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누르하치

다른 표기 언어 Nurhachi , 奴爾哈齊 동의어 천명제, 天命帝,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
요약 테이블
출생 1559, 만주
사망 1626. 9. 30
국적 청(淸), 중국

요약 만주족의 한 부족인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으로 나라를 세운 창업자 가운데 한 사람.
Nurhachu라고도 씀.

누르하치(奴爾哈齊)
누르하치(奴爾哈齊)

공식 이름은 쿤둘런 칸, 연호는 천명(天命), 여직(女直:여진의 명대 호칭), 이름은 게렌구룬베 우지레 겡기옌(모든 나라에 은총을 내리는 영명한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처음에는 무황제(武皇帝), 나중에는 고황제(高皇帝). 1618년 누르하치가 중국 본토를 처음 공격했고, 그의 아들인 도르곤 때에 가서 중국을 복속시켰다.

여진족은 중국 변방에 살던 부족 가운데 하나로, 퉁구스계(系) 민족이다.

이들이 살던 변방지역은 통상 중국 황실에서 직접 관장했다. 여진족은 일찍이 금(金:1122~1234)을 세운 적이 있고 금은 몽골족에 의해서 복속되기까지 중국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여진족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명(明)제국의 전통을 따랐다.

누르하치의 부족은 만주의 다섯 여진족 가운데 하나인 건주여진으로 중국의 동쪽 국경지역과 압록강 이북인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지역에서 살았다.

나머지 하다[哈達]·후이파[輝發]·우라[烏拉]·예헤 여진은 만주 중앙 삼림지역과 스텝 지역에서 훨씬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다섯 부족들은 국경문제로 전쟁과 화해를 거듭했고 때로는 통혼(通婚)도 했다. 이러한 배경을 무대로 하여 누르하치는 아주 작은 규모로 시작하여 점차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1559년에 태어나 20대 초반에 지도자가 되었다.

그전에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명조가 지원하는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당시 은 변경지역에 사는 여러 부족들을 서로 싸우게 하여 이들 부족들이 위협적인 세력이 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사하자 누르하치는 자신의 부족이 쇠퇴해가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1586년에 자신의 부족 가운데 라이벌이며 명의 지원을 받고 있던 니칸 와일란을 패퇴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다른 여진족들을 하나하나 굴복시켜 나갔다.

다른 여진족들이 명과 연합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 명이 장악하고 있던 만주 북부지역을 침공했고, 이어 보다 더 야심에 찬 군사적·정치적 모험을 감행하여, 마침내 명으로 쳐들어갔다.

다른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누르하치는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처음에 이 나라는 다른 여진부족이나 명조와 불분명한 정치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조직이 확대되면서 이 나라의 잠재력은 점점 더 커져갔다. 1599년 누르하치의 명(命)을 받아 몽골어와 중국어에 정통한 만주귀족이자 학자인 에르데니가 만주 문자를 만들어서 만주 민족문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해에 여진족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하타국이 복속되어 만주국으로 편입되었다. 1601년 누르하치는 청나라 군대조직의 근간이 되는 8기제도(八旗制度)를 만들었다. 8기는 근본적으로는 군대조직이었으나, 만주족을 위한 행정 및 과세의 단위이기도 했다.

8기의 사령관과 행정관은 누르하치가 직접 임명했고, 이로써 여진족은 행정조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세 아들과 조카에게 4기(四旗)의 책임자 자리를 맡겨 그 자신의 권위를 그대로 보존하는 가운데 가문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1615년 당초부터 있던 '4기'에 4기가 더 보태어져 '8기'가 되었고, 이 추가된 4기도 그가 신임하는 인척들에게 책임자 자리를 맡겼다.

작은 부족이 이같이 독창적인 군사관료조직으로 재편된 것은 만주와 기타 지역에 있는 중국 변경지의 군사·정치 구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는 초석이 되었다.

세력확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누르하치는 만주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이 지역의 채광독점권과 진주, 모피, 그리고 이 지역과 조선에서 나는 인삼 등에 대한 무역독점권을 통해 엄청난 재력을 축적했다. 심지어 인삼 보존방법을 고안하여 많은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이당시 베이징에 보내는 조공사절은 조공과 무역 업무를 겸했는데, 이들을 통해 많은 은(銀)을 축적하기도 했다.

1618년 누르하치는 명에 대한 첫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그당시 그는 이미 '후이파'와 '우라'의 두 여진부족을 복속시켜 그의 세력권 안에 넣었고, 최대의 강적인 예헤 부족과 그 부족의 지원세력인 명과의 대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명의 변경도시인 푸순[撫順]은 그 성을 지키던 이영방(李永芳)이 만주 쪽으로 귀순하자 손쉽게 함락되었다. 명의 고위관리가 이같이 귀순해온 것은 만주족의 제도 안에서 자신이 가진 중국적인 문화·정치의 경험을 살려가며 만주족 통치자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 관리의 뒤를 이어 수많은 중국관리들이 투항하거나 포로가 되어, 중국식 제도를 많이 답습한 만주족 정부 밑에서 일했다.

베이징에 있는 명조의 황제와 누르하치의 관계는 처음에는 분명치 않은 것이었다.

누르하치 자신도 조공사절단의 우두머리로 베이징을 여러 번 방문했다. '4기'가 창설된 1601년, 그는 새로운 왕조를 창업한다는 뜻이 분명치 않은 칙령을 발표했다. 푸순 성을 침공하기 바로 전인 1616년, 누르하치는 천명(天命)이라는 연호를 사용, 자신을 '칸'[汗:황제]으로 선언하고 자신의 왕조를 금(金:또는 後金)으로 이름을 정하여 12세기의 여진왕조를 계승했음을 선포했다. 1618년 누르하치는 여러 여진부족들이 자신의 부족에 대항하도록 교사한 명의 정책에 대한 책임과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게 한 책임 등을 문책하는 7대한(七大恨)을 선언하고 명과의 국교를 단절한 뒤 국경을 돌파하여 푸순 성을 침공했다.

누르하치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처음에는 라오양[遼陽]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마침내 1625년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길목을 수비하는 명의 군대를 패퇴시키려고 했다. 1626년 2월 그는 영원성(寧遠城)을 침공했다가 처음으로 패했고, 그해 9월 30일 전투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죽었다.

누르하치는 자신이 일으킨 군사적·정치적 대업을 완수하지는 못했으나 그가 세운 기반 위에서 아들들이 그 대업을 완수했다.

한 작은 부족의 족장에서 황제로까지 등극했던 누르하치는 3명의 정비(正妃)와 많은 측실을 두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다른 여진 족장가문에서 취해 온 것이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16명의 아들 가운데 아바하이(?~1643)가 그의 뒤를 이어 칸이 되었다. 그리고 만주족 초기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탁월했던 도르곤 왕자가 부왕(副王)이 되어 중국 정복을 완결하여 1644년 베이징에 만주족 왕조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