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염무

고염무

다른 표기 언어 Ku Yenwu , 雇炎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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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중국 장쑤 성[江蘇省] 쿤산[崑山], 1613. 7. 15
사망 1682. 2. 15, 산시 성[陝西省] 화인[華陰]
국적 중국, 명(明)

요약 명나라의 지배 사상이었던 성리학의 난해하고 실제와 동떨어진 이론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경세치용 탐구를 주장하며 청나라의 새로운 학풍인 실학을 개척했다.
만주족이 청조를 세우자 이에 반대하여 평생 중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명의 멸망 원인을 연구했다. 그 이유는 학자들이 중국사상의 정통성에만 집착했고, 보수적인 유교 사상이 변화하는 정치적·경제적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문은 사회에 쓸모 있는 지식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넓은 귀납적 방법과 문헌고증학적 연구방법으로 고전들의 본뜻을 파악하려 한 학파인 한학파를 세워 고증학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그의 사상은 유학의 틀 안에서 중국의 전통과 서양의 지식을 결합하고자 했던 19세기 중체서용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1,000년 동안 중국 제국을 떠받쳐 온 성리학의 난해한 공리공론과 책에서만 얻은 쓸모없는 지식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청대(淸代)의 새로운 학풍을 개척했다. 그의 저작은 유학의 틀 안에서 합리적 핵심을 찾아 중국의 전통과 서양의 지식을 결합하고자 하는 19세기 '중체서용운동'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그는 만주족이 청조를 세우자 젊었을 때는 이에 반대하여 싸웠으며 일생 동안 중국 전역을 떠돌아 다니며 명이 멸망한 원인을 연구했다. 그는 중국문명이 쇠퇴하게 된 것은 중국사상의 정통성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이며, 유교적 사상을 몇 가지 고정된 틀로 묶어 놓아 정치적·경제적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쓸모있는' 지식, 즉 경세치용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교의 경전을 해석하는 데에만 몰두한 성리학의 주석서를 버리고 원전(原典)과 성현들에 보다 근접해 있는 한대(漢代) 학자들이 쓴 주석서로 돌아가자고 제창했다.

그가 세운 '한학파'는 고전들의 본뜻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넓은 귀납적 방법과 문헌고증학적 연구방법을 옹호한 학파였다. 고염무는 여행과 탐구활동을 통해 얻은 실제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일지록 日智錄〉·〈천하군국이병서 天下君國利病書〉 등 가치있는 여러 권의 책을 편찬했다. 지식의 궁극적 원천으로 고전만을 일관되게 강조했기 때문에 그의 학문적 활동은 문헌고증학과 문헌비판에만 중점을 둔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