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왕도

다른 표기 언어 王道

요약 왕도사상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맹자는 군주가 어진 마음으로 은혜를 널리 펴나가는 정치를 할 때 바람직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왕도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정전제 시행, 가벼운 세금, 노동력 수탈의 완화, 고의성이 없거나 무지에서 비롯된 죄를 가볍게 처벌하는 등의 양민정책을 시행하는 것, 효제충신의 도덕규범을 가르치는 교화를 들었다. 한편으로 왕도사상은 당시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세력의 이념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 경우 당시 정치적 현실에 따라 개혁세력이 내세우는 왕도정치의 구체적 내용은 달랐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주장한 토지제도 개혁과 신흥사대부가 제기한 사전개혁, 사림파가 주장한 한전·균전제는 그 내용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패도(覇道)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패도가 힘에 의해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면 왕도는 덕에 의해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왕도의 개념은 〈서경 書經〉 홍범(洪範)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거기에서 왕도란 공평무사한 정치를 의미했다. 공자의 덕치사상에서도 왕도의 내용을 보여준다. 그후 왕도사상은 맹자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한대(漢代)이후 유교가 국교로 확립되면서 왕도사상은 유교정치이념의 기본내용으로 정립되었다.

그러나 각 시대 유교의 세계관의 차이에 따라 왕도정치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달랐다. 우선 왕도사상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맹자는 왕도의 핵심적 내용을 인정(仁政)으로 파악하고 그 인정이 가능한 근거를 성선설(性善說)에서 찾았다. 즉 군주가 어진 마음으로 은혜를 널리 펴나가는 정치를 할 때 바람직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도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정전제(井田制)의 시행, 1/10의 가벼운 세금, 노동력 수탈의 완화, 고의성이 없거나 무지에서 비롯된 죄를 가볍게 처벌하는 등의 양민정책을 시행하는 것,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덕규범을 가르치는 교화(敎化)를 들었다.

그후 한대에 유교의 국교화가 이루어질 무렵 왕도사상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재이사상(災異思想)과 결합하게 된다. 이 새로운 내용의 왕도사상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동중서(童仲舒)였다.

동중서에 따르면 자연현상과 인사, 특히 정치는 긴밀하게 대응하는 것이어서 군주의 통치행위는 우주질서의 근원인 천(天)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의 통치에 잘못이 있을 때는 천이 자연의 재해나 이변을 통해 견책을 내린다. 군주가 이러한 견책을 무시하고 더욱 무도한 통치를 할 때는 천명을 바꾸어 국가를 전복하고 멸망시킨다. 이와 달리 군주가 천의에 따라 양민과 교화에 힘쓰면 상서(祥瑞)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동중서에 의해 천인상관설과 결합한 왕도사상은 그후 한·당대를 통해 유교정치사상의 기본 내용으로 이어져왔다.

일찍부터 유교를 받아들인 한국도 이러한 왕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유교정치사상은 전통적·불교적 정치이념을 보완하면서 집권적인 국가체제의 성립·발전에 기여했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지배적 정치이념으로 확립되었는데 그 기본 내용 가운데 하나가 왕도사상이었다.

고려시대의 왕도사상은 군주가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인정(仁政)을 베풀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늘이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인(仁)의 덕을 갖고 있듯이 하늘을 대신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 역시 인의 덕에 바탕을 둔 정치를 통해 민생의 안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주에게는 천의 덕을 체득하기 위한 '체천'(體天), 즉 '체인'(體仁)의 노력을 강조한다. 중국과 한국에서 왕도사상의 내용이 또 한번 변화하는 계기는 성리학에 의해 주어졌다.

즉 종래까지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성격을 갖던 천을 자연법칙적인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리학은 인간의 윤리도덕도 천리(天理)에 바탕을 둔 것으로, 또 그 도덕규범은 인간의 내면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왕도정치에 대한 이념적 설명도 바뀌었다. 왕도정치의 실현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리에 따른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윤리도덕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도정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위정자들의 도덕적 수양과 인민에 대한 교화였으며, 또 그러한 방법을 통해 왕도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의 경우 고려말에 이미 성리학이 도입되었으나 고려말 조선초에 전통적인 왕도사상이 극도로 발전했으며, 성리학적인 왕도사상은 16세기 사림파에 의해 정립되었다. 사림파의 개혁이념인 도학정치의 이념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왕도사상을 재해석한 것으로 삼강오상의 윤리도덕 실천을 그 기본 내용으로 삼았다.

그리고 17, 18세기 지배층의 예(禮)에 대한 관심 역시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당 유학의 왕도사상이든 성리학의 왕도사상이든 그것은 모두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집권적 관료제 통치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한편으로 이 왕도사상은 당시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세력의 이념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 경우 당시 정치적 현실에 따라 개혁세력이 내세우는 왕도정치의 구체적 내용은 달랐다. 예를 들어 맹자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근본 조치로 정전제의 시행을 통한 양민을 들었고, 고려 말기의 신흥사대부, 16세기의 사림파, 18, 19세기의 실학자들이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신흥사대부가 제기한 사전(私田)개혁, 사림파가 주장한 한전(限田)·균전제(均田制) 실시, 실학자들이 주장한 토지제도개혁론은 서로 그 내용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