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학

고문학

다른 표기 언어 Kuwenhsueh , 古文學

요약 중국 진대(秦代) 이전에 사용되던 문자인 과두문(蝌蚪文)으로 씌어진 경전을 주로 연구하던 경학(經學).
(병). Guwenxue. (웨). Kuwenhs대체이미지eh.

금문학(今文學)과는 상대되는 것으로, 실증을 중시하고 체계적인 훈고법을 통해 경전을 연구했다.

〈이아 爾雅〉〈설문해자 說文解字〉가 이러한 연구의 주요성과이다. 시황제의 분서(焚書)로 전한(前漢) 초기의 경서는 모두 당시에 통용되던 예서(隸書), 즉 금문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전한 중기인 한 무제(武帝) 말기에 이르러 노(魯)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 집을 헐다가 그 벽에서 당시에 통용되던 금문이 아닌 고대문자로 씌어진 〈고문상서 古文尙書〉·〈예기〉·〈논어〉·〈효경〉 등을 발견했다.

오늘날에는 〈설문해자〉나 위(魏)나라 때 만들어진 〈정시석경 正始石經〉 등에 의해 그 대체적인 모양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한대에 발견된 몇몇 고문경들이 있는데, 장창(張蒼)의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과 하간(河間)의 헌왕(獻王)이 수집한 고문헌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고문경들은 당시 우세하던 금문경파에 눌려 비부(秘府)에 사장된 채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한말에 이르러 유흠(劉歆)이 고문학을 따르는 학파의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됨에 따라 금문학파·고문학파의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금·고문학의 논쟁은 단순히 문자가 서로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경전의 이해나 해석의 차이 때문에 비롯되었다.

고문학파는 공자를 사가(史家)로 보면서 그가 다룬 6경(六經)을 모두 역사적 자료로 여겼기 때문에, 각 경전에서 다룬 내용이나 선정의 전후를 따져서 6경의 차례를 〈주역〉·〈서경〉·〈시경〉·〈예기〉·〈악경〉·〈춘추〉로 했다. 이에 비해 금문학파는 공자를 교육자·철학자·정치가로 여기고, 6경을 고대의 사료로 인정하면서도 공자가 이것을 '탁고개제'(託古改制)의 도구로 삼았다고 보아 문장 안의 역사적 사실보다는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고문경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주례 周禮〉의 주관(周官)편을 중시했으며, 한대 왕망(王莽)의 변법(變法)이나 송대(宋代)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은 모두 주관편을 이론적 근거로 삼은 것이다.

한대를 통해 금문학과 고문학은 서로 대립했지만, 후한말에 이르러 정현(鄭玄)이 고문학을 위주로 금문학·고문학을 절충·종합함으로써 이 둘의 대립은 해결되었으며, 학문적 성과에 입각하여 고문학의 우위가 입증되었다.

결국 후한시대부터 고문학이 크게 성행하여 경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6조(六朝)·수(隋)·당(唐)대의 경학도 고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고문학은 송·명대에 이학(理學)의 발달로 잠시 쇠퇴했지만, 청대(淸代)에 이르러 다시 성행하게 되었으며, 훈고방법이 더욱 치밀하게 되어 고적정리와 언어문자의 연구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주역〉·〈서경〉·〈시경〉 등은 금문학·고문학 양파의 교재였지만, 〈주례〉와 〈춘추좌씨전〉 등은 고문학파에서만 사용했다.

〈춘추좌씨전〉은 특히 〈춘추〉의 전(傳)으로, 금문학파에서 사용하고 있던 〈춘추공양전 春秋公羊傳〉의 학(學)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개별적인 고문학설로는 후한의 반고(班固)가 찬집한 〈백호통의 白虎通義〉, 허신(許愼)의 〈오경이의 五經異議〉, 하휴(何休)의 〈공양묵수 公羊墨守〉 등이 알려져 있다.→ 금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