 그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가 죽은 직후 아군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오늘날 입수된 증거는 카를 12세가 적의 총알에 맞아 죽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카를 12세에 대한 평가

카를 12세는 흔히 주장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단순하고 무식한 군인 왕이 아니었다. 그는 지적으로 다양한 일을 추구했다. 그는 항상 건축과 그림에 관심을 가졌고 당시의 스웨덴 시를 인용할 수 있었으며, 신학과 철학에 대해 논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정말로 좋아한 것은 수학과 과학이었다. 그는 새로운 행정에 점점 몰두하게 되었고, 그의 행정개혁안은 대부분 당시의 기준을 훨씬 앞서 있었다.

카를은 군사 문제에서는 철저하게 비밀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했고, 직속 부하한테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결정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는 전략적으로 유리한 전쟁터를 찾아내는 안목이 뛰어났다. 또 항상 전투를 직접 지휘할 것을 고집했는데, 이것은 조심스럽고 행동이 느린 스웨덴 농민들은 자신들의 왕이 전투의 위험을 함께 나누는 모습을 보아야만 비로소 열심히 싸우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신에 대해 책임을 굳게 믿었던 카를은 사람이 항상 운이 좋을 수는 없지만 명예는 항상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전쟁의 행운과 불운에서 배웠다고 했다. 그는 절대주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스웨덴의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권력에 대해 결코 환상을 품지는 않았다.

그는 후계자를 결정하라는 호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그들은 내가 살아 있는 지금도 나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내가 죽은 뒤에 어떻게 그들이 나에게 복종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