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고조선

다른 표기 언어 古朝鮮

요약 일반적으로 BC 2333년에 단군왕검이 세웠다는 신화상의 단군조선과 BC 108년 중국 한나라에 의해 멸망된 위만조선을 함께 포함해 말한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신화적으로 정리된 것으로서, 그 연대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석이 계속 나오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서북부에 청동기문화가 발전하는 과정과 고조선사회의 발전과정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목차

접기
  1. 위치
  2. 국가형성과 사회성격
  3. 종족
  4. 멸망

고조선이라고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BC 2333년에 단군왕검이 세웠다는 신화상의 단군조선과 BC 108년 중국 한나라에 의해 멸망된 위만조선을 함께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신화적으로 정리된 것으로서, 그 연대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석이 계속 나오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서북부에 청동기문화가 발전하는 과정과 고조선사회의 발전과정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치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아직까지 학계의 통일된 정설은 없다. 다만 현재까지 발표된 다양한 견해들을 대략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고조선은 처음부터 망할 때까지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위치했다는 견해이다.

고조선
고조선

문헌상의 근거로는 〈사기〉 조선전에 조선과 연(燕)의 경계로 표시하고 있는 패수(浿水)를 청천강으로,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단군이 도읍으로 정한 아사달(阿斯達)을 평양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의 무제에 의해 설치된 4군 중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일대에 다수 분포하고 있는 한식 유적·유물들을 통해 볼 때 지금의 평양 일대였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도성이었던 왕검성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의 위치는 자연히 평양 일대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고조선의 영역은 현재의 평안남도 일대로 국한되는 셈이다.

이 견해는 낙랑군의 위치나 고조선 최후의 단계인 위만조선 도성이었던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올바른 해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고조선 역사와 문화의 기원은 위만조선보다 훨씬 이전 시기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위만조선의 위치만으로는 전체 고조선의 위치를 논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다음은 현재의 중국 랴오닝 성 일대에 위치했다는 견해이다.

이는 중국의 고문헌에 나타나는 강이나 산 등의 위치 비정에 의해 패수를 다링 강으로, 열수를 랴오허 강으로 본 결과 나타난 견해이다. 또한 여기에 청동기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뒷받침되기도 했다.

고조선 전기의 문화는 비파형동검 문화이며 비파형동검은 랴오허 강을 중심으로 한 랴오닝 성 일대에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고조선의 영역은 남만주 일대와 한반도 서북부를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이럴 경우 평양 일대임이 분명한 낙랑군의 위치와 맞지 않는 점과, 과연 청동기 전기에 이처럼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는 영역국가가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이동설이 있다.

이 견해는 고조선의 전기 단계에는 현재의 랴오닝 성 일대에 고조선의 중심이 위치했으나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공 이후 서쪽 영토 2,000리를 빼앗기고 그 중심지가 평양 일대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BC 4세기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는 랴오닝 성 일대였으나, 위만조선의 도성인 왕검성이나 낙랑군의 치소(治所)인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일대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도 앞의 두 견해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비파형동검 문화가 랴오닝 성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그 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세형동검의 중심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북지방이라는 점이다. 이동설은 몇 가지 세부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고조선의 위치문제에 관해서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으로 간주되고 있다.

국가형성과 사회성격

고조선은 청동기문화의 발전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애초부터 국가의 형태를 띠고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남만주와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분포하던 여러 세력집단들이 청동기문화의 난숙과 철기문화의 보급이라는 과정 속에서 이합집산과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국가를 형성했던 것이다.

고조선이 비록 국가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주변세력에게 하나의 구분되는 집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BC 7세기경이었던 것 같다. 중국측 자료인 〈관자 管子〉·〈산해경 山海經〉 등에는 이미 조선이라는 세력의 존재가 나타나고 있다.

이 단계는 비파형동검 문화의 발전기로서 랴오닝 성 일대의 각 지역 집단 사이 또는 집단 내에서 경제적 우열의 차이가 발생한 것이 인정되지만 계급분열과 이를 공고히 하는 장치인 국가의 발생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국가의 발생은 이보다 훨씬 뒤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 '범금8조' 단계에 가서야 확인된다.

비파형동검
비파형동검

범금8조는 〈한서〉 지리지에 낙랑조선의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다. 8개의 조항 중 3가지만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임을 당한다.

둘째,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보상한다. 셋째, 도둑질한 자는 남자일 경우에는 피해자의 노로 삼고 여자일 경우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배상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사람당 50만의 돈을 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사회에 이미 노예의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며 아울러 사유재산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범금8조가 반영하고 있는 사회상은 사유재산의 발생에 기초한 계급분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범금8조는 노예의 지속적인 공급을 보장하고 노예소유자들의 계급지배를 공고히 해주는 법이라고 볼 수 있다.

범금8조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의 고조선 사회의 형편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대체로 BC 1000년 후반기,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단계의 산물이 아닐까 추정된다. 한편 중국측 사서에 의하면 고조선은 BC 4세기 후반경에 스스로 왕을 칭할 정도였고 연(燕)과 전투를 벌여 서쪽땅 2,000리를 상실하기도 했다.

이는 역으로 고조선이 이미 2,000리 이상의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따라서 고조선은 늦어도 BC 4세기경에는 상당한 정치적 발전이 있었고 국가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의 사회구조는 불분명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앞의 범금8조에서 보았듯이 기본적으로 노예와 노예소유자 간의 대립관계를 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청동기문화 단계의 씨족장 또는 지역수장이 전화(轉化)하여 나타난 노예소유자들은 경제적 부와 정치권력을 독점했으며 이러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법과 정치제도를 만들어냈다. 노예를 포함한 피지배계급들은 직접 생산에 종사하면서 사회의 기층을 이루었다.

물론 노예도 아니고 노예소유자도 아닌 일반 평민들도 광범위하게 존재했을 것이나 이들도 또한 국가 또는 노예소유자의 지배 속에서 항상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종족

고조선의 주민을 이룬 기본종족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민족의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나 아직 구체적인 양상은 알 수 없다. 고조선과 관련시킬 수 있는 종족집단으로서는 당시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 서북지방에 분포하던 숙신, 조이, 예와 맥, 동호, 산융, 호맥 등을 들 수 있으나 이중에서 예맥을 제외하고는 직접 고조선과 연관되는 집단은 없다. 다만 고조선의 기본종족이 예족 또는 예맥이냐, 아니면 고조선은 기본적으로 조선족으로 구성되고 주위에 예 혹은 예맥족들이 거처하고 있었느냐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멸망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는 위만조선이다.

위만조선은 BC 2세기초 무렵 중국 연나라에서 망명해온 유망민들을 규합해 당시 고조선의 왕이었던 준왕을 내몰고 왕위에 오른 위만에 의해 세워진 국가이다. 위만은 보다 발달된 철기문화를 가지고 이주하여 토착 고조선인들과 연합하여 국가를 건설했다. 사서에 나타난 바로는 상비적인 군사조직과 공적 권력기구로서의 통치기구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왕(王)·비왕(裨王)·상(相)·장군(將軍)·대신(大臣) 등을 들 수 있다.

위만조선은 발달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진번·임둔 등의 주변 세력들을 누르고 한반도 중부 이남의 여러 세력집단들과 중국 한(漢)과의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부를 취했다.

한편 한(漢)은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하던 흉노에 대한 정벌이 일단락되자 위만조선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BC 109년 한의 무제는 수륙양면으로 대군을 파견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했다. 왕검성을 배경으로 벌어진 수개월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위만조선은 멸망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위만조선의 지도층이 분열되어 결국 당시 왕이었던 우거가 주화파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한은 위만조선의 땅에 4군(四郡)을 설치하여 토착세력들을 통솔하려 하였으나 곧 치열한 항쟁에 부딪쳐서 진번(眞番)·임둔(臨屯), 뒤이어 현도군(玄菟郡)까지 축출되었다. 다만 낙랑군만이 위만조선의 도성이었던 왕검성을 기반으로 장기간 존속하면서 토착세력들이 성장을 방해했으나 이 역시 313년 한반도로부터 축출당했다.→ 기자조선, 단군조선, 위만조선

고조선(古朝鮮)
고조선(古朝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