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김기림

다른 표기 언어 金起林 동의어 인손, 寅孫, 편석촌, 片石村
요약 테이블
출생 함북 학성, 1908. 5. 11
사망 미상
국적 한국

요약 시인·평론가·영문학자. 주로 미지에 대한 호기심∙ 이국적 정취에 탐닉하는 글을 썼다. 대표작으로 <기상도>, <바다와 나비>, <새노래>가 있다.

목차

접기
  1. 모더니즘 시세계
  2. 모더니즘 시론
김기림
김기림

본명은 인손, 호는 편석촌(片石村). 영국 비평가 I.A. 리처즈의 이론을 도입해 모더니즘 시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에 따른 시를 썼다.

19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立敎] 중학에 편입했다. 1926년 일본대학 문학예술과에 입학, 1930년 졸업 후 바로 귀국했다. 같은 해 4월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으며, 이듬해 고향에 내려가 무곡원(武谷園)이라는 과수원을 경영했다.

1933년 이태준·정지용·이무영·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했다. 1936년 일본 센다이[仙臺]에 있는 도호쿠대학[東北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3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해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계속했다. 1942년에는 경성중학교 영어 교사를 지냈는데, 이때 배운 제자가 시인 김규동이다.

1945년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중앙대학교·연세대학교 강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조교수, 신문화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1946년 2월 8일에 열린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에서 '조선 시에 관한 보고와 금후의 방향'이라는 연설을 했다. 같은 해 임화·김남천·이태준 등이 중심이 된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여 시부위원회(詩部委員會) 위원장을 맡았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88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더니즘 시세계

1930년 〈조선일보〉에 G.W. 라는 필명으로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과 평론 〈오후와 무명작가들-일기장에서〉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문학을 하게 된 동기를 "우연히 신문기자였던 까닭에 출장갔던 기행문을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지 별다른 동기는 없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1940년 〈문장〉 1월호에서 밝혔듯이 "한 가지 문학을 한다는 것만은 스스로 결심했고 무엇이고 값있는 것을 만들어보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집으로 〈기상도 氣象圖〉(1936)·〈태양의 풍속〉(1939)·〈바다와 나비〉(1946)·〈새노래〉(1948) 등을 펴냈다.

시 〈기상도〉는 전 7장의 장시로,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읊은 작품이다. 문장을 토막지어 행으로 처리하고, 허사(虛辭)를 행의 첫머리에 두고 있다.

이 작품은 엘리엇의 장시 〈황무지〉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회화성 및 문명비판과 휴머니즘 정신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그의 시는 기본적으로 여행시(旅行詩)라고 할 수 있는데, 소재가 대개 도시·문명·기계·바다·항구·기차 등으로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신기함, 그리고 이국적 정취에 탐닉하는 것을 주조로 했다.

제2시집 〈태양과 풍속〉에서는 비판의식과 풍자 태도가 한층 약화되고 경박함에 그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그 경박함은 순간적인 재치나 기발한 위트, 말장난으로 나타났다.

그후 발표한 〈바다와 나비〉(여성, 1939. 4)·〈공동묘지〉(인문평론, 1939. 10) 등은 이국 여행에서 지쳐 돌아와 현실에서 자기 존재를 깨닫는 모더니즘 시의 본보기가 된다. 해방 후에는 〈파도 소리 헤치고〉(신문예, 1945. 12)·〈지혜에게 바치는 노래〉(해방기념시집, 1945. 12)·〈새나라 송〉(문학, 1946. 7)·〈인민공장에 부치는 노래〉(문학평론, 1947. 4) 등에서 해방의 감격과 새 나라 건설에 대한 의지를 읊었다.

이때의 시론은 이전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시 경향은 오히려 낭만주의에 기우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모더니즘 시론

김기림(金起林)
김기림(金起林)

김기림의 모더니즘 시론은 1920년대초 우리나라 시문학의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와 1920년대말부터 1930년대초까지 목적성에 치우치는 프로 문학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평론〈시인과 시의 개념〉(조선일보, 1930. 7. 24~30)·〈시의 기술·인식·현실 등 제문제〉(조선일보, 1931. 2. 11~14)·〈시작에 있어서의 주지주의적 태도〉(신동아, 1933. 4)·〈현대예술의 원시에 대한 욕구〉(조선일보, 1933. 8. 9~10) 등을 발표하여 기존의 감상주의적 경향을 비판했다. 즉 감상주의는 눈물과 슬픔 등의 과잉정서에서 오는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이것을 극복한 건강하고 명랑한 정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성에 호소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시의 음악성 및 시간성을 비판하고, 회화성·공간성·감각성을 강조하면서 정지용·신석정·이상·김광균 등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1934~35년에 세계정세가 위기에 처하자 현대문명의 비인간성에 반대하고 휴머니즘을 내세웠다. 또 자신의 초기 모더니즘 시론이 문명예찬 및 기교주의에 치우쳤음을 비판하고, 사상과 기교가 통일된 '전체로서의 시'를 제기했다. 이와 같은 생각은 평론 〈신휴머니즘의 요구〉(조선일보, 1934. 11. 16)와 〈오전의 시론〉(조선일보, 1935. 4. 20~5. 2)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인문평론, 1939. 10)에서는 당시 문단의 위기를 경향파와 모더니즘의 종합이라는 방식으로 타개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침탈이 극심해져 민족의 언어보존조차 어려운 때였으므로 그 해결책은 공허한 것이 되었다. 한편 그는 '과학적 시학'이라는 시비평 원리를 모색하기도 했는데, 이는 언어학·심리학·사회학 등의 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평론집으로 '문학의 과학'을 내세운 〈문학개론〉(1946)과 1930년대 영미의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우리나라 시단의 분위기를 바꾸어놓은 〈시론〉(1947), 영국의 비평가 리처즈의 심리학적 이론에 따라 계몽적인 시론을 펼친 〈시의 이해〉(1949) 등이 있다. 그밖에 수필집으로 〈바다와 육체〉(1948)를 펴냈고, 소설과 희곡을 5~6편씩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