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숙

김창숙

다른 표기 언어 金昌淑 동의어 문좌, 文佐, 심산, 心山, 벽옹, 躄翁
요약 테이블
출생 1879(고종 16)
사망 1962
국적 한국
문좌(文佐)
심산(心山)

요약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로 8·15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이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칩거하며 유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다져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제1차유림단사건'과 제2차유림단사건'을 이끌었다. 이후 활발한 항일운동을 벌였다. 해방 이후 난립한 유림단체의 통합에 힘썼고, 친일파 유림이 득세했던 성균관을 정비하여 성균관대학을 설립했다. 1953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초대 총장이 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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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출신 및 한말의 활동
  3. 일제강점기의 항일투쟁
  4. 해방 후의 활동
김창숙
김창숙

개요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로 8·15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이다.

출신 및 한말의 활동

본관은 의성.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翁). 한때 우(愚)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아버지는 호림(頀林)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이름이 높던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種錫)·이승희(李承熙)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 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 請斬五賊疏〉를 올렸다. 1908년 대한협회가 설립되자 고향인 성주에 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했다. 1909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했다. 같은 해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주장 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규탄하는 글을 중추원에 보냈다.

일제강점기의 항일투쟁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한동안 칩거하며 유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다져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137명의 연명으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국내의 향교에 배포하고, 이를 갖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김규식을 통해 파리 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했다. 이 사건으로 곽종석 등 수백 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유림단사건'이다. 같은 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교통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파쟁을 조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쑨원[孫文]을 비롯하여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여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주선했다.

한편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1920년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사민일보 四民日報〉를 발간하여 그중 일부를 국내로 우송했으며, 신채호(申采浩)를 도와 베이징[北京]에서 잡지 〈천고 天鼓〉를 발행했다. 1921년 이승만이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하자, 이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신채호 등과 연명으로 발표했다.

그 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24년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교섭, 만주와 몽고 접경지의 황무지를 조차·개간하여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8월 국내에 잠입, 모금활동을 폈으나 기대한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모금활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계 인사가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제2차유림단사건'이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과 청년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친일파와 일제의 통치기관을 박멸하기로 결정하고, 나석주(羅錫疇)로 하여금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게 했다. 1927년 상하이[上海] 공공조계(公共租界)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4년 9월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한 뒤에도 일제의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꼿꼿이 유지했다. 1945년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어 왜관경찰서에 다시금 구금되었으나, 일제패망으로 석방되었다.

해방 후의 활동

해방 이후 일반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활동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인민공화국 반대와 임시정부 지지, 신탁통치 반대 등 우익 정객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문제에 대해서는 한민당 및 이승만 계열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 비상국민회의 8인 특별위원을 거쳐 1946년 2월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부수립을 위한 모체가 아니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일 뿐이라 하여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이 해 봄 해방 이후 난립한 유림단체의 통합에 힘써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를 결성했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일제 때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어 친일파 유림이 득세했던 성균관을 정비하는 등 유림의 재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했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隣會)의 토지재산을 기부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그해 9월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았다.

학교설립 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1948년 김구·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8월 단독정부가 수립된 뒤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51년 이승만에게 하야경고문을 냈다가 투옥되었으며, 이듬해 부산 정치파동 때 이시영(李始榮)·조병옥(趙炳玉)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여 이승만정권과 투쟁했다.

1953년 2월 전국의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1955년 재단분규로 사임한 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2년 죽었다. 그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심산만초〉·〈벽옹만초〉 등이 있으며, 〈벽옹칠십삼년회상기〉 초고를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여 〈심산유고 心山遺稿〉로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