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이승만

다른 표기 언어 李承晩 동의어 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
요약 테이블
출생 1875, 황해 평산
사망 1965. 7. 19, 미국 하와이
국적 한국
직업 정치인, 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
우남(雩南)

요약 대한민국의 1·2·3대 대통령. 해방 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광복 후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로 정부 수립에 앞장섰고, 1948년 제헌국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개헌을 거듭하며 4선을 했으나, 네 번째 임기를 시작하기 전에 4.19혁명이 일어나 사임했으며, 이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노후를 보내다가 현지에서 별세했다.

목차

펼치기
  1. 정의
  2. 초기 생애
  3. 상해 임시정부
  4.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초대 대통령 당선
  5. 대통령 재임 시기
    1. 여순사건
    2. 국가보안법
    3. 반민특위
    4. 농지개혁
    5. 6.25 전쟁
    6. 발췌개헌과 제2대 대통령 당선
    7. 사사오입 개헌과 제3대 대통령 당선
    8.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사법 살인'
    9. 3·15 부정선거
    10. 4·19시민혁명과 대통령직 사임
  6. 퇴임 이후
이승만
이승만

정의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 독립운동가, 정치가.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초기 생애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에서 아버지 이경선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두 형이 천연두에 걸려 이승만의 출생 전에 죽어 사실상 6대 독자로 자랐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본관은 전주이다.

세살이 되던 1877년 한성로 이사하고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남산 서쪽에 있는 도동에 정착했다. 주로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배웠다. 1895년 스무 살의 늦은 나이로 배재고등학교의 전신인 배재학당에 입학해 아펜젤러 등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배웠다. 특히 영어 공부에 집중해 1895년 8월부터는 배재학당의 초급영어반 교사를 맡기도 했다.

1896년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재필이 1886년 11월 학생들의 토론모임인 협성회를 만들자 이승만은 이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1898년 <협성회주보>가 창간되자 주필을 맡아 정부를 비판하는 논설 등을 발표했다. 같은해 3월 열린 만민공동회에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1899년 1월 이승만은 박영효 세력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수감 시기에 기독교도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종신형을 받았던 이승만은 1899년 1월부터 5년 7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다, 1904년 8월에 민영환의 도움으로 특사로 석방됐다.

같은해 겨울 고종의 밀사가 되어 미국을 방문했다. 이승만의 임무는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일본의 조선 침략 저지에 협조해주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와의 면담은 이루어졌으나, 이미 미국과 일본 사이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외교 성과를 올릴 수 없었다.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미국에 머무르며 공부를 시작했다. 1905년 2월 조지 워싱턴 대학 학부 2학년에 입학하여 2년 4개월 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1910년 3월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 같은 해 7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관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이승만은 1910년 10월 10일 서울로 돌아와 1912년 3월까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YMCA는 일제의 탄압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이승만은 기독교 전도사업과 구국문화운동에 골몰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은 조혼했던 아내 박승선과 이혼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신민회 회원 105명을 검거하는 '105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체포 대상에 올랐던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1912년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 기독교 감리회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출국해 위기를 모면했다.

1913년 3월 옥중 동지이자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의 요청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로 갔다. 이승만은 이 곳에서 한인 중앙학원, 한인여자대학, 한인 기독학원 등을 세우는 등 교육사업을 펼치며 세를 확장했다. 당시 하와이는 전체 미주 한인 1만여 명 중 절반 가량이 살고 있는 곳으로, 막강한 권한과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와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됐다. 당시 이승만은 국내외 기독교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다, 미국에서 딴 박사학위가 명성을 높여주었고 하와이에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인지도가 더욱 높아졌다.

임시정부의 추대를 받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위원장이 되어 활동했다. 임시정부의 명칭을 영어로 'Republic of Korea'라고 정하고 자신의 대외호칭을 대통령(President)로 정하고 각국에 통보했다.

이를 두고 안창호가 이승만에게 대통령 호칭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등 적지 않은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맞섰고 이승만의 주장대로 1919년 9월 개헌이 단행됐고,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됐음에도 1년 째 상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미국에서만 활동해 점차 임시정부 각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1920년 처음 상해에 나타났으나 각료들과의 갈등은 지속됐고, 1921년 5월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또 자금 문제도 불거졌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에게 자금을 걷었으나 본인의 활동비로 다수를 쓰고 임정에 돌아가는 돈은 매우 적었다. 결국 1923년부터 이승만 탄핵론이 제기됐고,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이승만을 탄핵했다.

탄핵된 이후 7년간 이승만은 정치적 암흑기를 걸었다. 1932년 11월 당시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이승만을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이승만은 1933년 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을 중립국으로 인정해달라는 탄원을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승만은 이곳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고, 이들은 1934년 10월 결혼했다.

이승만은 1941년 일본이 태평양의 여러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의 <일본 내막기>를 출간했다. 이 책은 출간 당시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승만은 이 책으로 자신의 이름을 미국과 유럽에 알릴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초대 대통령 당선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 뒤 한반도에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했다. 이승만은 10월 1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임시정부 불승인 정책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입국해야했던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당시 미군정을 이끌고 있던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조선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소개하는가 하면, 이승만에게만 라디오 방송에 나가 전 국민을 상대로 연설할 수 있는 특전을 줬다.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폭발적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23일 한국민주당, 조선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등 좌·우익을 망라한 조직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립촉성회)를 발족시켜 '좌우 합작'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박헌영 등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은 '친일파 배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립촉성회에서 철수했다. 이때 이후 이승만은 반공노선을 분명하게 내세우기 시작했다.

미국·소련·영국의 '모스크바 3상 회의'가 막바지이던 1945년 12월 28일 <동아일보>에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가 실렸다. 남한 사회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매주 방송을 통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연설을 했고, 전국을 순회하며 반탁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김구와 함께 반탁 운동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독립촉성회의 조직이 크게 확대됐다.

남한의 좌·우익은 신탁통치의 찬성-반대로 갈려 극심한 대립을 빚었다. 그러던 중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한 연설에서 통일 정부를 세우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며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와 같은 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에 한민당이 지지하고 나섰고,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조직으로 민족통일총본부를 설립하여 자신이 총재가 됐다. 이로써 이승만은 우익진영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관할권을 UN총회에 넘겼다. 같은해 11월 14일 UN총회는 UN감시하에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선거의 실시를 가결했다. 소련이 이를 전면 거부했고, 1948년 2월 미국은 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포고를 발표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반대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고, 반대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제주도에서는 군인과 경찰이 3만 명 이상의 도민을 학살하는 4·3사건이 벌어졌다.

5월 10일 총선을 통해 헌법을 만들기 위한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의장, 신익희를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제헌헌법 초안은 의원 내각제를 골자로 한 정부수립안을 채택했으나,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주장했다. 제헌국회는 이승만의 뜻을 받아들여 1948년 7월 12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7월 17일에 공포했다. 7월 20일에 간접선거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 재임 시기

여순사건

정부 수립 후에도 제주도에서는 양민 학살이 계속되고 있었다. 제주도에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던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15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에도 제주도로 1개대대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남로당 소속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은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으나 10여 일만에 미군과 정부군에 진압당했다. 이로 인한 사망자는 무려 2600여 명에 달했고, 1만 7000여 명이 반란 가담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그중 866명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승만은 군대 내의 남로당 세력을 색출하라고 지시해 4749명의 군인을 숙청했다.

국가보안법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국가보안법을 마련해 국회에 상정했다. 야당의원들의 반발에도 이승만과 한민당 연합세력은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켜 1948년 12월 1일 공포했다. 국가보안법 공포 이후 1년 동안 체포된 사람은 무려 11만 명에 달했고, 경찰은 2만 명이 증강되고 군인은 4배로 강화됐다. 언론에 대한 검열도 강화되어 정권을 비판하는 신문은 폐간되고, 방송국은 국영화됐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과거 좌익에 가담한 적이 있는 사람은 강제적으로 이 단체에 가입하게 했다.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준다는 취지를 내세웠으나 가입을 거부하면 폭력을 일삼았고,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협박했다. 1950년대 초 국민보도연맹 회원은 무려 50만 명에 육박했는데, 좌우익을 구별하지 못하는 문맹자나 도시 빈민들이 다수였다.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은 6.25 전쟁 때 빨갱이로 몰려 대부분 학살됐다.

반민특위

정부 수립 이후 친일파 청산이 가장 첨예한 문제로 등장했으나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1948년 9월 7일 국회에서 재석의원 141명 중 103명 찬성의 압도적 지지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됐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됐다. 이승만은 반민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친일파 처단보다 나라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면서 친일파 처단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반민특위가 구성되자, 이승만 정부는 경찰을 포함한 친일 고위관료와 추종세력을 동원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1949년 5월 17일, 6월 21일 반민특위의 주요 의원들이 남로당과 연계해 프락치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검거하는 '국회 프락치사건'이 벌어졌다. 또 무장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의 직원 35명을 체포, 구금하기도 했다.

한민당이 주축이 되어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로 한정시키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1949년 7월 7일 반민특위 소속자 전원이 사임했다. 같은해 8월 22일 국회에서 반민특위 폐지안이 통과되어 이승만 정부의 친일파 청산은 무산됐다.

농지개혁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해방 당시 한국 농민들은 84%가 남의 땅에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고, 농토의 63%가 소작지였다.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 초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에 의한 전면적 토지개혁이 이뤄졌다.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 차원에서도 농지개혁을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책임질 초대 농림부 장관에 조봉암을 임명했다.

1949년 6월 "헌법에 의거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농가경제의 자립과 농업생산력의 증진으로 인한 농민생활의 향상 내지 국민경제의 균형과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농지개혁법이 제정됐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3월과 4월 농지개혁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잇달아 공포하고, 농지개혁이 실시됐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은 3000평 이상의 농지에 대해 정부가 지주로부터 땅을 사들여서 소작농에게 파는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식을 취했다. 땅값은 현금이 아니라 유가증권으로 지주에게 줬고, 땅을 받은 소작농은 땅값(수확량의 1.5배)를 5년에 나눠서 현물로 상환하도록했다. 농지개혁을 실시하자마자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957년에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농지개혁으로 전통적 지주제도가 일시에 해체됐다. 특히 3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지주계급들이 받은 지가증권은 휴짓조각이 되어버려, 더욱 빠르게 붕괴했다.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공산화를 막고 자본주의의 기틀인 사유재산제도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반발했다. 당시 남한은 국방과 치안이 극히 불안정한 상태였고, 미국은 1949년 5월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전쟁 발발 이틀만이 27일 새벽 이승만은 서울을 피난한다. 이승만은 3시 30분 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대전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밤 9시 "동포여러분, 미군이 참전했으며 계속 진격하고 있다.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담화를 내보냈다. 전쟁 발발 66시간 처음 대통령의 육성이 나오자 시민들은 이승만이 서울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다음날인 28일 육군은 새벽 2시 30분경 한강 인도교 폭파작전을 시행했다.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3시 다시 대전을 떠나 이리-목포를 거쳐 선박편으로 부산까지 내려갔다.

휴전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3년 6월 당시 이승만은 미국 대사 브릭스와의 회동에서 휴전 후에도 한국을 지켜줄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고립주의'로 흘러가던 미국은 이승만의 제안에 부정적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6월 18일 약 25000명의 반공포로를 직권 석방시켰다. 미국은 조약을 맺는 조건으로 휴전에 응할 것을 제시해 1953년 7월 휴전협상이 체결되었다.

1953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호조약이 체결됐다. 미국은 한국에 2개 사단을 주둔시키기로 결정했고 미국은 2개 사단을 휴전선 서부전선에 배치함으로서 일종의 인계철선 역할을 하도록했다.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함께 미국은 국군 20개 사단을 유지할 수 있는 군사원조를 하기로 결정했다.

발췌개헌과 제2대 대통령 당선

전쟁 중이던 1951년 대통령 임기를 1년여 앞두고 피난 수도 부산에서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제헌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의 간접 선거로 뽑게 되어 있었는데, 당시 국회의 판도로 볼때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1951년 11월 이승만은 국민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3일 뒤에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이승만의 개헌안이 부결됐고 1952년 4월 17일 의원들은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이승만은 이를 막기 위해 1952년 5월 25일 부산에도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대를 동원해 국회 통근버스를 끌고가고 국회의원 10명을 감옥에 가뒀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양원제 두 가지만을 발췌하여 만든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했다. 같은해 7월 4일 야간 국회를 열어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기립투표로 진행된 투표 결과는 출석의원 166명 가운데 163표, 기권 3표로 반대는 아예 없었다. 정치파동에 동원된 경찰, 깡패 등이 조성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1952년 8월 5일 2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고 이승만이 당선됐다.

이승만 대통령 제2대 대통령 취임
이승만 대통령 제2대 대통령 취임
사사오입 개헌과 제3대 대통령 당선

재선한 이승만은 헌법의 3선 금지 조항을 없애고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이승만은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된 민의원 선거에서 개헌에 필요한 의원 수를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경찰의 물리력을 동원해 야당 후보의 등록과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이로써 자유당은 전국 203개 선거구에서 114석을 확보했다. 자유당은 무소속 의원 23명을 영입해 개헌에 필요한 136석을 넘겼다.

자유당은 1954년 9월 7일에 중임제한 철폐 개헌안을 제출했다. 그외에도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의 자동 승계제와 국무총리제 폐지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이승만은 개헌안을 내놓으며 개헌 반대자들을 반역 행위자로 간주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개헌안은 11월 20일에 본회의에 상정되고, 11월 27일에 비밀투표에 붙여졌다. 표결 결과는 재적 의원 203명에 재석 의원 202명,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의결 정족수 136명에 1명 모자라는 결과로 나와 부결로 선언됐다. 그러나 이틀뒤 최순주 부의장은 재적의원 203명에서 의결 정족수인 3분의 2는 사사오입에 따라 135명이지 136명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놓으며 결과를 뒤집었다. 당일 정부는 개정 헌법을 공포했다.

1956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확정했다. 진보당 추진위원회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박기출을 확정했다. 민주당과 진보당추진위원회는 이승만 정권 타도를 위해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다. 1956년 5월 6일 최종 합의 직전 신익희 후보가 열차에서 급서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단일화는 무산됐다.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504만 6000여 표로 52퍼센트의 지지를 받아 승리했다. 조봉암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지만 216만 3000여 표를 획득하며 이승만의 정적으로 떠올랐다. 부통령에는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제치고 장면이 당선됐다.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사법 살인'

조봉암은 대선 직후 창당작업에 들어가 11월 11일에 창당대회를 열었다. 진보당은 1958년 5월 실시될 국회의원 총선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수 있는 20석 이상 확보를 목표로 했다.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올라가자 이승만은 경찰을 동원해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 전원을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검찰은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적용하고 사형을 구형했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은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조봉암의 재심 청구는 같은해 7월 20일에 기각됐다. 다음날 7월 31일 조봉암은 사형당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이 정적 제거를 위해 '사법살인'을 벌였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1년 1월 20일 조봉암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4대 정 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조병옥이 선거를 한달 앞두고 지병으로 쓰러져 사망한 탓에 이승만은 당선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부통령을 뽑는 선거였던 3.15 선거에서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자유당 후보 이기붕의 재대결이 벌어졌다.

1960년 3월, 선거 벽보 포스터
1960년 3월, 선거 벽보 포스터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 반공청년단, 정치깡패 등을 동원해 민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자유당은 투표함을 열기도 전에 경찰과 내무부가 연합하여 투표 결과를 조작한 결과 이승만은 963만337표를 얻었고, 이기붕은 833만 7059표를 얻어 장면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선거직후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선거 무효를 주장했고, 부정선거에 대한 격렬한 국민저항이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됐다. 김주열의 머리에 경찰의 시위진압용 최루탄이 박혀있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를 확대하자 4월 15일 이승만은 담화문을 발표하고 공산부자들이 시위대를 조종하고 있다고 매도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더욱 무력으로 진압하고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이 대학교에 난입하여 무차별 폭력을 행사했다.

4·19시민혁명과 대통령직 사임

4월 19일 서울의 시민과 대학생 및 고등학생 10만 여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실탄을 발포해 100여 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생겼다. 이승만은 내각 총사퇴를 지시하고, 이기붕의 정치 활동을 중단시키고 자신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와 결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물러나지 않았고, 대학교수 258명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해 거리 행진에 나섰다. 결국 이승만은 4월 26일 사임을 발표했다.

4.19 혁명
4.19 혁명

퇴임 이후

이승만은 하야한 뒤 이화장에 거주하다가 5월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승만은 1962년 3월 17일 귀국하려 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1965년 7월 14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고인의 유해는 7월 23일 고국으로 운구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승만
이승만

참고

  • ・ 대한민국 역대 정부 주요정책과 국정운영-이승만·장면 정부, 한국행정연구원, 대영문화사, 2014년
  • ・ 이승만의 삶과 국가, 오인환, 나남, 2013년
  • ・ 대한민국 대통령실록, 박영규, 웅진지식하우스,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