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무제

다른 표기 언어 Wu Ti , 武帝 동의어 유철, 劉徹
요약 테이블
출생 BC 156
사망 87/86. 3. 29
국적 한(漢), 중국

요약 군사적 정복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죽은 뒤 '무력'을 의미하는 무제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행정 개혁은 중국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고 유교만 인정한 정책은 그후의 동아시아 역사에 끊임없는 영향을 미쳤다.
무제는 BC 141(또는 140)년에 제위에 올랐다. 초기에는 친척과 궁정신하들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BC 130년대말에 이르자 본질적으로 방어에 토대를 둔 전임자들의 외교정책이 자신의 외교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정복과 영토 확장에 전념했다. 그의 치하에서 중국은 중앙아시아로 영역을 넓혀, 중국과 페르가나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들도 중국에 복속되었다. 무제는 오랜 전쟁과 그밖의 사업으로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에 다른 수입원을 찾아야 했다. 그로 인해 백성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고, 소금·철·술에 대한 국가 전매제도를 시행했다. 무제의 마지막 4년은 후퇴와 후회의 기간이었다. 그의 제국은 더이상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지탱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무제(武帝)
무제(武帝)

본명은 유철(劉徹). 유교를 국교로 지정했다.

무제는 한의 제6대 통치자인 경제(景帝)의 11번째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맏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는 제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황족들은 7세인 그를 황태자로 책봉해 후계자의 지위를 확보해주었다. 그는 친척과 스승들로부터 기본적인 사상이 상반되는 두 학파인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영향을 받았다. 도가에서는 법률 만능주의 철학을 받아들여 편의주의적 통치를 바탕으로 한 독재적 통치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고, 유가에서는 전례(典禮)를 비롯한 여러 가지 통치 수단을 받아들여 점점 커지는 한나라 군주들의 권력을 억제하려고 애썼다.

무제는 BC 141(또는 140)년에 제위에 올랐다.

초기에는 친척과 궁정신하들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BC 130년대말에 이르자 본질적으로 방어에 토대를 둔 전임자들의 외교정책이 자신의 외교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BC 133년에 중국 북부의 국경지방을 끊임없이 침략해 중국을 크게 위협하던 유목민족인 흉노족을 공격했고, 그후로는 제국의 영토확장에 전념했다. 그는 병사들의 어려움보다는 전쟁의 승패를 더 중시했기 때문에 BC 101년에 이르자 중국의 지배력은 사방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중국 남부와 베트남 중·북부 지역이 한 제국에 병합되었다. 무제는 또한 흉노족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고비 사막 건너편으로 군대를 보냈지만,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한의 군대가 가장 멀리 원정을 떠난 것은 중앙 아시아의 페르가나로 진군했을 때였다. BC 104년의 제1차 원정은 실패했지만, 무제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비타협적 태도는 을 얻고 싶은 욕망과 자존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의 군대는 만성적인 군마(軍馬)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그가 페르가나에서 얻고자 한 말은 전쟁 도구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말들은 주로 '한혈마'(汗血馬)로 피부출혈을 일으키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피를 땀처럼 흘리는 말이었는데, 이런 말은 그에게 신비로운 의미가 있었다. 한혈마를 갖는 것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증표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BC 101년에 떠난 제2차 원정대는 이 유명한 말 3,000여 필과 페르가나 왕의 목을 갖고 돌아왔다.

또한 중국과 페르가나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들도 중국에 복속되었다. 무제는 이제 중국에서 아주 멀다고 생각하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무제는 오랜 전쟁과 그밖의 사업으로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에 다른 수입원을 찾아야 했다. 그로 인해 백성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고, 소금·철·술에 대한 국가 전매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통치 후반기에는 심한 재정 곤란과 민중봉기에 직면했다. 국가기구에 대한 통치도 그의 경제적 통제와 보조를 맞추어 점점 더 엄격해졌다.

관료들을 철저히 감독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했고, 정상적인 관료체제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복으로 끌어들여 관료들이 그의 뜻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는 대개 자신처럼 가혹하고 엄격하며 무자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측근으로 발탁했다. 무제는 대외적으로 침략적 정책을 취했지만 유교를 정통국교로 채택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교는 인자한 아버지 같은 인물을 이상적 통치자로 여겼는데, 그는 이런 통치자의 모습에는 별로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문학적 아름다움은 높이 샀고, 특히 의례를 강조하는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형식적 의례는 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을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무제가 실행한 의례는 대개 2가지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의례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한조(漢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불멸을 얻으려는 무제의 끊임없는 노력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비결을 알고 있는 신선들을 소개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사람들을 여러 곳에 보내어 신선들이 살고 있는 섬을 찾게 했고, 혼령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한 궁전과 탑을 지었다.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그 세계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열망 때문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무제의 마지막 4년은 후퇴와 후회의 기간이었다. 그의 제국은 더이상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지탱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는 의심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BC 91년 한 측근이 황태자가 그를 죽이려고 마법을 썼다고 모함하자, 궁지에 몰린 황태자는 봉기를 일으켰다.

그결과 수천 명이 살해되고 황태자는 자살했다. 무제는 죽기 직전에 8세 된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어린 황태자의 어머니인 조씨(趙氏)를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옥에 가두었다. 조씨는 '슬픔 때문에 죽은 것'으로 전해졌지만 무제는 어린 황제가 자신처럼 외척들에게 지배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내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두었고 어쩌면 아내의 죽음을 유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BC 87년에 죽었다.

무제는 군사적 정복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죽은 뒤 '무력'을 의미하는 무제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행정 개혁은 중국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고 유교만 인정한 정책은 그후의 동아시아 역사에 끊임없는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