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Chin Dynasty ,

요약 퉁구스계 종족인 여진족(女眞族)이 건국한 중국의 왕조(1115~1234).
(병). Jin. (웨). Chin Dynasty.

금(Chin Dynasty)
금(Chin Dynasty)

창건자는 생여진(生女眞)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이며, 중앙아시아와 중국 북부를 지배했다.

여진족은 원래 쑹화 강[松花江], 무단 강[牧丹江],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과 동만주해안 일대에 살던 종족으로, 숙신(肅愼)·읍루(把婁)·물길(勿吉) 등으로 불리다가 수(隋)나라 이후 말갈(靺鞨)이라 불리었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흑수(黑水)·속말(粟末) 등 7개 부족으로 나뉘어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고구려가 망하자 대체로 발해에 예속되었으며, 일부는 신라에 편입되기도 했다. 10세기초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자 말갈족의 중심세력이던 흑수말갈이 거란에 속하면서 여진이라 불렸다.

여진족은 크게 만주의 지린 성[吉林省] 동북지방에 흩어져 사는 생여진과 그 남서쪽의 숙여진(熟女眞)으로 나뉜다. 전자는 대개 거란의 지배권 밖에서 부락생활을 했고, 후자는 거란에 속하였다. 여진은 문화적으로 선진국가였던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그를 통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만족시켰다.

마필(馬匹)이나 모피(毛皮) 등을 가져오고 그 대신 식량·포목·농구·무기 등을 가져갔다. 그들 중에는 원거주지에 살다가 고려에 투화(投化)하여 오는 자도 많았다. 고려는 이들에게 가옥과 토지를 주어 생활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북만주 완옌부의 추장 우야소[烏雅束]가 여진족 전체를 통일하면서 정세는 변했다. 1104년(숙종 9) 완옌부의 여진은 고려에 복속하고 있는 여진부락을 공격하여 함흥(咸興)을 아우르고, 도망가는 자를 쫓아 정주관(定州關:定平)에 이르렀다. 고려는 임간(林幹)과 윤관(尹瓘)을 차례로 보내 이들을 치게 했지만 모두 패했다.

여진은 기병인 데 비해, 고려는 주로 보병이었고 조직도 약했기 때문이다. 이에 고려는 기병을 주축으로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고 여진과의 싸움에 대비했다.

1107년(예종 2) 마침내 여진정벌을 단행하여 윤관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관을 지나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그 지역에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의 9성을 쌓아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여진의 반격과 반환요청 및 윤관에 대한 비판 등으로 빚어진 당시 사정의 변화로 1109년에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우야소의 아우 아구다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여진을 통일하고, 1115년에 후이닝[會寧]을 수도로 하여 금을 건국했다. 금은 1117년 (遼)를 의식하여 고려에게 형제관계를 맺고 화친하자는 내용의 제의를 해왔으나, 1125년(인종 3) 요를 멸망시킨 후 태도를 바꾸어 압력을 가하면서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1126년 고려가 금에 대한 군신관계의 수립을 받아들인 뒤 양국간에 별다른 무력충돌은 없었다. 금은 1127년 송의 서울 카이펑[開封]을 함락시키고 송을 화이허 강[淮河] 이남으로 축출하여 만주 전역과 내몽골·화북 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했다.

금이 짧은 기간에 대제국으로 성장한 데는 병농일치의 군제(軍制)인 밍칸무케[猛安謀克] 제도의 역할이 컸다. 건국 직전인 1114년 아구다가 완비한 이 제도는 300호(戶)를 1무케[謀克]로 하여 100명의 군사를 내고, 10무케를 1밍칸[猛安]으로 하며 그 장(長)은 세습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의하여 군사·행정 조직을 완비함으로써 정복왕조로서의 체제를 다져놓았다.

금은 요와 마찬가지로 2중통치제도를 확립했다. 즉 영토의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중국식 관료제를 도입했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민족자치구를 두었다. 수도는 후이닝이었다가 후에 다싱 현[大興縣:현재 베이징 성(北京城) 남서쪽]으로 옮겼다.

금의 주요 영토가 중국 안에 있기는 했지만, 여진족은 자신의 민족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비록 왕조의 이름은 중국식인 '금'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문자·언어를 사용했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중국식 옷·관습을 금지했다. 그리하여 여진 고유의 문화를 바탕으로 송나라의 문화를 융합하려 했으나, 화북으로 이주한 후 송의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말기에는 황하 범람 후의 치수(治水) 공사와 북방 몽골계 유목민에 대한 경략 등에 지나치게 국력을 소모했고, 실지회복에 나선 남송의 도전까지 받아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1234년 몽골·남송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