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미쓰

다른 표기 언어 Ashikaga Yoshimitsu , 足利義滿 , あしかがよしみつ
요약 테이블
출생 1358. 9. 25, 일본 교토[京都]
사망 1408. 5. 31, 교토
국적 일본

요약 일본의 쇼군[將軍].

할아버지인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1305~58]가 1338년에 세운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 1573년 아시카가 바쿠후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를 요시미쓰가 살던 교토의 한 구역의 이름을 따서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라고 한다.

1368년 쇼군이 되자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황실의 관료제 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381년 내대신이 되었으며 좌대신을 거쳐 1394년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올랐다. 그는 통치기간에 완전한 문민정치를 확립했다.

1392년 요시미쓰는 다카우지의 교토 장악으로 야기된 남북조 체제를 종식시켰다. 일찍이 고다이고[後醍醐 :1318~39 재위] 덴노와 그 추종세력들이 다카우지에 쫓기어 나라[奈良] 남쪽의 요시노 산[吉野山]으로 도망가 남조를 세웠으며, 다카우지가 교토에 또다른 왕실인 북조를 세움으로써 남북조시대가 성립되었다.

요시미쓰는 고대부터 전해내려온 왕실의 보물인 삼종(三種)의 신기(神器)를 교토로 반환한다는 조건 아래 남조와 북조가 번갈아가며 덴노에 즉위하도록 하여 남조와 화약을 맺었으나 이 약속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요시미쓰는 지방에 대한 완전한 지배체제를 확립하지 못하여 지방 무사들의 반란을 여러 차례 다스려야 했다.

그러나 15세기초 남서부의 봉건영주들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일찍이 이들 소유의 해적선들은 중국 해안에 출몰하면서 600년간 지속되어오던 중국과의 공식적인 무역을 중단시켜왔다. 이후 중국과의 교역 재개는 요시미쓰 치하에서 1392년부터 시작된 75년간의 문화적 부흥기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궁정생활이 화려해지고 선승들이 정부 내 고위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웅장한 사원과 궁전들이 축조되었다. 유명한 것으로 긴카쿠 사[金閣寺]가 있는데, 1394년 요시미쓰가 아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은퇴한 뒤 교토의 북서쪽 외곽에 건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