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과거

다른 표기 언어 科擧

요약 587년 수나라 때 처음 실시했고, 그 뒤 제도화되어 당대, 명대에 더욱 정비되었다. 청대까지 이어졌으나 1905년 학교교육을 실시하면서 폐지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958년에 처음 시행되었는데 유교사상에 입각한 글짓기와 경전해석 시험이었다. 조선시대에도 과거제는 3년에 1회씩 실시하는 식년시와 필요에 따라 수시로 열린 시험이 포함된다. 초기에는 문신을 선발하는 문과시험 위주였다가 조선 태종 때부터 무과시험을 치렀다. 역과는 조선의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변동에 따라 통치체제가 흔들리면서 과거제도에도 많은 폐단이 발생하여 과거제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1894년에 단행한 갑오개혁에서 성균관을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개편하며 과거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관리등용법을 제정했다.

목차

접기
  1. 중국
  2. 한국
  3. 중국의 과거
  4. 고려시대의 과거
  5. 조선시대의 과거
과거제도
과거제도

중국

587년 수(隋) 문제(文帝)가 처음 실시했고, 그뒤 수 양제(煬帝)가 진사과(進士科)를 처음 설치하면서 제도화되었다.

당대(唐代)에는 수재과(秀才科)·명법과(明法科)·명서과(明書科)·명산과(明算科)를 증설했고,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전시(殿試)를 처음 실시하고 무과(武科)도 함께 실시했다. 과거제도는 명대(明代)에 와서 더욱 정비되었다. 3년마다 각 성(省)에서 1번씩 치르는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을 거인(擧人)이라 했는데, 이들은 3년마다

수도에서 열리는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 시험에 합격한 자를 공사(貢士)라고 불렀다. 이들은 황궁에서 황제가 친히 주관하는 최종시험인 전시에 참가했고, 여기서 3급(갑과·을과·병과) 이상으로 합격한 사람들만 관원으로 채용하였다.

장과합격자는 '진사급제'(進士及第)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1등은 장원(狀元), 2등은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라고 불렀다. 을과 합격자에게는 '진사출신'(進士出身), 병과 합격자에게는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이들은 한림원(翰林院)의 수찬(修撰)·편수(編修)·서길사(庶吉士)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명대의 과거제도는 청대(淸代)까지 이어졌으나 1905년 학교교육을 실시하면서 폐지되었다.

한국

우리나라에서는 958년(고려 광종 9)에 중국 후주(後周)의 귀화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크게 제술과(製述科)·명경과(明經科)·잡과(雜科)·승과(僧科)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제술과와 명경과를 중시해서 양대업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전자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여러 가지 글을 짓는 시험이었고, 후자는 유교경전을 해석하는 시험이었다.

잡과는 여러 분야의 기술관들을 등용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우선 법률전문가를 뽑는 명법업(明法業), 계산을 전문으로 하는 명산업(明算業), 글씨쓰기를 위한 명서업(明書業), 의학의 의업(醫業), 점치는 것을 담당한 주금업(呪禁業:卜業), 풍수의 지리업(地理業), 그밖에 이속(吏屬)을 선발하는 하륜업(何論業)·삼례(三禮)·정요업(政要業) 등이 있었다.

승과는 승려들에게 승계를 주기 위해 실시했는데, 교종시와 선종시로 나누어져 있었다.

1390년(공양왕 2)에 무신을 선발하기 위해 무과를 설치했으나 실제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채 고려가 멸망했기 때문에 없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고려 초기 과거시험에는 예비시험인 학교시가 발달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학교제도와 지방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의 국학생(國學生:士貢)과 지방에서 천거하는 호족자제(豪族子弟:鄕貢)들이 아무런 예비시험을 거치지 않고 직접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도정비가 이루어짐에 따라 각종 예비시험이 생겨나게 되었다.

1024년(현종 15) 각 지방에서 시행하는 예비시험(1차시험)인 향시(鄕試:界首官試)가 생겼는데, 이것을 통과한 자는 개경의 국자감에서 재시험을 보아 합격하면 본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받았다.

또한 귀족관료의 자제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국자감 유생들은 일반 응시자들과 달리 별도의 예비시험을 보았는데, 이를 국자감시(國子監試)라고 부르며, 1031년(덕종 즉위)에 설치했다.

1147년(의종 1)부터 시행한 승보시(升補試)는 국자감이라는 최고의 교육기관 안에서 상사(上舍)에 진급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고시였다. 과거시험 절차를 보면, 초기에는 계수관시에 합격한 향공진사, 개경시·서경시(西京試)의 통과자, 관직에 있는 자, 국학생, 사학(私學)인 12도생(十二徒生)들은 본고사의 예비고사인 국자감시에 응시해서 합격할 경우에만 본시험인 예부시(일명 東堂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과하면 국왕이 주재하는 복시(覆試:親試)를 치렀는데 이것은 예부시 급제자의 순위만을 결정하는 시험으로 상설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체제는 1369년(공민왕 18)에 이르러 중국 원(元)의 제도를 모방한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과거삼층제(科擧三層制)로 바뀌었다. 시험시기를 보면, 1084년(선종 1)에는 3년에 1회씩 시험을 치르는 식년시제(式年試制)를 채택했으나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수시로 필요에 따라 실시했다.

본고사의 최종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지급했다.

과거 시험관을 지공거(知貢擧)라고 하고 합격자를 문생(門生)이라고 부르는데, 양자 사이의 관계는 부자관계와 같아 평생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들 사이에 학벌이 형성되어 출세의 배경이 되었다.

과거의 응시자격은 규정상 노비와 같은 천인들과 불효·불충 등의 큰 죄를 지은 자 및 일부 향리들을 제외한 양인 이상 신분은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고, 응시자 중에서 재능있는 자를 선발하여 등용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지배층 내부에서도 엄격한 신분제한을 가함으로써 일부 제한된 문벌출신만이 합격해서 높은 관직을 차지했다.

특히 좌주(坐主)와 문생 간의 관계는 이러한 조건들을 더욱 더 촉진시켜서 권세가들이 권력을 독점할 수 있게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통치체제를 문란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 말기의 제도와 역대 중국 왕조의 시행방식을 고려하여 자기 나름대로 과거제를 채택·운영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시대의 것과 유사했으나 무과를 처음으로 실시했던 것과 승과제를 폐지시킨 점이 두드러진 차이이다.

또한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문과·무과·잡과 등으로 나뉘었고, 정기시와 부정기시의 구분이 있었다.

정기시는 3년에 1회씩 실시하는 식년시를, 부정기시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열렸던 것을 말한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의 해석을 위주로 하는 시험이었고, 진사시는 글짓기 시험이었는데, 모두 초시·복시 두 단계 시험으로 각 100명씩 뽑아 생원·진사의 칭호를 내려주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양자를 합해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했는데, 문과의 예비고사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문신을 선발하는 시험인 문과에는 원칙적으로 생원·진사가 응시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현직 관료를 비롯해서 일반 유생인 유학(幼學)까지도 응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시대에는 학교와 과거를 분리하여 운영했음을 알 수 있고, 중국의 명·청 시대에 학교시험을 과거에 포함시켜 일원화함으로써 학교를 과거의 준비기관으로 만들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문과에는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 시험이 있었는데, 이중 초시·복시는 초장·중장·종장으로 나누어 시험을 치렀다.

식년시 문과의 최종 합격자수는 33명이었다. 국초에는 그들 사이의 등급을 나누는 방법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1460년(세조 12)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확정되었고, 이것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무신선발시험인 무과는 고려말에 처음으로 도입되었지만, 실제로 처음 실시되었던 것은 조선 태종 때부터이다. 이의 실시는 문무양반의 관료체제가 전에 비해서 상당히 정비되어 가고 있었던 것과 사회발전에 따른 전문인력의 확보라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무과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 시험을 치렀고, 시험과목은 궁술(弓術)·기창(騎槍)·격구(擊毬) 등의 무술과 병서(兵書)·유교경전에 대한 강경시험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과목상으로 문·무를 동시에 시험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과도 최종시험이 끝난 후 성적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데,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되었다.

그리고 합격자에게는 문무과 모두 방방의식(榜方儀式)을 통해 합격증서인 홍패(紅牌)를 주었다.

잡과에는 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율과(律科) 등의 4종류가 있었다.

이외 상급서리인 성중관원(成衆官員)을 뽑는 이과(吏科)도 있어 1426년(세종 8)부터 시행되었으나 얼마 후 이원취재(吏員取才)로 바뀌면서 잡과에서 제외되었다.

역과는 조선의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역과에는 한어(漢語)·몽고어(蒙古語)·여진어(女眞語)·왜어(倭語) 등의 4과가 있었다. 의과는 의무관을 선발하는 것이고 음양과는 천문·풍수지리를 담당하는 자를 뽑는 시험이었는데, 천문학(天文學)·지리학(地理學)·명과학(命課學)으로 세분되었다.

율과는 법률전문가를 뽑는 것이었다. 잡과에는 초시와 복시만 있고 전시는 없었다. 시험과목으로는 각각의 전공서적과 유교경전, 〈경국대전〉을 필수로 했다.

합격자에게는 처음에는 홍패를 주었으나 뒤에 백패(白牌)로 바꾸었다. 문무과와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국왕의 도장을 찍어 주었으나 잡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을 찍어 주었다. 이는 문무과, 생원·진사시보다 잡과가 경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특별한 규정은 없다.

따라서 법제상 천민이 아니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반죄와 강상죄와 같은 중죄인의 자손 및 범죄를 저질러 영구히 서용되지 못하는 자, 재가했거나 실행(失行)한 부녀자의 자손, 서얼 등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했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변동에 따라 통치체제가 흔들리면서 과거제도에도 많은 폐단이 발생했다. 특히 후기에는 빈번한 과거실시로 인해 합격하고도 관직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아지고, 당파 사이에 대립이 행해짐에 따라 성적이나 실력보다 소속 당파나 정실에 의해 합격과 출세가 좌우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러한 폐단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한 과거제 개혁방안이 실학파, 특히 유형원(柳馨遠)이나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그뒤 세도정치가 행해지면서 모든 관직이 벌열(閥閱)에 의해 독점되어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을 얻지 못한 관료예비군만 누적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과거제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876년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이 전해져 근대사회로 변모하게 되자 구래의 관리등용시험인 과거를 가지고서는 맞는 신진인사들을 선발하기 곤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94년에 단행한 갑오개혁에서 성균관을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개편하며 과거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관리등용법을 제정했다.→ 무과, 문과

중국의 과거

587년 수(隋) 문제(文帝)가 처음 실시했고, 그뒤 수 양제(煬帝)가 진사과를 처음 설치하면서 제도화되었다. 당대(唐代)에는 수재과·명법과·명서과·명산과를 증설했고,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전시를 처음 실시하고 무과도 함께 실시했다.

과거제도는 명대(明代)에 와서 더욱 정비되었다. 3년마다 각 성(省)에서 1번씩 치르는 향시에 합격한 사람을 거인이라 했는데, 이들은 3년마다 수도에서 열리는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 시험에 합격한 자를 공사라고 불렀다. 이들은 황궁에서 황제가 친히 주관하는 최종시험인 전시에 참가했고, 여기서 3급(갑과·을과·병과) 이상으로 합격한 사람들만 관원으로 채용하였다.

갑과 합격자는 '진사급제'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1등은 장원, 2등은 방안, 3등은 탐화라고 불렀다. 을과 합격자에게는 '진사출신', 병과 합격자에게는 '동진사출신'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이들은 한림원의 수찬·편수·서길사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명대의 과거제도는 청대(淸代)까지 이어졌으나 1905년 학교교육을 실시하면서 폐지되었다.

고려시대의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958년(고려 광종 9)에 중국 후주(後周)의 귀화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크게 제술과·명경과·잡과·승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제술과와 명경과를 중시해서 양대업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전자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여러 가지 글을 짓는 시험이었고, 후자는 유교경전을 해석하는 시험이었다.

잡과는 여러 분야의 기술관들을 등용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우선 법률전문가를 뽑는 명법업, 계산을 전문으로 하는 명산업, 글씨쓰기를 위한 명서업, 의학의 의업, 점치는 것을 담당한 주금업, 풍수의 지리업, 그밖에 이속을 선발하는 하륜업·삼례·정요업 등이 있었다. 승과는 승려들에게 승계를 주기 위해 실시했는데, 교종시와 선종시로 나누어져 있었다.

1390년(공양왕 2)에 무신을 선발하기 위해 무과를 설치했으나 실제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채 고려가 멸망했기 때문에 없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고려 초기 과거시험에는 예비시험인 학교시가 발달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학교제도와 지방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의 국학생과 지방에서 천거하는 호족자제들이 아무런 예비시험을 거치지 않고 직접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도정비가 이루어짐에 따라 각종 예비시험이 생겨나게 되었다.

1024년(현종 15) 각 지방에서 시행하는 예비시험(1차시험)인 향시가 생겼는데, 이것을 통과한 자는 개경의 국자감에서 재시험을 보아 합격하면 본시험인 예부시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받았다. 또한 귀족관료의 자제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국자감 유생들은 일반 응시자들과 달리 별도의 예비시험을 보았는데, 이를 국자감시라고 부르며, 1031년(덕종 즉위)에 설치했다.

1147년(의종 1)부터 시행한 승보시는 국자감이라는 최고의 교육기관 안에서 상사(上舍)에 진급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고시였다. 과거시험 절차를 보면, 초기에는 계수관시에 합격한 향공진사, 개경시·서경시의 통과자, 관직에 있는 자, 국학생, 사학인 12도생들은 본고사의 예비고사인 국자감시에 응시해서 합격할 경우에만 본시험인 예부시(일명 동당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과하면 국왕이 주재하는 복시를 치렀는데 이것은 예부시 급제자의 순위만을 결정하는 시험으로 상설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체제는 1369년(공민왕 18)에 이르러 중국 원(元)의 제도를 모방한 향시·회시·전시의 과거3층제로 바뀌었다. 시험시기를 보면, 1084년(선종 1)에는 3년에 1회씩 시험을 치르는 식년시제를 채택했으나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수시로 필요에 따라 실시했다. 본고사의 최종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는 홍패를 지급했다.

과거 시험관을 지공거라고 하고 합격자를 문생이라고 부르는데, 양자 사이의 관계는 부자관계와 같아 평생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들 사이에 학벌이 형성되어 출세의 배경이 되었다.

과거의 응시자격은 규정상 노비와 같은 천인들과 불효·불충 등의 큰 죄를 지은 자 및 일부 향리들을 제외한 양인 이상 신분은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고, 응시자 중에서 재능있는 자를 선발하여 등용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지배층 내부에서도 엄격한 신분제한을 가함으로써 일부 제한된 문벌출신만이 합격해서 높은 관직을 차지했다. 특히 좌주와 문생 간의 관계는 이러한 조건들을 더욱 더 촉진시켜서 권세가들이 권력을 독점할 수 있게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통치체제를 문란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과거

조선시대에도 고려 말기의 제도와 역대 중국 왕조의 시행방식을 고려하여 자기 나름대로 과거제를 채택·운영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시대의 것과 유사했으나 무과를 처음으로 실시했던 것과 승과제를 폐지시킨 점이 두드러진 차이이다. 또한 생원시·진사시·문과·무과·잡과 등으로 나뉘었고, 정기시와 부정기시의 구분이 있었다.

정기시는 3년에 1회씩 실시하는 식년시를, 부정기시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열렸던 것을 말한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의 해석을 위주로 하는 시험이었고, 진사시는 글짓기 시험이었는데, 모두 초시·복시 두 단계 시험으로 각 100명씩 뽑아 생원·진사의 칭호를 내려주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양자를 합해 사마시라고도 했는데, 문과의 예비고사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문신을 선발하는 시험인 문과에는 원칙적으로 생원·진사가 응시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현직 관료를 비롯해서 일반 유생인 유학까지도 응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시대에는 학교와 과거를 분리하여 운영했음을 알 수 있고, 중국의 명·청 시대에 학교시험을 과거에 포함시켜 일원화함으로써 학교를 과거의 준비기관으로 만들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문과에는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 시험이 있었는데, 이중 초시·복시는 초장·중장·종장으로 나누어 시험을 치렀다. 식년시 문과의 최종 합격자수는 33명이었다. 국초에는 그들 사이의 등급을 나누는 방법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1460년(세조 12)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확정되었고, 이것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무신선발시험인 무과는 고려말에 처음으로 도입되었지만, 실제로 처음 실시되었던 것은 조선 태종 때부터이다. 이의 실시는 문무양반의 관료체제가 전에 비해서 상당히 정비되어 가고 있었던 것과 사회발전에 따른 전문인력의 확보라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무과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 시험을 치렀고, 시험과목은 궁술·기창·격구 등의 무술과 병서·유교경전에 대한 강경시험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과목상으로 문·무를 동시에 시험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과도 최종시험이 끝난 후 성적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데,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되었다. 그리고 합격자에게는 문무과 모두 방방의식을 통해 합격증서인 홍패를 주었다.

잡과에는 역과·의과·음양과·율과 등의 4종류가 있었다. 이외 상급서리인 성중관원을 뽑는 이과도 있어 1426년(세종 8)부터 시행되었으나 얼마 후 이원취재로 바뀌면서 잡과에서 제외되었다.

역과는 조선의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역과에는 한어·몽고어·여진어·왜어 등의 4과가 있었다. 의과는 의무관을 선발하는 것이고 음양과는 천문·풍수지리를 담당하는 자를 뽑는 시험이었는데, 천문학·지리학·명과학으로 세분되었다. 율과는 법률전문가를 뽑는 것이었다. 잡과에는 초시와 복시만 있고 전시는 없었다. 시험과목으로는 각각의 전공서적과 유교경전, 〈경국대전〉을 필수로 했다.

합격자에게는 처음에는 홍패를 주었으나 뒤에 백패로 바꾸었다. 문무과와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국왕의 도장을 찍어 주었으나 잡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을 찍어 주었다. 이는 문무과, 생원·진사시보다 잡과가 경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특별한 규정은 없다. 따라서 법제상 천민이 아니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반죄와 강상죄와 같은 중죄인의 자손 및 범죄를 저질러 영구히 서용되지 못하는 자, 재가했거나 실행(失行)한 부녀자의 자손, 서얼 등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했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변동에 따라 통치체제가 흔들리면서 과거제도에도 많은 폐단이 발생했다. 특히 후기에는 빈번한 과거실시로 인해 합격하고도 관직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아지고, 당파 사이에 대립이 행해짐에 따라 성적이나 실력보다 소속 당파나 정실에 의해 합격과 출세가 좌우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러한 폐단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한 과거제 개혁방안이 실학파, 특히 유형원(柳馨遠)이나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그뒤 세도정치가 행해지면서 모든 관직이 벌열에 의해 독점되어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을 얻지 못한 관료예비군만 누적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과거제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876년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이 전해져 근대사회로 변모하게 되자 구래의 관리등용시험인 과거를 가지고서는 맞는 신진인사들을 선발하기 곤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94년에 단행한 갑오개혁에서 성균관을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개편하며 과거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관리등용법을 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