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계변무

종계변무

다른 표기 언어 宗系辨誣

요약 고려시대인 1390년 윤이·이초가 명으로 가서 이성계를 제거할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왕실의 후계가 아니라 이성계의 인척으로서 그와 공모하여 명을 치려 한다고 모함하고 이성계는 이인임의 후손이라 했다. 명에서는 이 내용을 <태조실록>·<대명회전>에 기록했다. 1394년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은 변명주문을 지어 보냈으나 명에서는 반응이 없었고, 1402년 주청문을 보냈으나, 명은 <만력회전> 중수본에 변명사실을 부기하는 데 그쳤다. 이후 이것은 200여 년 동안 양국간의 외교문제가 되었다. 여러 차례 개정을 요구했는데, 1584년 황정욱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등본을 가지고 와서 종계변무의 목적이 일단락되었다. 1589년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부를 받아옴으로써 종계변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고려시대인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제거할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왕실의 후계가 아니라 이성계의 인척으로서 그와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모함하고 이성계는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 했다. 명나라에서는 이 내용을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기록했다.

조선은 1394년 명나라 사신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종계(宗系)문제는 조선왕조의 합법성과 왕권확립에 관계된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명나라 사신 황영기(黃永奇)의 귀국편에 변명주문(辨明奏文)을 지어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반응이 없자, 1402년(태종 2) 사은사 임빈(林彬)을 파견하여 주청문(奏請文)을 보냈으나, 명나라에서는 〈만력회전 萬曆會典〉 중수본에 변명사실을 부기하는 데 그쳤다. 이후 이것은 200여 년에 걸친 양국간의 외교문제가 되었고, 중종반정의 합법성 강조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1518년(중종 13) 주청사 이계맹(李繼孟)이 돌아와 〈대명회전〉 〈조선국조 朝鮮國條〉의 주에 "이인임과 그의 아들 단(丹 : 이성계)이 홍무 6년에서 28년까지 4명의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자 중종은 남곤(南袞)·이자(李耔)를 보내 개정을 요구했다. 그후 〈대명회전〉 중찬이 있으리라는 소식을 듣고 1529년 유보(柳溥), 1539년 권벌, 1557년(명종 12) 조사수(趙士秀), 1563년 김주(金澍), 1573년(선조 6) 이후백(李後白)·윤근수(尹根壽), 1575년 홍성민(洪聖民) 등을 보내 거듭 개정을 주장했다.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등본을 가지고 돌아와서 종계변무의 목적이 일단락되었다. 1587년 유홍(兪泓)이 중수된 〈대명회전〉 중 조선관계 부분 1질을 받아와 선조가 종묘사직에 친고(親告)했으며, 1589년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부를 받아옴으로써 종계변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