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11세

카를 11세

다른 표기 언어 Karl 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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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55. 11. 24, 스웨덴 스톡홀름
사망 1697. 4. 5, 스톡홀름
국적 스웨덴

요약 스웨덴의 왕(1660~97 재위).
(영). Charles ⅩⅠ.

고위 귀족 및 하층계급을 희생시켜 왕권을 확대했으며, 그가 확립한 절대군주제는 1718년 카를 12세가 죽은 뒤에야 끝났다. 카를 10세 구스타프와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사이의 외아들로, 불과 5세 때인 1660년에 부친의 뒤를 이어 스웨덴 왕이 되었다.

섭정단이 나라를 다스린 시대에는 고위 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해 양도된 왕실 영지의 소유권 회복을 방해했다. 카를은 1672년 성년이 되었지만 섭정단은 계속 대외정책을 통제했다. 그들은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 동맹을 맺고, 루이의 요청에 따라 스웨덴을 1672~78년의 네덜란드 전쟁에 끌어들였다. 1675년 스웨덴군이 페르벨린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군대에 패배한 뒤 카를은 군대와 행정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스웨덴의 패배에 용기를 얻은 덴마크는 스웨덴에게 빼앗긴 스코네 지방을 침공했다.

카를 11세가 1678년 덴마크군을 무찌른 결과, 룬드 조약(1679)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덴마크는 스코네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카를 11세와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5세의 누이인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결혼(1680)을 통해 두 나라는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가 발트 해에서 행사하고 있던 상업적 영향력에 공동으로 대항했다. 네덜란드 전쟁을 끝낸 네이메헨 조약(1678~79)으로 스웨덴은 독일에 갖고 있던 영토의 대부분을 계속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카를과 그의 새로운 고문들은 스웨덴을 외국 원조 조약에서 해방시키기로 결심했다.

1680년에 열린 의회는 양도된 왕실 영지의 소유권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카를 11세의 통치가 끝날 때쯤 왕실은 스웨덴과 핀란드에 있는 소유 재산을 전체 토지의 1% 미만에서 30% 이상으로 크게 늘렸다. 왕의 수입도 크게 늘었는데 늘어난 수입의 절반 이상은 발트 해 건너편에 있는 왕실 영지의 소유권을 되찾은 덕분이었다. 국가 수입이 늘어나자 2만 5,000명의 용병에게 지불할 예산을 고정적으로 확립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학교를 관리하는 민간 공무원 제도와 4만 명의 국민군, 덴마크 해군과 경쟁할 새로운 해군도 창설할 수 있게 되었다. 1693년 카를은 자신의 개혁을 시행하고 보호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한을 의회에서 부여받았다.

외교 문제에서 카를과 그의 주요고문들은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네덜란드, 영국의 세력균형이 스웨덴의 국익을 위해서는 최상의 보호막이라고 생각했다. 스웨덴은 루이 14세에 대항해 네덜란드와 조약을 맺었다(1681). 카를은 또한 1688년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를 통해 시작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사이의 개인적인 연합에 위협을 느꼈고, 대동맹 전쟁(1689~97)에서 사실상의 중립을 유지했다. 전쟁 당시 덴마크와 스웨덴은 자국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협력했지만, 카를은 1689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대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의 소유권 주장을 지지해 하마터면 덴마크와 전쟁을 벌일 뻔했다.

카를은 죽기 직전에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가문과 스웨덴 왕실의 유대가 지속되도록 조처했고,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대동맹 전쟁을 끝낸 레이스웨이크 조약(1697)에서 중요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