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학

금문학

다른 표기 언어 Chinwenhsueh , 今文學

요약 한대(漢代)에 통용되던 문자 즉 예서로 씌어진 경전을 주로 연구하던 경학.
(병). Jinwenxue. (웨). Chinwenhs대체이미지eh.

한대에 이르러 효혜제(孝蕙帝)는 진(秦)나라에서 행해지던 협서의 금법을 해제했고, 효문제(孝文帝) 때에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을 개방하여 헌서를 장려하기까지 했다. 이에 종래 구전되어 오던 유가의 각종 경전이 당시 통행되던 예서로 옮겨져 조정에 헌상되었다. 이때 헌상된 경서는 당시 통행되던 글자로 씌어졌다고 해서 금문경이라 불렸다. 호무생(胡毋生)과 동중서 이후 유학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의 중흥을 도모했던 한 무제(武帝)는 〈시경 詩經〉·〈서경 書經〉·〈예경 禮經〉·〈춘추 春秋〉의 금문경을 더욱 후대하여 학관에 14박사를 두었다.

고문학이 훈고학적인 실증을 중시한 것에 비해, 금문학은 사설을 중시하고 음양오행설과 참위설 등을 이용해 경전을 연구했다.

금문학은 전한(前漢) 때 성행했으나, 전한 중기 이후로 고문학에 눌려 점차 쇠퇴하다가 동진의 원제(元帝) 때는 완전히 없어져 고문학만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대에 이르러 도광제와 함풍제(咸豊帝) 이후에 춘추공양학을 중심으로 한 금문학이 다시 경학을 주도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공양학을 제창한 사람은 장존여(莊存與)이며, 이후 유봉록(劉逢錄)·공자진(龔自珍)·위원(魏源)·왕개운(王闓運)·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담사동 등의 근세 사상가에 의해 공양학이 연구되었다. 그들은 한초 경학의 명물훈고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경서를 기본으로 삼았고 정치적 문제의 해결에 주력했으며, 현실적·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학파의 사상적 경향은 구제강[顧頡剛]이나 후스[胡適]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고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