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성리학

다른 표기 언어 性理學 동의어 주자학, 朱子學, 송학, 宋學, 송명이학, 宋明理學, 신유학, 新儒學, 정호, 程顥, 정이, 程頥, 정주학, 程朱學, 정주성리학, 程朱性理學, 정주이학, 程朱理學, 이학, 理學, 도학, 道學, 송명리학

요약 남송의 주희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가지며,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질서를 갖는 것이다.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의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주희(朱熹)
주희(朱熹)

중국에서는 이미 당대부터 종래의 훈고학(訓詁學)과는 다른 유교학풍을 세우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그 노력은 북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라는 사상체계와 학문방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후 남송의 주희(朱熹 : 1130~1200)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朱子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대의 왕수인(王守仁 : 1472~1528)의 학문·사상, 즉 양명학까지 성리학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만을 성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송대 성리학의 성립에는 불교 철학이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성리학의 세계관과 불교의 세계관은 근본적인 성격이 달랐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현실의 자연과 사회는 궁극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가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회를 도덕적인 본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개별성을 긍정했다.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理)와 (氣)의 개념에 의해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기는 맑음과 흐림, 무거움과 가벼움 등에 따른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갖는다.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적 질서를 갖는 것이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법칙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만물의 존재 근거가 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만물에는 모두 이가 내재한다는 점에서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인간 이해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으로 체계화되었다. 본연지성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이로서, 도덕적 본성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기질지성은 인간 형성에 관여하는 기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육체와 감각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인간 본능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본연지성에 따른 행위는 선한 것이며, 기질지성에 따른 행위는 인욕에 의해 악으로 흐르는 경향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보존하는 도덕 실천을 통해 본연지성에 따르는 생활방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방식을 가지기 위해서 사물에 존재하는 천리를 인식하는 궁리(窮理)와 인욕의 발동을 억제하는 내면적 수양으로서의 거경(居敬)이라는 수양 방법이 제시되었다(거경궁리). 그런데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의 구체적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나아가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따라서 성리학은 이의 보편성을 통해 유교적 윤리도덕과 명분론적 질서의 보편성을 교설하며, 인간은 명분론적 질서 속에서 각각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결국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한국 성리학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고려 말기 원나라를 통해서였다.

이미 고려 중기부터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까지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무인란 이후 유불일치의 사상 경향이 대두하면서 유학자들 역시 심성 수양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학문사상계의 이러한 동향은 이 시기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에 대응하여 새로운 방향에서 주체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후 원나라를 통해 도입된 성리학은 이러한 노력에 부응하는 것으로서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새로운 개혁이념으로, 국가 교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당시의 유학자들은 유불일치(儒佛一致)의 사상경향 속에서 불교적 심성 수양과 유교적 심성 수양의 차별성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양자의 차별성이 명확하게 된 것은 왕조 교체를 전후한 시기에 불교 비판이 본격화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비로소 유교적 심성 수양은 윤리도덕의 실천을 포함하는 것이며, 불교적 심성 수양은 현세를 초월한 정신적 해방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명확한 차별이 인식되었다. 정도전(鄭道傳 : 1337~98)·권근(權近 : 1352~1409)은 성리학의 이기론·인성론에 바탕을 두고 불교의 초세속적 성격과 그 철학사상을 비판했으며, 초학자를 위한 성리학의 입문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특히 권근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된 성균관 중심의 관학 교육도 유교교육의 기본 교재로 〈소학〉을 채택했고, 경학의 내용도 육경(六經) 이전에 사서(四書)의 학습을 강조했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유교적인 도덕규범의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고려 말기 이래의 정치·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성리학의 교육과 보급이 행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당시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념적 대응을 모색하기보다는 이미 확립된 예제·법제의 준수를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상경향이었다.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사림계 학자관료들은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입장에서 성리학을 다시 이해하고, 재지사족까지 포함한 지배층 일반의 도덕적 실천을 통해 당면한 사회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을 강조했다.

나아가 국가의 예제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의 질서, 가족제도까지도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재편할 것을 주장하여 향약 등을 실시했다. 조광조(趙光祖 : 1482~1519)를 대표로 하는 사림계 학자관료들의 개혁이념은 도학정치사상으로 집약되었다. 도학정치의 이념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유교의 전통적인 왕도사상을 재해석한 것으로, 삼강오상의 윤리도덕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을 정치의 기본 내용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정치는 군주를 비롯한 지배층의 도덕적 실천과 함께 인민에 대한 도덕적 교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도학정치사상은 지배층의 도덕적 책임의식을 더욱 심화하고, 나아가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명분론적 질서에 따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5세기 말엽부터 사림계 학자관료들은 이러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사회적 노력을 계속했으나, 당시 집권세력의 탄압에 의해 그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정치적·사회적 실천의 이념적 근거인 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추구되었으며, 그결과 16세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학문의 중심 내용으로 자리잡았다.

이언적(李彦迪 : 1491~1553)과 서경덕(徐敬德 : 1489~1546)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이황(李滉 : 1501~70)의 단계에 와서 특히 심성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이(李珥 : 1536~84)의 〈성학집요 聖學輯要〉에서 보이듯 성리학에 바탕을 둔 경세론도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성리학의 이론적 특징을 보여주는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인심도심논쟁(人心道心論爭)이 시작되어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이의 이기겸발설(理氣兼發說)로 체계화된 것도 그무렵이었다.

퇴계 이황(李滉)
퇴계 이황(李滉)

이러한 이론적 탐구를 통해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다양한 사상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주자성리학의 이기이원론적 세계관과는 달리 기일원론의 세계관을 확립한 서경덕의 사상체계, 이기이원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 심성 문제에 보다 깊은 이해를 보인 이황의 사상체계, 이기일원론적인 세계관에서 심성 문제를 설명한 이이의 사상체계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조식(曺植 : 1501~72)은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황·이이와 차이를 보이지만, 도덕 실천의 문제를 강조하는 점에서는 그들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는 주희에 의해 성리학의 문제들은 이론적 탐구의 여지 없이 해명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도덕 실천에 더욱 힘쓸 것을 강조하는 학풍을 수립했다. 이와 같이 성리학 내부에서 다양한 학문과 사상적 흐름이 형성되고, 그것이 학문이나 도덕적 실천에서 사우(師友)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흐름과 결합하면서 16세기 말엽에는 이황·조식·이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학파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학파에 의해 각 서원에서의 연구와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성리학은 17세기 학문·사상의 지배적 조류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예학의 발전을 이 시기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성리학에서 강조되는 명분론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윤리도덕이 제대로 실천되어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윤리도덕의 객관적 실천 규정인 예를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따라서 성리학의 발달은 예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16세기의 성리학자들도 이미 예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17세기에는 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예의 구체적 시행 문제에 대한 탐구로까지 이어지면서 다양한 예론으로 정립되었다는 점이 이 시기 예학의 특징이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주자가례〉를 근간으로, 사대부 중심의 예학을 발달시키면서 이념적으로는 '천하동례'(天下同禮), 즉 예의 보편적 적용을 주장하는 서인의 예론과, 〈주자가례〉와는 다른 체제의 예서를 편찬하면서 이념적으로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 즉 군주의 경우에는 예의 적용이 달라야 함을 주장하는 남인의 예론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예론의 차이가 정치적 대립과 결부하여 예송(禮訟)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는 이기심성론에서도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퇴계학파 가운데 주로 영남남인을 중심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계승하여 이이의 이기겸발설을 비판하는 사상체계를 확립해갔다. 이현일(李玄逸 : 1627~1704)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학문·사상 경향은 이발(理發)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는 점에서 주리파(主理派)로 불린다.

이에 대해 이기겸발설을 계승한 학문·사상 경향은 기발(氣發)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주기파(主氣派)로 불린다. 18세기 초반에는 주기파 내에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 벌어졌으며, 18세기 후반에는 임성주(任聖周 : 1711~88)에 의해 기일원론의 철학사상이 정립되기도 했다.

그후 19세기에는 철학적으로 주리론의 경향이 강화되면서 기정진(奇正鎭 : 1798~1879)이나 이진상(李震相 : 1818~86)이 이일원론적인 사상체계를 정립했다. 그러나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성리학은 변화하는 사회현실에 전진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학문·사상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그대신 실학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학문·사상 조류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