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

사대부

다른 표기 언어 士大夫

요약 중국 고대의 봉건제도에서는 그 신분층이 천자·제후·대부·사·서인 등 5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군주를 제외하면 대부와 사가 서민과 구분되는 지배계층이었다. 이러한 사대부계층은 고대 유교에 불교·도교의 형이상학을 가미한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았다. 사대부계층의 성리학은 원의 통치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고려 말기에 혁명파와 온건개혁파로 양분되었던 사대부계층은 조선이 개국한 뒤 양반관료체제를 구성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훈구파와 사림파로 갈라지기도 했다. 특히 사림파는 성리학 본래의 이념에 따라 중소지주층의 자율성이 최대로 보장되는 정치·경제·사회 구조의 확립을 추구했다. 이들은 중앙정계뿐만 아니라 지방사회까지도 장악하여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대부(士大夫)
사대부(士大夫)

중국 고대의 봉건제도에서는 그 신분층이 천자(天子)·제후(諸侯)·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 등 5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천자와 제후는 황제 및 왕을 뜻하고, 이들 군주를 제외하면 대부와 사가 지배계층이었으며, 피지배자인 서민과 구분되는 계층이었다. 주(周)나라 때는 사의 상층(上層)에 있는 자를 사대부라 했으며, 이들은 신하이면서 동시에 서민 위에 서서 그들을 지배하는 계층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신분은 세습되었다. 진(秦)나라 때 군현제(郡縣制)가 성립됨에 따라 관료 지배제가 확립되었고, 사대부의 신분은 일대(一代)에 한정되기 시작했다.

육조(六朝) 시대에는 관리를 뽑는 가문이 고정되어 서민에 대해서 상류 특권층인 문벌 귀족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이르러 과거제도가 실효를 거두어 관원 중에서도 특히 과거출신의 문신 관료들을 구별하는 데 사용했고, 사회적으로 농업·공업·상업 이외의 독서인(讀書人)·지식 계층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에 송나라 이후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으며 강남지역의 농업을 근거로 새로운 지주층으로 성장했다.

또한 고대 유교에 불교·도교의 형이상학을 가미한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을 확립시켜 사대부층 자신의 지배이념으로 삼았고, 나아가 사회윤리·가족윤리로 주창했다. 이에 입각해 사대부층은 모든 법제나 의식을 사대부 중심으로 바꾸어갔다. 과거응시자격이나 관리선발제도에서 사대부층을 비롯한 지식층의 문호를 개방·확대하며 왕조례(王朝禮)를 사대부의 가례(家禮)로 통합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대부층의 성리학은 원(元)의 통치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당시 고려시대 신진사류들은 성리학적인 이념 위에 국가의 제도 및 의례를 바꾸고 자신들의 계층적 의견을 수렴하는 여론정치를 수행했다. 이들은 이미 무인정권시기에도 과거제 등을 통하여 진출했으며, 원의 간섭시기에는 관료정치를 재정비함에 따라 폭넓게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소양과 행정적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는 능문능리(能文能吏) 집단이었다. 원간섭기에 원대 성리학을 수용한 안향·이제현·백이정·민지·권부·우탁·이곡·이색 등은 비록 자신들의 출신 기반이 권문세족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경세적 유교의 진작을 통해서 중소지주나 하층민의 이해를 어느 정도 조정함으로써 현실체제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개선하려고 했다.

원의 간섭시기에는 신유학이 수용되는 추세와 관련하여 몇 차례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도되었다.

13세기말 충선왕이나 충목왕이 비슷한 성격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이 2차례 개혁의 배경에는 신유학의 소양을 지닌 학자 관인층의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권문세족에 비하여 한층 낮은 가문의 출신자로서 과거를 통해 입사한 부류였다. 사대부 계층이 급성장하여 유학교육을 장려함으로써 신유학에 대한 이해가 학문적으로 심화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색·정몽주·김구용·박상충·박의중·이숭인·이존오·정도전 등이 성균관을 통해서 성장한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향리가문 출신자로 자신의 능력으로 과거에 급제한 엘리트 관원이었으며, 삼남지방에 중소지주적 경제기반을 가진 전형적 신흥세력이었다. 그리고 공민왕대 이후로 외침이 극심해지고 무장세력이 급속히 성장함으로써 사대부는 그들과 합작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잦은 전란 속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워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이성계는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급성장한 전형적인 신흥무장이었다.

문인사대부들은 무장세력과 제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보수세력을 제거하고 새 왕조를 세우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공민왕대 이후로 한량 또는 산관·품관이라 불리는 광범위한 사대부 계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직함은 있으나 직사가 없는 관원인 한량품관으로, 또는 검교직·동정직·첨설직을 통하여 관권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향촌에 거주하는 독서계급으로 강력한 사회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신진사대부의 일부는 하층민을 압박하는 '향원'(鄕愿)으로, 그리고 중소지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 신진사대부의 의지가 반영된 공민왕대의 개혁운동은 2차에 걸쳐 벌어졌지만 실패했다. 사대부의 개혁운동은 우왕대를 고비로 하여 크게 두 파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고려의 테두리 안에서 온건한 개혁을 추진하려는 일파와 역성혁명까지 내다보면서 급진적 개혁을 시도하려는 일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것은 특히 사전(私田)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둘러싸고 진행되어 급진파의 뜻대로 다시 양전(量田)을 하고 전반적인 전제를 정비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결국 과전법으로 일단락된 전제개혁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 말기에 혁명파와 온건개혁파로 양분되었던 사대부계층은 조선이 개국한 뒤 양반관료체제를 구성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훈구파와 사림파로 갈라지기도 했다. 특히 사림파는 조선이 그동안 취한 부국강병정책과 관(官) 주도적 경제정책, 중소지주층에 대한 통제, 양인에 대한 제일적 지배에 대해 불만을 품고 성리학 본래의 이념에 따라 중소지주층의 자율성이 최대로 보장되는 정치·경제·사회 구조의 확립을 추구했다.

〈주례〉보다는 〈소학〉·〈가례〉·〈춘추〉 등을 중요시하고 향약·사창·유향소·서원 등 향촌사대부의 자율적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각종 촌락조직의 시행을 주요정강으로 내세웠다. 또한 그러한 조직체의 자치적 운영을 통해서 지주·전호 관계를 안정시키고, 그 토대 위에서 '사-민'지배관계를 정착시키고자 했다. 즉 사대부 주도의 사회건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중앙정계뿐만 아니라 지방사회까지도 장악하여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