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시

예부시

다른 표기 언어 禮部試

요약 고려시대 과거의 최종고시.

동당시(東堂試)·예위(禮闈)·춘관시(春官試)·춘위(春闈)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는데, 예부시는 과거를 주관한 관부가 상서예부였다는 데서 비롯된 칭호이다.

예부시는 고려에 과거제가 설치되던 958년(광종 9)부터 실시되었다. 예부시는 시험 과목에 따라 제술업·명경업·잡업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잡업은 명법업(明法業)·명산업(明算業)·명서업(明書業)·의업(醫業)·주금업(呪噤業)·지리업 등으로 이루어져 그 방면의 전문직을 선발하는 것인데 비해, 제술업과 명경업은 문예와 경전에 능한 교양인을 뽑는 시험으로 양대업(兩大業)이라 하여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제술업 급제자들은 국가의 요직은 물론 문한직(文翰職)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러한 과거제가 실시된 지 50여 년이 지난 현종 초년에 예비고시인 국자감시(國子監試 : 監試)가 신설됨으로써 예비고시인 국자감시와 본고시인 예부시의 이중구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국자감시가 신설되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그 전 단계의 시험으로서 향공시(鄕貢試 : 界首官試)·서경시(西京試 : 留守官試)·개경시(開京試) 등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향공시는 지방군현에서, 서경시는 서경에서, 개경시는 개경에서 실시된 시험으로 일반유생은 각자의 해당지역에서 이러한 시험을 치른 후 국자감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이외 예부시 응시자들의 대부분을 차지한 국학생과 12생도 및 재관자(在官者)들은 향공시·개경시·서경시 등을 거치지 않고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학생들은 국학에 입학하여 3년 동안 300일을 출석해서 학업을 닦아야 비로소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 중 재학하는 동안 학교에서 실시하는 고예시(考藝試)에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성적을 얻을 경우에는 국자감시나 예부시의 초장 내지 중장까지 면제해주기도 했다. 또한 12생도들도 국자감시를 거쳐야 함이 원칙이나, 국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고예시제의 특혜가 있었다. 재관자의 경우에는 국자감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예부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재관자들은 하급품관과 권무관을 말하는데 7품 이하의 참하관이었다. 그리하여 국자감시를 치른 자와 특혜를 통해 국자감시를 면제받은 이들이 과거의 최종고시인 예부시를 치르고, 이에 급제가 되면 벼슬길로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위에 더 부과되는 시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고려 전기인 성종·예종 연간에 국왕이 주재하여 예부시 뒤에 친시(親試)·복시(覆試)를 시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예부시 급제자들의 급제순위만을 결정하는 시험이었을 뿐이며 상설적으로 시행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이 고려의 과거제는 국자감시와 예부시를 중심으로 일관되어오다가, 무인집권기와 몽골간섭기를 거치면서 권문세족의 발호로 인해 음서로 하급관리가 된 자들과 어린 진사들이 부정으로 예부시에 대거 급제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무능한 인사들이 관직에 파행적인 정치운영을 하여 통치질서를 어지럽게 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1369년(공민왕 18) 과거제를 크게 변혁해서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과거삼층제(科擧三層制)로 바뀌었다. 이에 국학생과 12생도를 포함한 모든 과거지망생은 먼저 각자의 본관지인 해당 도(道)에서 실시하는 향시를 치르게 되었다.

즉 향시는 종래의 향공시·서경시·개경시·국자감시의 기능까지를 포괄한 시험이 되었다. 그러나 재관자들은 따로이 개경시(종래의 일반 유생들이 치르던 개경시와는 내용이 다른 고시)를 거치도록 했는데, 이 시험은 향시, 곧 초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향시나 개경시에 합격한 자들은 예부에서 주관하는 회시에 응시했고, 이어 회시급제자들은 다시 전시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전시는 고려 전기에 시행되던 친시·복시와 마찬가지로 합격여부가 아니라 급제순위만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회시가 본고시의 기능을 함으로써 이전의 예부시에 해당되었다.→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