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

지공거

다른 표기 언어 知貢擧

요약 중국 수·당·송의 과거제에서 시험관을 지공거라 했으며, 우리나라에는 958년 과거제도가 도입되면서 등장했다. 972년 부관인 동지공거를 두었는데 곧 폐지되었다. 996년 지공거를 도고시관이라 했다가 그 이듬해 지공거라고 했다. 1083년 동지공거 1명을 재임용했다. 1315년 지공거를 고시관, 동지공거를 동고시관으로 했는데 1330년 원래의 명칭대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좌주라 했고 합격자는 문생이라 했다. 이들은 고려후기를 거치면서 권문세족이 되거나 신진사류의 출세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공민왕 때 좌주·문생 관계를 없애고 국왕이 친시하는 방안이 강구되기도 했으나, 공민왕 사후 좌주·문생 관계가 부활하여 고려말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제도가 개편되어 지공거제를 폐지했다.

응시자는 거자라고 했다. 중국 수나라의 과거제도에서 시험관을 지공거라고 칭한 이래 당·송에서 사용되었고 우리나라에는 958년(광종 9) 과거제도가 만들어지면서 등장했다. 광종 때 처음으로 지공거가 된 사람은 중국의 귀화인인 쌍기(雙冀)였는데, 경종·성종 때의 지공거는 대부분 귀화인이 맡았다.

972년(광종 23) 부관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두었는데 곧 폐지되었다. 977년(경종 2)에는 국왕이 친시할 때에 한하여 지공거를 독권관(讀卷官)이라고 했다. 그리고 996년(성종 15)에는 지공거를 도고시관(都考試官)이라 했다가 그 이듬해 지공거라고 했다. 1083년(문종 37) 동지공거 1명을 재임용했다. 1315년(충숙왕 2) 지공거를 고시관, 동지공거를 동고시관으로 고쳤는데 1330년(충숙왕 17) 다시 원래의 명칭대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좌주(座主)라 했고 합격자는 문생 또는 은문(恩門)이라 했다. 당시는 과거제와 관료제가 직접 연결되는 시기였으므로 좌주와 문생은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래서 좌주·문생은 동료의식과 집단의식을 가지고 사적인 결합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고려 후기를 거치면서 권문세족이 되거나 지방 신진사류의 출세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따라서 정치운영상 혼란을 일으키는 근원인 권문세족이 성립하는 한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그래서 공민왕의 개혁정치기에는 임박(林樸)이 중심이 되어 좌주·문생 관계를 없애고 국왕이 친시하는 방안이 강구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민왕 사후 좌주·문생 관계가 부활하여 고려말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전시기의 폐단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과거 시험제도를 개편해서 지공거제를 폐지했다.→ 문생, 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