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

영락제

다른 표기 언어 Yungle ti , 永樂帝 동의어 주체, 朱棣, zhū dì, 영락, 태종, 太宗, 성조, 成祖, 문제, 文帝, 장릉, 長陵
요약 테이블
출생 1360. 5. 2, 중국 난징[南京]
사망 1424. 8. 5
국적 중국, 명(明)

요약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고, 내성(內城)인 쯔진청[紫禁城]을 세우는 등 수도를 재건하면서, 명의 융성을 이끌었다.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제2대 황제인 조카 건문제에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제3대 황제에 올랐다. 이후 강력한 통치를 펼쳐 명의 제도를 정비하고 팽창주의적 외교로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영락제의 관심은 특히 북쪽 국경에 있어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는데, 이후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로 자리매김했다. 양쯔 강과 황허 강을 잇는 오래된 대운하를 재건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영락제의 해외 원정, 안남 정벌, 북벌, 베이징 재건, 대운하 복원은 모두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요구했으므로 후일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어 그의 후계자들은 소모된 국력을 회복하는 데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어린시절과 초기경력
  3. 즉위
  4. 대외정책
  5. 베이징 천도
영락제(永樂帝)
영락제(永樂帝)

개요

이름은 주체(朱棣). 연호는 영락. 묘호는 태종(太宗 : 후에 成祖). 시호는 문제(文帝). 그의 재위기간에 명은 가장 강성했다.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고, 내성(內城)인 쯔진청[紫禁城]을 세우는 등 수도를 재건했다.

쯔진청[紫禁城]
쯔진청[紫禁城]

어린시절과 초기경력

주체의 아버지 주원장(朱元璋)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읜뒤 절에 들어가 걸승이 되었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에 대항하여 중국인들이 민중봉기를 일으키자, 반란군에 투신하여 뛰어난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빠르게 출세의 길을 걸었다. 결국 난징을 근거지로 삼아 양쯔 강[揚子江] 동쪽 유역의 비옥한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주체는 이곳에서 26명의 왕자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늘날 학자들은 주체가 고려 사람인 둘째 왕비의 소생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의 전통적 방식에 따라 그는 항상 아버지의 정실인 마(馬) 황후를 법적 어머니로 대접했다.

마 황후는 덕이 높아서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1360년 주원장은 양쯔 강 유역에서 패권을 놓고 경쟁자들과 다투었지만, 지금의 베이징에 있던 원의 조정은 내분에 휘말려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그후 7년 동안 그의 군대는 중국 중부 및 동부 지역에서 경쟁세력을 제압했다. 1368년에 난징을 도읍으로 하는 명나라를 정식으로 발족시키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정했다.

그는 몽골족의 마지막 황제를 베이징에서 내쫓은 다음, 다시 만리장성을 넘어 고비 사막으로 추방했다. 1370년 홍무제는 10세인 주체를 연왕(燕王)에 봉했다(연은 지금의 베이징 지역). 그후 주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10년 동안 신생 명 제국은 안정을 얻고 정교한 행정기구를 마련했으며, 많은 분야에서 강력하게 개편을 추진하여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질서를 확립했다. 주체는 아버지의 강인하고 정력적이며 변덕스러운 성격을 닮아 범상하지 않은 인물로 성장했고, 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의 타고난 지도자적 자질은 형제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1380년 20세가 된 연왕은 베이징에 거처를 정했다. 명대 초기의 행정체제에서 수도 난징에 남아 있는 황태자 이외의 황자들을 전략지역에 배치시키고 그 지역의 번왕(蕃王)으로 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1380년대에 연왕은 당시 가장 뛰어난 장수들의 보호 아래 북부 국경지방을 순찰하면서 소규모 전투를 벌여 경험을 쌓았다.

1390년 이복 형인 진왕(晉王 : 서쪽에 인접해 있는 산시 성[山西省]의 번왕)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정벌에 나선 북벌군을 지휘했다. 1393년 이들은 북부 국경지방의 중앙을 지키는 수비대를 완전히 통괄하게 되었다. 그후 연왕은 거의 해마다 북쪽으로 원정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혼란에 빠진 몽골족을 계속 궁지에 빠뜨렸다.

1392년에 황태자가 죽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홍무제가 스스로 공포한 황실의 규범과 전통을 어기고 연왕을 새 황태자로 책봉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고 믿고 있다. 황제는 반 년 동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전통에 따라 죽은 황태자의 아들 주윤문(朱允炆)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황태손은 15세밖에 안 된 소년이었다. 이때부터 특히 1395, 1398년에 두 형이 각각 차례로 죽은 뒤 연왕은 점점 더 거만하고 도도해졌다. 1398년 여름에 홍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38세의 한창 나이인 연왕은 자신이 사실상 황실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여 새로 황제가 된 조카 건문제(建文帝)에게 정중하게 대접받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어린 새 황제는 다른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학문을 좋아했던 그는 유학자 출신인 정치가들의 영향을 받아 이제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 정부에 혼란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개혁에 착수했다. 그가 의도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번왕들한테서 지방 권력을 빼앗는 것이었다. 1398~99년에 그는 번왕들을 잇따라 투옥하고 평민으로 격하시키거나 추방했다. 이에 황제의 처단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왕도 있었다. 연왕은 자신의 지위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음을 깨닫고 반란을 결심했다. 1399년 8월 그는 황제 주변에 있는 간신들한테서 미숙한 황제를 구출하는 것이 숙부인 자신의 도리라고 선언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1399~1402년 동안 계속되어 산둥 성[山東省] 서부지역과 화이허 강[淮江] 유역의 북부 지방을 거의 폐허로 만들었다.

난징에 있던 건문제 정부는 연왕의 세력을 과소평가하여 인력과 물자를 효율적으로 집결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은 오랫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 1402년초 연왕의 군대는 화북지방을 돌파한 뒤, 거의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대운하를 따라 재빨리 남하하여 양쯔 강에 진을 치고 있던 수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1402년 7월에 궁정의 환관들이 연왕의 군대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고 그들을 난징 성 안으로 받아들였다.

난징이 함락된 지 4일 뒤, 주체는 옥좌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1403년에야 시작되었다. 건문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데, 궁전을 태운 불길 속에서 타 죽었는지(이것이 당시의 공식 발표였음) 아니면 변장하고 도망쳐 오랫동안 숨어 살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주체가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 수수께끼였고, 그후 중국 역사가들이 내놓은 온갖 추론의 주제이기도 했다.

즉위

제위에 오른 주체는 건문제의 측근들에게 끔찍한 보복을 자행했다.

측근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가 친척도 모조리 죽음을 당했으며, 수천 명이 죽은 뒤에야 겨우 숙청이 끝났다. 새 황제는 조카인 건문제가 바꾼 제도와 정책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게다가 초대 황제의 연호인 홍무를 1402년까지 연장하여 마치 건문제가 나라를 다스린 적이 없는 것처럼 역사를 다시 쓰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영락제 시대에도 계속 시행된 개혁 정책은 번왕의 권력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그후 살아남은 번왕들은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봉토에서 중국 중부와 남부 지방으로 잇달아 옮겨졌고, 모든 행정권을 박탈당했다.

영락제 시대부터 제국의 번왕들은 봉록이나 받고 빈둥거리면서 자신이 배정받은 도시에 사실상 갇혀 있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그 도시를 사회적으로 치장하는 의례적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후 명의 황제는 아무도 번왕의 봉기로 인한 심각한 위협을 받지 않았다.

영락제가 된 주체는 오만했고 자신의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늘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권력을 적극적으로 강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젊은이들을 중용했다. 또한 환관에게 전례없이 의존하여 그들이 예로부터 맡고 있던 궁중 내부의 일에서 벗어난 일을 맡겼는데, 예를 들면 외교사절, 건축 자재를 징발하는 일 같은 특별한 사업의 감독관, 수비대가 주둔하는 군사 요새의 지역 감찰관 등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1420년에는 동창(東敞)이라는 특별환관위원회를 설치하여 반역활동 색출의 임무를 전담하게 했다. 이 제도는 영락제 시대에는 그다지 악명이 높지 않았지만, 그후 수백 년 동안 황실 근위대와 협력하여 온갖 악행을 일삼은 비밀경찰로서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궁정에는 예로부터 서적을 편찬하고 편집하는 기관인 한림원(翰林院)에서 파견된 젊은 유학자들이 관리로 일하고 있었는데, 영락제는 이들에게 많이 의존했다.

영락제 말년에 이들은 황제와 조정 사이에서 강력한 완충 역할을 하는 대학사(大學士)가 되었다. 영락제는 홍무제와 마찬가지로 성미가 급해서 걸핏하면 화를 잘 냈고 때로는 관리들을 잔인하게 학대했지만, 강력하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중국의 정치·사회·경제는 대체로 안정된 형태로 자리잡았고, 이것은 그후 명나라의 특징이 되었다. 영락제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고급 문화를 별로 존중하지 않았다. 그는 원나라 통치자들의 방식에 따라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를 중국에 불러들여 높이 예우했는데, 그에게 가장 강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아마 오랫동안 황제의 측근으로 총애를 받은 도연(道衍)이라는 도사였을 것이다.

그의 정부는 좀더 정통적인 방침에 따라 유학과 주자학의 고전을 편찬·출판했으며, 특히 〈영락대전 永樂大典〉이라는 기념비적인 문헌집(필사체 형식) 발간을 후원했다. 1만 1,000권이 넘는 이 전집에는 여기에 실리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사라졌을 작품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황제 자신은 이런 활동을 문학자들의 심심파적 소일거리쯤으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대중한테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황제의 신임은 얻지 못했다. 무인(武人) 출신인 영락제는 행정업무를 참고 해낼 만한 인내심이 부족했고, 더군다나 지적 훈련을 쌓을 만한 끈기는 전혀 없었다.

대외정책

황제가 된 초기에 그는 중국 남쪽 국경 너머에 있는 지역에 매혹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건문제가 해외로 달아났다는 소문도 그가 그 땅에 관심을 가진 이유의 하나였을 것이다.

1403년 영락제는 환관들이 이끄는 3개 함대를 파견하여, 자바 섬과 인도 남부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그의 즉위를 알리게 했다. 중국 역사상 어떤 통치자보다도 정력적이었던 그는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 지역의 군주들한테도 인정을 받고 싶어했다.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말라카·브루나이를 비롯한 외국 군주들은 정기적으로 중국에 조공 사절단을 보냈다.

영락제가 거느리고 있던 많은 함대 사령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슬람교도인 환관 정화(鄭和)였다. 그는 1405~33년 대함대를 이끌고 7차례나 먼 외국까지 항해했다. 정화는 페르시아 만과 홍해뿐 아니라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잔지바르까지 남하하면서 최소한 37개 나라를 방문했다. 그가 방문한 모든 나라는 영락제의 종주권을 인정하여 공물을 가진 사절단을 정화에게 딸려보냈다.

영락제는 티베트와 네팔에도 환관을 사절로 보내 조공을 거듭 요구했고, 중앙 아시아를 지나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의 투르키스탄까지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한테서 종주권을 인정받은 중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당시 일본의 실권자는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였다. 얼마 동안 일본은 조선과 중국 해안을 약탈한 왜구들을 중국 조정에 보내어 벌을 받게 할 만큼 고분고분했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뒤를 이어 새로운 쇼군[將軍]이 등장하자 일본은 이전의 순종적인 태도를 버렸고, 1411년부터는 조공 사절단을 보내는 것조차 거부했으며, 왜구들은 다시 중국 해안에서 노략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락제는 군대를 보내 일본을 응징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1419년 일본의 쇼군이 모든 해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면서 과거의 종속관계를 회복하기를 거부했을 때, 영락제는 다른 문제에 골몰하느라 일본의 행위에 불평만 늘어놓았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영락제의 팽창주의적 경향으로 중국은 남쪽의 이웃 나라인 안남(지금의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모험을 감행했는데, 이 모험은 결국 커다란 재난을 초래했다.

1400년 안남 진씨(陳氏) 왕조의 후계자인 나이 어린 트란이 폐위당하고 새로운 왕조가 선포되었다(찬 왕조). 영락제가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진씨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망명자들은 안남에 개입하여 합법적 통치를 회복시켜 달라고 영락제를 졸랐다. 1406년 안남에 파견된 중국 사자가 살해당하자, 황제는 이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중국군은 순식간에 안남을 정복하여 평정했다. 그러나 진씨 왕조의 후계자 가운데 왕위 자격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1407년 영락제는 속국이었던 안남을 중국의 일개 성으로 편입시켜 버렸다. 현지에서 저항이 일어날 때마다 곧 분쇄되곤 했지만 반란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특히 1418년부터는 명의 관헌에 대한 유격전이 일어나, 안남에서 중국의 지위는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그무렵에는 황제도 이미 남방지역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그의 손자인 선덕제(宣德帝)가 약간의 굴욕을 무릅쓰고 1428년 안남에 대한 명의 직접 통치를 포기할 때까지 상황은 계속 나빠졌다.

예로부터 중국에 왕조가 새로 들어설 때마다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던 북쪽 국경지방은 영락제의 통치 초기에는 비교적 조용했다. 1402년 그가 연왕이었을 당시 베이징을 근거지로 하여 남쪽의 난징으로 쳐들어갈 때, 영락제는 바로 후방에 있던 중국 북동부지역의 몽골 부족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황제가 된 뒤, 몽골 부족들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만리장성 남쪽에 있던 중국군 전투 사령부를 철수시켜 우리앙가드(Urianghad) 몽골족에게 사실상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후에도 정기적으로 우리앙가드 족장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보냈다. 북부 국경너머에 있던 다른 몽골 부족 동몽골족(타타르족)과 서몽골족(오이라트족)은 너무 질서가 없어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영락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저 멀리 서쪽에서는 투르크-몽골 제국을 세운 티무르가 이미 인도와 시리아를 침략했고, 1404년에는 중국 원정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락제는 이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서쪽을 지키는 중국 장군들에게 분쟁에 대비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티무르가 1405년에 죽자 원정은 취소되었다. 그후 영락제는 사마르칸트와 헤라트에 있는 티무르의 후계자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앙 아시아와의 교역로를 계속 열어놓았다.

영락제가 제위에 오른 지 몇 년 뒤, 타타르족에는 아루크타이라는 유능한 지도자가 새로 등장했다.

그러자 영락제의 관심은 남부에서 다시 북쪽 국경지방으로 돌아갔다. 1410년, 연왕 시절인 1380, 1390년대에 그의 관심을 끌던 북쪽 국경 밖으로 넘어가 타타르족을 공격하여 그 지역을 순찰하기 시작했다. 1410~24년 5차례에 걸쳐 몸소 대군을 이끌고 고비 사막까지 북벌을 단행했다. 그 대상은 주로 타타르족의 아루크타이였지만 때로는 오이라트족이나 불온한 우리앙가드 집단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 원정에서 실제 전투는 몇 번밖에 벌어지지 않았고, 중국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몽골족의 세력을 분쇄함으로써 그들이 대규모로 연합했을 때 생길지도 모르는 위협을 미리 방지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더욱이 이무렵에 영락제는 기민한 외교정책을 펼쳐 몽골족을 분열상태로 묶어두고, 또한 저 멀리 북동쪽의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에 대해 명목뿐인 권위를 확립했다.

베이징 천도

영락제 시대에 국내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수도와 중앙정부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긴 것이었다.

이것은 황제와 국가의 관심이 남쪽 바다에서 북쪽 국경지방으로 바뀌었음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베이징은 이상적인 수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은 예로부터 주로 원 같은 '오랑캐' 제국과 결부되어 있었고, 중국의 경제·문화의 심장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북쪽 국경과 너무 가까워서 이민족의 침략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베이징은 영락제의 세력 기반이었고, 베이징에서는 북부지방의 수비대를 효율적으로 감독할 수 있었다.

1407년에 영락제는 천도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1409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북부에서 보냈다. 1417년에 베이징을 재건하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된 뒤, 그는 한 번도 난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베이징의 새 궁전은 1420년에 완공되었고, 1421년 새해 첫날 베이징은 정식으로 명의 수도가 되었다.

이 천도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북방의 수비를 만족스럽게 강화하려면 우선 비옥한 양쯔 강 유역에서 북부까지 식량을 확실하게 운반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수송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양쯔 강과 황허 강[黃河]을 잇는 오래된 대운하는 몇 세기 동안 방치된 까닭에 거의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산둥 반도를 우회하는 연안 수송로가 재건되었고, 이 수송로는 영락제의 통치 초기에는 해군사령관 진선(陳瑄)의 지휘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북부에 있는 낡은 수로를 재건·확장하는 사업도 동시에 이루어져, 1411년에는 해상 수송선이 산둥 성 남쪽에 있는 황허 강 어귀로 들어가 연안 항로 중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진선은 1415년까지 대운하의 남쪽 부분을 성공적으로 재건했고, 해상 수송로는 더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진선이 1433년 죽을 때까지 대운하망을 관할하는 최고 사령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남부의 항저우[杭州]에서 북부의 베이징 교외까지 뻗어 있는 수로망은 군대가 운영하는 새로운 체제 밑에서 북부가 필요로 하는 식량을 충분히 수송할 수 있었다.

베이징이 수도가 된 1421년에 수송량은 연간 18t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영락제의 해외 원정, 안남 정벌, 북벌, 베이징 재건, 대운하 복원은 모두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요구했다. 영락제 시대에 착수되어진 위와 같은 대규모 사업들은 그 강력한 지도력을 입증하는 증거이지만,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어 그의 후계자들은 소모된 국력을 회복하는 데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영락제는 1424년 몽골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병에 걸려,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인 8월에 진중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맏아들이 뒤를 이어 홍희제(洪熙帝)가 되었는데, 홍희제는 황태자 시절에 아버지가 오랫동안 수도를 비울 때마다 섭정으로 유능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홍희제의 묘호는 인종(仁宗)이다. 영락제는 홍희제 이외에도 아들 셋과 딸 다섯을 두었다. 그의 정실은 명초의 위대한 장군인 서달(徐達)의 딸 서 황후였다. 서 황후는 영락제가 제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1407년 죽었다.

원래 영락제는 전통적으로 나라의 제2대 황제에게 주어지는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 칭호를 부여한 것은 사실상의 2번째 황제인 건문제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부당한 처사였다. 따라서 1538년 영락제의 묘호는 성조(成祖)로 바뀌었는데, 이는 새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사람이 영락제라는 점을 인정한 칭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