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

한사군

다른 표기 언어 漢四郡

요약 한나라는 BC 108-107년 고조선 옛 땅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 설치하고 관리를 직접 파견해 다스렸다. 한사군은 토착세력의 지속적 저항을 받자 한은 BC 82년에 진번과 임둔의 2군을 폐했고 현도군도 위축되었다.
고조선의 중심부를 차지하던 낙랑군은 강성했지만 토착세력의 성장과 반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가 성장하고 중국 본토의 전후한 교체로 낙랑군과 현도군의 세력은 더욱 위축되어 후한은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본격화된 고구려·백제의 성장은 낙랑군·대방군의 토착인들을 고구려·백제로 이주하게 함으로써 군현의 힘을 갈수록 약화시켰다. 결국 313년에는 낙랑군이, 314년에는 대방군이 고구려에 멸망함으로써 한반도 내의 중국 군현은 소멸되었다.

약 1년에 걸친 전쟁 끝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BC 108년 고조선의 옛 땅에 낙랑(樂浪)·진번(眞蕃)·임둔(臨屯)의 3군(郡)을 설치했고, 이어 BC 107년에는 20여 년 전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던 예맥의 땅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했다.

그리하여 4군을 유주(幽州) 관할 아래 둠으로써 오랜 야욕이던 동방경략을 완성했다. 한은 4군의 산하에 많은 현(縣)을 두고 중앙정부에서 군태수(郡太守)·현령(縣令)·속관(屬官)을 직접 파견해 다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토착세력이 한군현에 대한 저항을 격렬하게 했다. 이에 한은 BC 82년에 4군 가운데 진번과 임둔의 2군을 폐하고 진번의 속현들은 낙랑군에, 임둔의 속현들은 현도군에 속하여 관할받도록 했다. 따라서 수현(首縣)인 조선현(朝鮮縣)을 비롯해 염한·패수(浿水)·점제·수성(遂成)·증지(增地)·사망(駟望)·둔유(屯有)·누방(鏤方)·혼미(渾彌)·탄열(呑列) 등 11현으로 출발했던 낙랑군은 진번군의 속현 15개를 추가로 관할하게 되어 외형상 군세(郡勢)가 크게 증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낙랑·현도 2군에 귀속된 진번·임둔의 속현 전체에 대한 지배는 이미 군현의 통폐합 당시에도 어려웠다. 즉 통합된 다수의 속현에 한의 관리가 파견되지 못하고 토착세력의 거수(渠帥)가 지방관리로 임명되어 군현의 업무를 대행했다. 군현이 통폐합된 이후에도 군현 지배에 대한 토착세력의 반발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예맥 땅 현도군에서의 저항이 심했다. 결국 BC 75년에는 임둔의 속현들을 넘겨받았던 현도군이 고구려족의 반발에 밀려 군치(郡治)인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압록강 중류지역에서 서북의 흥경(興京)·노성(老城) 방면으로 옮겼다.

현도군은 옛 임둔군의 속현에 대한 관할권을 낙랑군에 넘기고 스스로도 고구려·상은대(上殷臺)·서개마(西蓋馬) 3개 현의 4만 5,006호(戶), 인구 22만 구(口)를 거느리는 보통 규모의 군으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현도군의 군치였던 옛 고구려현의 자리는 예맥계의 중심세력으로 새롭게 부상하던 고구려의 중심부가 되었다. 한편 옛 진번군의 15현을 넘겨받았던 낙랑군은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가 어느 정도 가능한 소명(昭明)·대방(帶方)·함자(含資)·열구(列口)·장잠(長岑)·제해(提奚)·해명(海冥) 등 7현만으로 낙랑 남부도위(南部都尉)를 구성했다.

현도군의 퇴축으로 옛 임둔군의 속현마저 군의 관할로 넘겨지자 낙랑군은 지배력 행사가 가능한 동이(東夷)·불이(不而)·잠대(蠶臺)·화려(華麗)·야두매(邪頭昧)·전막(前莫)·부조(夫租) 등 7현만을 다스리는 낙랑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나머지 8현은 방기했다. 2차에 걸친 군현의 통폐합으로 고조선 옛 땅에서의 중국 군현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고조선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낙랑군의 세력은 오히려 증대되었다.

당시 2개의 도위를 거느린 낙랑군은 25개의 속현에 6만 2,812호, 인구 40만 6,748명의 대군(大郡)이었으며 주변의 토착세력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구려·예(濊)·한(韓) 등 토착세력의 성장과 반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고구려족의 저항에 밀려 군치를 흥경·노성 방면으로 옮겼던 현도군은 고구려의 강해진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푸순[撫順] 방면으로 군치를 옮김으로써, 본래의 기능이었던 예맥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다. 중국이 양한(兩漢) 교체기의 혼란에 빠져 이전과 같은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못하게 되자 낙랑군과 현도군의 세력은 현저하게 위축되어갔다.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25년에 즉위해 지방세력을 평정해갔는데, 이당시에 낙랑군에서는 토착인 왕조(王調)가 주도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세력은 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왕조를 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라고 부르며 후한의 지배를 거부했다. 지방세력의 평정을 끝낸 후한 정부가 30년에 왕준(王遵)을 태수에 임명하고 군사를 주어 반란의 진압을 명하자, 낙랑의 한인 속관들은 사태의 추이를 감지하고 왕조를 죽여 반란을 진압했다. 이로써 낙랑군은 비록 반란을 진압했으나 세력은 크게 약화되어 동부도위가 폐지되고 남부도위는 유명무실해졌다.

자립한 동부도위 산하의 7현 거수(渠帥)들은 낙랑에 의한 현후(縣侯)의 임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매개로 낙랑과의 교역을 계속함으로써 자체의 성장과 발전을 꾀했다. 7현 세력 가운데 부조현은 옥저 사회의 중심이 되었고, 동이·불이·화려 등은 동예 사회의 구심으로 성장했다. 7현의 자립으로 말미암아 낙랑군은 18성(城), 6만 1,492호, 25만 7,050구의 규모로 위축되었다. 낙랑군 주변의 고구려·옥저·동예·백제 등의 성장은 낙랑군의 약화를 재촉해, 후한말인 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남부도위에 속했던 둔유현 이남의 옛 진번 7현의 토착민이 한·예 땅으로 대량 이주해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후한말의 혼란을 틈타 랴오둥[遼東]의 지배자가 된 공손씨(公孫氏)가 현도군뿐만 아니라 낙랑군도 지배 아래 두게 되었다. 또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땅에 새로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흩어졌던 주민을 다시 끌어모으는 등 동방 경영에 힘을 기울여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 군현세력은 일시적이나마 세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공손씨의 멸망 후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魏)의 군현이 되어 위의 지원을 받으며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던 동예를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백제와는 통혼관계를 맺는 등 주변세력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후한의 군현축소정책, 공손씨·위·서진(西晉)으로 이어지는 군현 지배세력의 계속된 교체로 한나라와 같은 중국 중앙정부에서의 지방관리 파견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낙랑·대방 등에서 군현관리가 점차 토착인들로 대체되었고, 결국 중국 군현으로서의 성격과 기능을 점차 잃어갔다.

더욱이 후한대부터 본격화된 고구려·백제 등의 국가성장은 낙랑군·대방군 지배하의 토착인들을 동요시켜, 고구려·백제로 이주하게 함으로써 군현의 힘을 갈수록 약화시켰다. 서진대에 이르러 낙랑군은 6개의 통현(統縣), 3,700호의 명목상 군에 불과하게 되었다. 4세기에 들어 북중국이 5호16국시대라는 대혼란기에 빠져들면서 서진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고구려는 낙랑·대방에 대한 공략을 보다 적극적으로 했다. 마침내 313년에는 낙랑군이, 314년에는 대방군이 차례로 고구려에 멸망당함으로써 한반도 내의 중국 군현은 소멸되었다.

랴오둥인 장통(張統)의 지휘 아래 저항하던 2군의 민호 1,000여 가(家)는 요서의 모용씨에게 투항했고, 남은 민호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가거나 백제·신라 등으로 옮겨갔다. 한편 고구려에 의해 푸순 방면으로 쫓겨간 현도군은, 랴오둥군에 속했던 고현(高縣)·후성(候城)·랴오양[遼陽]의 3개현을 넘겨받고 망평현(望平縣)을 되찾아 속현을 7개로 늘리고 군민(郡民)의 수를 증대시켰다. 이같은 조치를 통해 군세를 회복한 현도군은 중서부 만주의 부여와의 연계를 강화해 랴오둥군과 함께 랴오둥 방면으로 고구려의 세력 확대를 막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세력 확대에 따라 현도군은 계속 위축되었다. 서진시대에 이르러 현도군은 고구려·망평·고현 등 3개현에 3,200호를 거느린 소군(小郡)에 불과하게 되었다. 서진 멸망 후 현도군은 선비족 모용씨의 왕조 전연(前燕)에 속했다가 고구려 광개토왕의 랴오둥 경략시 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소멸되었다.

연구사

한4군에 대해서는 설치 여부, 위치와 강역, 변천과정과 성격, 주민구성 등을 아직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4군에 대한 직접적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한4군을 보는 관련학자나 국가의 입장이 크게 다른 것과도 관계가 깊다. 중국과 일본 학계가 한4군의 설치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한국 고대사에서의 역할을 필요 이상으로 중시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한4군의 설치 자체를 부정하거나, 인정해도 그 역할과 의미를 제한적으로만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한서 漢書〉 등 중국 사서뿐만 아니라 〈삼국유사〉 등의 국내 사서에서도 등장하는 한4군에 대해서 한과 고조선의 무력대결과정에서 한4군의 설치가 논의되었을 뿐이며, 실제로는 한의 랴오둥군 내에 명목상으로만 존재했을 뿐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고조선 말기의 영역이 압록강 이북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보고, 한4군의 위치를 한반도 내에서 찾는다. 또한 낙랑군과 현도군 등 주요군현이 멸망 이전까지는 한족관리에 의해 운영되어 중국 군현으로서의 성격과 역할을 일정하게 담당하고 있었다고 본다.

일본의 시각도 기본적으로 중국과 같으나, 고고학적 발굴성과의 축적을 통한 구체적인 고증을 시도하고 있는 점에서 한반도 내의 한4군 설치설을 중국보다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20세기 전반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시 식민사관의 한 줄기인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한4군에 대한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리하여 이마니시 류우[今西龍], 나까 미찌요[那珂通世], 시라또리 구라끼찌[白鳥庫吉] 등이 주도함으로써 평양 일대의 낙랑유적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을 했다.

일본 학자들은 평양지역의 수많은 널무덤[土壙墓]과 벽돌무덤[塼築墳], 한나라의 봉니(封泥)·동경(銅鏡)·인장류(印章類) 등을 발굴해 대동강 남안 조선현설, 나아가 평안남도·황해도 일원의 낙랑군설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물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에서는 중국·일본과 달리 말기의 고조선이 서쪽으로는 다링 강[大凌河], 남쪽으로는 예성강에 이르는 지역을 강역으로 하고 있었으며, 수도인 왕검성(王險城)은 랴오허 강[遼河] 부근에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낙랑군 등 한의 군현은 랴오허 강 일대에 설치되었으며, 설치 후 고조선 유민의 반발이 심하자 곧바로 폐지되었다는 입장이다.

또한 낙랑유적으로 알려진 평양 일대의 1~3세기 유적은 고조선 멸망 후 그 유민이 평양일대에 세운 낙랑국의 유적이며, 고분에서 발견되는 중국 계통의 유물들은 지배계급의 수입품이거나 중국계 이주민·망명객의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실학 이래의 견해를 재해석하거나 이를 보완·발전시키는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성격 및 주민 구성에 관해서는 전한시대의 중국 군현적인 색채가 후한시대부터는 크게 퇴색되어, 위진시대에 이르면 낙랑군과 공손씨가 설치한 대방군은 중국계 이주민 집단의 자치구역 또는 중국과 동방사회와의 교역을 중개하는 토착세력 중심의 교역도시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 같이 관련학자 및 국가의 접근 시각에 따라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르는 등, 객관적 이해와 접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4군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는 위치 및 강역고증 중심에서 벗어나 군현의 존재방식, 시기에 따른 성격, 주민구성 내용과 변화과정, 유물·유적상의 문화적 특성 등에 대한 다양하고 종합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고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