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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요는 10-12세기에 중국 북방에서 거란족이 세운 왕조이다. 점령지의 중국인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남면관이라는 2중 지배체제를 만들었으며, 부족 고유의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916년에 질라부의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부족들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우고 주변 부족들을 점령하고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936년 연운 16주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라 한 후 후진을 멸망시켰다. 이후 성종은 송을 공격하여 1004년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를 맺고, 송과 무역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도 현저히 발전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으며 고려와 북만주의 여진을 침략하여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이 되었다.

요(遼)
요(遼)

거란의 여러 부족은 9세기말 당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여 916년에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5년 12월 발해를 공격하여 이듬해에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그 여세를 몰아 태종 때에는 중국 경략에 주력했다.

936년에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燕雲) 16주(州)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遼)라 한 후 다시 후진을 멸망시켜 대량(大梁 : 허난 성[河南省] 카이펑[開封])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높은 문화수준을 지닌 중국의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철수했으며,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宋)을 공격하여 1004년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를 맺고, 송에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했으며, 송과 무역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도 현저히 발전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고려와 북만주의 여진을 침략하여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이 되었다.

요왕조의 관제는 점령지의 중국인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北面官)·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중지배체제를 만들어냈다. 중국인 지역을 통치하는 남면관에서는 당(唐)식의 군현제도를 그대로 모방했고, 북면관에서는 내륙 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을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렸다.

거란족 지배자들은 중국인 고문을 두고 중국식 행정기술을 본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족적 주체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 부족 고유의 의식·음식·복제 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한자를 쓰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문자를 고안해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인 흥종(興宗)·도종(道宗) 때 황실의 내분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동북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세운 금(金)과,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송의 협공을 받아 1125년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했다.

이때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

거란족이 우리 민족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장수왕 때로 그 연원이 오래되었지만, 밀접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야율아보기는 922년(태조 5) 고려 태조에게 낙타·말 등을 보내 수교를 요청했다. 그런데 926년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 태조는 거란을 적대시하여 942년에 요나라 태종이 보내온 낙타 50필을 만부교(萬夫橋) 아래에서 굶겨 죽이고 사신 30명을 유배보냈다.

광종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했다. 요나라 성종은 정국의 안정을 이룩한 후 송이 고려에게 거란을 협공하자고 제의한 것과 발해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이 고려와 왕래하는 것을 주시하다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압록강 유역에 성책을 구축하여 고려 침입을 준비했다.

이후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소손녕(簫遜寧)이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을 점령하고 있음과 거란과 수교를 하지 않음을 이유로 침입해 왔다. 1010년(현종 1) 11월에는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시해했다는 것을 구실로 성종이 직접 침략해왔고, 1018년 12월 소배압(簫排押)이 침입하는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공격해왔으나 그때마다 서희(徐熙)·양규(楊規)·강감찬(姜邯贊) 등의 뛰어난 전술로 격퇴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양국의 인적·물적 손실은 적지 않았으며, 결국 양국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고려는 송과 국교를 끊고 요의 연호를 쓰는 대신 1차 침입 때 획득한 강동 6주를 그대로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필요를 느껴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나성(羅城)을 축조하는 한편, 압록강 하구에서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지역에 천리장성을 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