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문학

라틴 문학

다른 표기 언어 Latin literature 동의어 로마문학

요약 라틴어로 씌어진 작품들의 총체.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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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 라틴 문학
  2. 중세 라틴 문학
  3. 르네상스기 라틴 문학

라틴어가 구어로 쓰이던 로마 공화정과 로마 제국 시대로부터 종교의식·학문·관료계급의 언어로 사용되던 중세와 르네상스기에 걸쳐 라틴어로 씌어진 작품을 통틀어 라틴 문학이라고 한다.

고대(고전) 라틴 문학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 기초를 두었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 라틴 문학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나름대로의 뚜렷한 특성을 지녔으며, 그 아름다움과 활력은 그리스적 요소 위에 거친 라틴적 요소가 가미되어 생겨난 것이었다.

BC 1세기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라틴어로부터 〈아이네이스 Aeneid〉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하고 세련된 시어를 만들어냈을 때도, BC 3세기 시인들의 미숙한 시에서 나타나는 거친 두운법 등 초기 특성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산출한 대부분의 문학 장르, 즉 서사시·극·서정시, 또다른 개인적 유형의 시들, 역사, 웅변, 철학 등은 그리스인들에게서 전수받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더하여 로마인들은 풍자(문자적으로는 '雜記'라는 뜻)와 소설(당시에는 뚜렷한 명칭이 없었음)을 창조했다.

고대 라틴 문학

그리스 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최초의 중요한 라틴 작가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BC 284경~204경)가 그리스인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원래 그는 그리스 식민지였던 타렌툼에서 풀려난 노예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Odyssey〉를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단편들만 보더라도 호메로스의 방대한 어휘력에 필적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라틴어의 잠재된 자원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끌어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라틴어의 전반적인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밖의 초기 라틴 작가로 엔니우스(BC 239~169)와 그나이우스 나이비우스(BC 270경~200경)가 있는데, 이들은 현존하는 얼마 안 되는 작품보다는 라틴 문학의 전성기를 예고했다는 점에서 가치있게 평가된다. 플라우투스(BC 254경~184)의 희곡은 메난드로스 같은 그리스 극작가들의 작품을 인용하고 당시 로마인의 생활을 다양하게 시사하는 등 여러 가지 요소를 써서 희극적 오페라와도 유사한 대중 오락물을 만들어냈다는 데 그 매력이 있다.

그가 쓴 130편의 희곡 가운데 현재 21편이 남아 있다. 테렌티우스(BC 186/185~159?)도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인용했으나 그는 구성의 통일성과 자연주의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대사를 보면 로마 구어체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자 철학가인 루크레티우스(BC 1세기에 활약)는 라틴 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 De rerum natura〉에서 그리스의 에피쿠로스 학파로부터 계승한 우주의 원자론적 해석을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개진하고 있다. 그러한 해석이 도출하는 결론, 즉 죽으면 끝이므로 쾌락이야말로 인생에서 유일하게 실현가능한 목표라고 하는 것은 쾌락주의를 위한 근거가 되기보다는 엄격하고 우울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역설적 효과를 낳고 있다.

엄격한 철학적 탐구보다 철학의 절충주의를 채택했던 키케로(BC 106~43)는 정치가·변호사·웅변가이자 방대한 양의 서간문 작가로, 해박한 이론가이고 능숙한 운문가(그러나 시인이라고는 할 수 없음)였다(키케로 시대). 그가 남긴 작품들은 로마 공화정의 역사와 당대의 성향 및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가장 방대하고 유일한 자료이다.

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44)의 작품은 분명하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언어 속에 선동적 요소를 감추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비평집 Commentaries〉은 단순히 갈리아 정복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정복의 의심스러운 면을 윤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BC 31년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즉위)가 로마 세계의 실제적인 권력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라틴 문학은 작가가 활동을 계속하거나, 혹은 살아 남아 재산을 유지하려 하거나 현체제에 적응하려는 필요성에 따라 좌우되었다.

따라서 많은 작가들은 부유하고 교묘한 수완가인 가이우스 마이케나스(BC 70경~8) 등이 이끄는 강력한 문학동인에 들어가려고 했다. 공화정 시기에는 작가들이 공인(公人)을 비판해도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카툴루스(BC 84경~54경)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비난하는 시를 썼다. 그는 감정적이고 솔직한 작가로서, 그의 시에서 '레스비아'로 등장하는 악명높은 클로디아와 자신 사이의 연애사건을 육체적인 황홀경에서부터 고통스러운 결말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묘사했다.

그는 섬세한 감각적 시로부터 호되고 가차없는 논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문학적 범주를 갖고 있었으며, 이후로도 기술적 탁월함에 관한 한 그를 능가하는 작가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라틴 시에서 발군의 재능을 보인 사람은 베르길리우스(BC 70~19)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을 받았으며,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는 황제숭배를 은근히 지지하기도 했다. 그전에 쓴 작품들로는 그리스 작가 테오크리토스의 〈목가 Idylls〉를 본떠 쓴 10개의 전원시로 이루어진 목가집과, 농사에 대한 교훈시인 듯하지만 사실상 고도로 정교하고 때로는 서정적이며 뛰어난 묘사력을 지닌 〈농경시 Georgics〉 등이 있다.

그는 호라티우스(BC 65~8)를 마이케나스 동인에 소개하기도 했다. 호라티우스는 〈송시 Odes〉·〈서정시 Epodes〉·〈풍자시 Satires〉의 정교함·유머·창의력으로 당대 최고의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시는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만큼 감추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비판의 대상이나 연애의 대상도 실제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작중 인물들은 극히 인간적이어서 호라티우스는 종종 로마 인도주의자의 본보기로 평가되기도 했다. 도시 출신의 오비디우스(BC 43~AD 17)는 호라티우스보다 신중하지 못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흑해의 벽지로 추방당했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변형담 Metamorphoses〉으로 이것은 일련의 변형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긴 서사시이다.

또다른 장르에서 솜씨있는 이야기꾼으로는 역사가 리비우스(BC 59~AD 17)가 있다.

그의 간추린 로마 역사에는 초기 로마의 전통적 가치들에 대한 찬미와 아우구스투스가 그것들을 다소나마 회복시킬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을 능숙하게 묘사했으나 통일성없는 문체로 일부 동시대인들에게 세련되지 못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시작된 왕위계승에 대한 공포는 역사가 타키투스(AD 56경~120경)에 의해 힘있고 반어적이며 계속해서 놀라움을 안겨주는 문체로 묘사되었다.

수에토니우스(AD 69경~122 이후)의 작품은 선정주의와 한담(閑談)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가치가 떨어지나, 아우구스투스의 서한을 위시하여 황제들의 전기(傳記)에 관한 몇몇 귀중한 자료들을 담고 있다. 자연사에서는 플리니우스(23~79)가 대표적인데 그는 과학적 연구를 위해 분출하는 베수비오 화산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다가 죽음을 당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미덕은 존재하지만 결국 타성과 부패로 인해 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도덕적 비관론을 작품 속에 반영했다.

그밖의 도덕주의자로 시인 유베날리스(50/65~127 이후)는 〈풍자시 Satires〉에서 로마의 도덕적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당대에 만연해 있던 저속과 타락을 임상적으로 정확히 묘사했다. 그가 썼던 대다수의 시는 친구인 마르티알리스(38/41~103경)의 풍자시(경구)처럼 외설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로마인들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따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1세기에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가 쓴 〈사티리콘 Satyricon〉을 소설 외의 장르로 보기는 어렵다.

이 작품은 크게 뛰어나지 못한 두 젊은이의 모험을 그린 것으로 장황하고 산만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현존하는 것은 엄청나게 방대한 작품의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 작품은 그리스어 인용구를 비롯한 여러 인용구를 섞어 썼으며, 상류사회의 언어는 아니겠지만 평범한 구어체 라틴어의 위상을 가늠케 해준다.

특히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민이 된 세속적 졸부가 펼치는 향연인 트리말키오의 축제는 명랑하고 기억할 만한 삽화이다. 〈사티리콘〉은 고대 사회에서는 곧 잊혀졌다가 비교적 현대에 와서 다시 부상했는데, 이는 그것이 20세기 독자들로서는 놀라울 만큼 솔직하고 직접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 라틴 문학

4세기에 그리스도교가 도처에 퍼지기 시작하고 5세기말 이교도들이 로마를 정복하자 라틴 문학의 원칙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원래 라틴어는 로마라는 문화 도시에 거주하는 로마 제국의 지배계층에 의해 사용되었지만 중세에는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종교의식·신학·역사학의 언어로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라틴어는 서유럽의 수도원과 성당학교에서 문학으로 보존되었으며, 중세 고전문헌과 그리스도교의 문화를 전수하는 주요하고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종교상의 라틴 문학은 발전하는 서구 그리스도교 사회, 특히 로마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

종교상의 필요에 따라 새 어휘들이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라틴 문학은 더욱 다양해졌다. 일상어의 관용어뿐만 아니라 옛 라틴어판 성서도 이러한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3~4세기의 아프리카 작가들인 테르툴리아누스, 미누키우스 펠릭스, 키프리아누스, 아르노비우스, 락탄티우스 등이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창시자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교의에 대하여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교양있는 그리스도교 교인들이 세속 문학 및 문화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를 논했다.

여기에서 전직 수사학 선생이었던 그는 그리스도교 교인들이 세속 학문의 방법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편 성서의 '소박한 문체'에도 그 나름의 수사학이 있다고 지적했다. 히에로니무스도 같은 문제로 고심했으나 불가타 성서(그가 라틴어로 번역한 성서로서 중세 전반에 영향을 미쳤음)를 써서 그리스도교 라틴어의 본보기를 만들었다. 많은 시인들이 수사학적 방법을 받아들여 교양있는 독자들을 위해 서사적 문체로 종교시를 썼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유벤쿠스, 세둘리우스, 빈의 아비투스, 아라토르, 드라콘티우스, 프루덴티우스, 놀라의 파울리누스 등이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를 대표하는 작가들은 루피누스, 술피키우스 세베루스, 오로시우스 등이며 그들의 작품은 중세에 널리 읽히고 사용되었다. 5세기의 이교도 작가인 마크로비우스와 마르티아누스 카펠라도 수세기 동안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4세기에 나온 가장 독창적인 문학작품은 라틴어로 된 찬송가였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는 찬송가를 작곡했고, 성(聖) 암브로시우스가 작곡한 곡들은 뒷날 찬송가집의 핵심을 이루었다.

보이티우스카시오도루스는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6세기의 인물로, 전자는 중세 문학과 철학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고 후자는 이후 수세기 동안 준수된 교안(敎案)을 만들었다.

보이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보이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엔노디우스와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 학계에 남아 있던 세속주의를 드러내보이는 시를 썼다.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 이탈리아문화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보내 영국인들을 개종시킴으로써 라틴 문학의 궤도에 새로운 민족을 등장시켰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작품들은 그의 천재와 함께 당시 학문의 쇠퇴를 보여준다. 카롤링거 왕조(8~9세기) 때에는 샤를마뉴의 계몽적 지도하에 라틴 문학이 부흥했다. 학자인 알퀸과 오를레앙의 시인 테오둘프는 이 시대에 활약했던 가장 뛰어난 문학가로서 역사·전기 작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운율의 성시(聖詩)와 세속적인 시를 썼다.

영국에서의 라틴 문학은 7세기에 셔번의 대주교 앨드헬름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의 산문과 시는 아일랜드의 전통과 로마에서 도입된 새로운 학문의 혼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성(聖) 가경자(可敬者) 비드는 라틴 문학을 부흥시키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 그의 교회사는 탁월한 자료이다. 7가지 학문을 기초로 하는 그의 학습안은 아헨 왕실학교의 교장이 된 알퀸을 비롯해 카롤링거 시대의 학문 부흥에 있어 가장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한 요크의 학교에서 사용되었다.

수도원 시대에 이어 12세기에는 대학의 전신인 성당학교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랭스의 제르베르와 샤르트르의 퓔베르가 감독하는 가운데 작가들에 대한 지적인 지원과 더불어 더욱 폭넓은 학문세계가 확립되었다. 베르나르 실베스트리스와 알렝 드 릴은 영향력있는 플라톤주의자였다.

몬머스의 제프리(1155 죽음)가 쓴 〈영국왕 열전 Historia regum Britanniae〉은 낭만적 이야기가 크게 흥미를 끌던 시기에 전대미문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와 동시에 역사에 관한 저술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는데 대표적 작가들로 겡블루의 시주베르, 노장의 기베르, 오르데릭 비탈리스, 맬메스베리의 윌리엄, 생 드니의 쉬제르, 프라이싱의 오토, 티로스의 기욤, 삭소 그라마티쿠스 등이 있으며 후에 매슈 패리스 등이 활동했다.

중세 라틴어의 가장 독창적인 시적 창작물은 미사를 드릴 때 복음서와 서신서 낭독 사이에 부르는 속창(續唱)이다.

이것은 시적 산문으로 시작되었는데, 9세기 생갈 성당의 노트케르 발불루스가 창시자는 아니지만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12세기경에는 정교한 운율과 리듬을 갖출 만큼 발전했고, 생빅토르 성당의 아담의 시퀀스에 이르러 가장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냈다.

11세기 후반부터는 경건하고 종교적인 문학활동이 더욱 융성해졌다. 캔터베리의 안셀름은 그의 〈모놀로기온 Monologion〉·〈프로슬로기온 Proslogion〉·〈왜 신이 인간이 되었는가 Cur deus homo〉를 문학적 형식으로 저술했다.

그의 기도문들은 개인적 신앙운동에 큰 자극이 되었는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이 기도문들을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전달했다. 생티에리의 기욤과 리보의 아엘레드도 이러한 신앙운동에 참여했다. 기고의 명상록은 중세 라틴 문학에서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생빅토르 출신의 위그와 역시 생빅토르 출신의 리샤르는 보수신학을 대표했다. 신앙문학은 영국에서는 햄폴의 리처드 롤, 유럽 대륙에서는 토마스 아 켐피스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르네상스기 라틴 문학

라틴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단테에서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를 거쳐 알베르티노 무사토, 콜루키오 살루타티, 레오나르도 브루니,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교황 피우스 2세) 등과 관련을 맺고 있다.

시에서는 고전적 원형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산문에서는 새 시대의 징후들 중 하나였던 풍요한 문학, 즉 인문주의적·역사적·과학적·철학적·종교적 제영역의 매개체로서 여전히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15~16세기 이탈리아의 3대 학문중심지는 피렌체·로마·나폴리였다. 포조, 마르실리오 피치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폴리티안, 프란체스코 란디니 등은 피렌체 학파에 속했으며, 로마 학파에는 피에트로 벰보, 조반니 코타, 마르코 비다 등의 인물들이 있었다. 나폴리 학파에서는 조반니 폰타노가 뛰어났다. 카르멜 수도원의 원장인 유명한 바티스타 스파뇰리(만토바노)는 탁월한 운문작가로 그의 전원시는 널리 읽혀졌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전원시가 가장 인기있는 장르였다. 르네상스 이후에도 수세기 동안 학문에서는 라틴어가 계속 사용되었으나, 순수한 문학적 사용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18세기 초반까지는 라틴어가 여전히 역사와 과학연구에 사용되는 세계적 언어였으나, 점차 서유럽 국가들은 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 자국의 언어(일부는 고전 라틴어에서 파생됨)를 사용했으며 라틴어는 더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