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여진

다른 표기 언어 女眞

요약 발해의 멸망 뒤 여진은 부족단위로 생활하며 고려와 거란을 상국으로 섬겼다. 11세기말 여진은 고려와 군사적으로 충돌했다. 고려는 함경도지역의 여진을 토벌하고 9성을 쌓아 고려에 편입하려 했으나 여진의 절대적 복속을 전제로 하여 9성을 돌려주었다. 여진은 모든 세력을 통일하고 1115년 금을 세웠다. 금은 거란과 북송을 무너뜨린 뒤 고려에 신하관계를 요구했다. 금은 1234년 몽골족에게 멸망했다. 여진은 다시 부족단위의 생활로 돌아갔고, 명이 여진을 통치했다. 한편 조선은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여진정벌에 나섰다. 여진은 명이 군대를 조선에 파병한 틈을 타 다시 통합을 시도했다. 1616년 누르하치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후금을 세우고 1627년 조선을 제압했다. 1636년 여진은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했다.

여진(餘震)
여진(餘震)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물길(勿吉), 수·당시대의 말갈(靺鞨)과 같은 계통이다. 여진은 10세기 이래 만주지역의 거란·발해인 이외의 말갈 제부(諸部), 특히 동부지역의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한 여러 계통의 토착종족에게 붙여진 명칭이다.

10세기초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契丹 : 遼)과 고려(高麗)·북송(北宋)의 상호 긴장관계로 인하여 한반도 동북부 및 동부 만주지역이 힘의 공백지대가 되자, 말갈족 중심의 토착인들은 부락별로 나뉘어 자치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연해주 남부에서 두만강유역 및 함경북도 일대에 걸쳐 거주하던 종족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흑수여진(黑水女眞)·동여진(東女眞)·생여진(生女眞) 등으로 불렀고, 압록강 중상류지역과 지린 성[吉林省] 일대에 거주하던 종족은 서여진(西女眞) 또는 숙여진(熟女眞)이라 칭했다.

송이나 거란도 이들에 대하여 여진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여진은 고려와 거란을 상국(上國)으로 섬기면서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과 문화적 혜택의 증대를 꾀했다. 고려는 태조 이래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국경지역의 여진에게는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는 등 여진에 대한 회유와 포섭에 힘쓰는 한편, 배후에서 거란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여진은 고려에 활·말·모피 등을 가져와 의류·식량·농기구·그릇 등의 생필품과 바꾸어갔다.

그러나 거란세력이 쇠퇴하는 11세기말에 이르러 북만주 하얼빈[哈爾濱] 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영가(盈歌)를 중심으로 급속한 통합을 이루기 시작했다. 영가의 조카 우야소[烏雅束] 때 이르러서는 만주 동부와 한반도 동북부의 여진이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하여,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함흥 일대의 여진에게까지 세력을 뻗어나가서 고려와 군사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야인정벌). 고려는 초기의 전투에서 2차례 패하자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을 장수로 하는 17만 군을 동원하여 함경도지역의 여진을 토벌하고, 이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아 남쪽 주민의 이주·정착을 추진하는 등 고려영토로 편입하려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한 여진의 끈질긴 반격과 애원, 이들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인적·물적 부담의 가중 등으로 여진의 절대적 복속을 전제로 하여 9성을 돌려주었다. 우야소의 뒤를 이은 아구다[阿骨打] 때 이르러 여진은 모든 세력의 통일을 이루고 1115년 (金)을 세우는 등 그 세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금은 고려에 형제관계를 강요해 형제의 맹약을 맺은 뒤, 1125년에는 거란을 멸망시키고 이어 북송을 무너뜨려 북중국의 패자로 군림한 뒤 다시 고려에 대해 신하관계를 요구했다.

고려는 금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전통적인 북진정책을 포기했다.

이후 금은 1234년 몽골 고원에서 일어난 몽골족에게 멸망했다. 금이 망하자 여진족은 다시 부족단위의 생활로 돌아가 원(元)·명(明) 등 중국왕조 및 고려·조선 등 주변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명은 쑹화 강 유역의 여진을 해서여직(海西女直), 파저 강(婆猪江 : 佟佳江)과 훈장 강[渾江] 유역의 여진을 건주여직(建州女直),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의 여진을 야인여직(野人女直)이라고 부르고 부족별로 나누어 통치했다.

조선은 여진을 '야인'(野人)으로도 칭하며 회유하기도 하고 정벌하기도 했다. 그리고 귀화인에게는 관직·토지·주택을 주어 회유하는 한편, 함경도 경성과 경원 등지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조공무역과 국경무역을 허락하고, 한양에는 북평관(北平館)을 설치하여 각 부족의 사신들이 머무를 수 있게 했다. 여진은 말·모피 등을 바치고 식량·농기구·종이·의복재료 등을 받아갔다. 그러나 복속하지 않는 여진부락은 토벌하고 그 땅에는 민호(民戶)를 이주시켜 영토로 편입했다. 15세기말까지 간간이 조선의 북쪽 변경을 침입하던 여진은 16세기말에 이르러 임진왜란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휘말리고, 명이 만주지역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시킨 틈을 타 다시 건주여진을 중심으로 한 통합을 시도했다.

1616년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후금(後金)을 세우고 1627년에는 조선을 제압했다. 1636년에는 명을 멸망시키고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 청의 건국 후 여진은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만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