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기

쌍기

다른 표기 언어 雙冀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고려, 한국

요약 고려 광종 때의 귀화인.

아버지는 쌍철(雙哲)이다. 본래 후주(後周) 사람으로 산둥[山東] 반도 등주에 있는 무승군(武勝軍)의 절도순관(節度巡官)·장사랑(將仕郞)·대리평사(大理評事)를 지냈다. 당시 후주는 획기적인 개혁정책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었으며, 철저한 인물 위주의 인사 발탁을 통해 유교적인 중앙관료제를 확립하고 황제 직속의 친위군(親衛軍:殿前軍)을 만들었다.

쌍기는 그의 관직명을 볼 때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른 문신으로 무승군 절도사의 지방 막부에 있다가, 어떤 시기에 후주 왕실의 이러한 인재등용책에 의해 발탁되어 중앙의 부서로 들어간 것 같다. 또한 그의 지방이나 중앙에서의 관직이 모두 법기(法紀) 관계였던 것으로 보아 후주의 왕들이 시행한 개혁에 직접 관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그의 임지였던 등주는 고려에 출입하는 주된 항구였고, 쌍철의 임지였던 칭저우[靑州]는 그 행정통할지였던 것을 보면 후주 관리들 가운데서는 고려에 비교적 정통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956년(광종 7) 후주의 봉책사(封冊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 고려에 머물게 되었는데, 병이 낫자 그를 만나본 광종이 후주의 허락을 받고 원보한림학사(元甫翰林學士)에 임명했다. 958년 과거제도 설치를 건의했고, 이해 5월 처음 실시된 과거에서 지공거(知貢擧:과거를 주관하는 관직)를 맡았다. 이때 시(詩)·부·송(頌)·책(策) 등으로 시험을 실시하여 진사(進士) 갑과에 최섬(崔暹)·진긍(晉兢) 등 2명, 명경과에 3명, 복업과(卜業科)에 2명을 뽑았다. 그의 아버지 쌍철은 산둥 지방 칭저우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아들이 광종의 총애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959년 고려의 사신 왕긍(王兢)을 따라와서 좌승(佐丞)이 되었다. 960년에 실시된 과거에서도 지공거가 되어 진사 갑과에 최광범(崔光範)·서희(徐熙) 외 7명, 명경과에 1명, 의업과(醫業科)에 3명을 뽑았다. 다시 961년의 과거에서도 지공거가 되어 진사 갑과에 왕거(王擧) 외 7명, 명경과에 1명을 뽑았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광종대의 혁신적인 개혁에서의 쌍기의 역할이 과거제도에 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좀더 광범위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이후의 학자들이 광종대의 과거제도는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쌍기를 비판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최승로(崔承老)는 광종을 평한 가운데 "쌍기를 등용한 이후로는 문사를 높이고 중히 여겨 은례(恩禮)가 지나쳤다"고 했으며, 이제현(李齊賢)도 쌍기를 "보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부화(浮華)의 문을 주창하여 후세에 큰 폐단을 남겼다"고 평하고 있다.

사실 광종 때에 과거는 자주 실시된 것도 아니고, 또 당시 관료층 구성에 과거출신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후대에 쌍기가 비판받는 것은 그가 광종의 다른 개혁정책에도 개입하여 당시 이해관계가 달랐던 사람들과의 사이에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