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셀모

안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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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033/34, 롬바르디아 아오스타
사망 1109. 4. 21, 잉글랜드 켄트 캔터베리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1163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4월 21일. 중세의 대표적 철학사상인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
(영). Saint Anselm of Canterbury.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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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활동
  3. 캔터베리 대주교 시절
  4. 구원에 관한 보속론
안셀모(Anselmu)
안셀모(Anselmu)

개요

근세에는 존재론적 신(神) 증명과 속죄 또는 구원에 관한 보속론(補贖論)의 고안자로 평가되었다.

존재론적 신 증명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자라는 관념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의 현존을 증명한다는 내용이다. 보속론은 피해를 받은 사람의 지위에 따라서 배상이나 보상을 하게 한 봉건적 이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때 무한한 신이 피해받은 쪽이고 인간이 가해자이다.

초기생애와 활동

안셀모는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피에몬테 지방에서 태어났다.

고향 아오스타는 알프스 계곡의 그랑생베르나르 고개와 프티생베르나르 고개가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로마 제국기와 중세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어머니 에르멘베르가는 유명한 부르고뉴 가문 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곤돌포는 롬바르디아의 귀족으로 안셀모가 정치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청년기에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결심한 것에 반대했다. 안셀모는 훌륭한 고전교육을 받았으며, 당대의 뛰어난 라틴어 학자로 평가받았다.

초기 교육의 영향으로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었으며, 그의 글은 명료하기로 유명했다.

1057년 베크(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루앙과 리지외 사이에 있음)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아오스타를 떠났다. 그 수도원의 저명한 부원장 랜프랭크 아래서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베크에 가는 도중에 그는 랜프랭크가 로마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리옹·클뤼니·아브랑슈에서 보낸 뒤 수도원에는 1060년에 들어갔다.

1060(또는 1061)년에 수사가 되었다. 이곳에서 높은 지적 능력과 깊은 신앙심을 인정받아 1063년 랜프랭크가 캉의 대수도원장이 되어 자리를 옮기자 그의 후임으로 수도원장이 되었다. 1078년 베크의 대수도원장이 되었다. 1077년에는 몇몇 동료 수사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독백론 Monologium〉을 썼다. 신학 논문인 〈독백론〉은 변증론적·종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논문은 신의 현존과 속성을 초기의 중세 사상가들처럼 통상적으로 권위에 호소하지 않고 오직 이성에 의존하여 논증하려 했다. 안셀모는 정의·지혜·힘과 같은 완전함의 여러 측면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하여,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규범이 있고 인간의 정신이 이 절대규범을 이해할 수 있다고 논증했다. 안셀모에 따르면 이 규범은 바로 신, 즉 완전함의 절대적·궁극적·총괄적 기준이다.

안셀모가 대수도원장으로 있을 때 베크는 수사들의 수련과 신학탐구의 중심이 되었다.

그때까지 랜프랭크가 저명한 신학자였지만, 안셀모는 그를 능가했다. 안셀모는 신의 본성과 현존에 관한 물음에 만족스럽게 답하려고 계속 노력했다. 〈대어록(對語錄) Proslogium〉은 원제가 〈지성을 찾는 신앙 Fides quaerens intellectum〉으로 신의 현존에 관한 존재론적 논증을 확립했다. 그는 이 책에서 아무리 바보일지라도 어떤 존재가 현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존재관념보다는 더 나은 존재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존재는 현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존재의 관념은 그 존재의 현존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론적 논증은 같은 시대의 수사인 마르무티에의 고닐로가 쓴 〈신은 없다고 말하는 바보들을 위한 변명 Liber pro insipiente〉에서 도전을 받았다. 고닐로는 어떤 존재에 관한 관념이 객관적인 질서 속에서 그 존재의 현존을 함축한다는 주장과 신에 대한 직접적 직관이 신의 현존을 함축한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안셀모는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고닐로에 대한 반박서 Liber apologeticus contra Gaunilonem〉를 썼는데, 이것은 〈대어록〉의 존재론적 논증을 반복한 것이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시절

1066년 노르망디 점령을 실현한 잉글랜드의 '정복왕' 윌리엄은 베크 수도원의 후원자였으며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 있는 땅을 이 수도원에 하사했다.

안셀모는 이 땅을 둘러보기 위해 잉글랜드를 3차례 방문했다. 이 방문기간에 안셀모는 체스터에 수도분원을 세웠는데, 정복왕 윌리엄의 아들이며 계승자 윌리엄 2세 루퍼스는 그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했다(1093. 3). 이 관구는 1089년 랜프랭크가 죽은 이래로 줄곧 공석이었으며, 그 사이 국왕은 관구의 수입을 몰수하고 토지를 빼앗았다.

안셀모는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가 내키지 않았으나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수락했다.

그는 윌리엄 2세가 캔터베리에 땅을 되돌려주고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 대신 우르바노 2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할 때까지 대주교 부임을 거부했다. 병에 걸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던 윌리엄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안셀모는 1093년 12월 4일 정식으로 캔터베리 대주교에 부임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병에서 회복되자 안셀모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요구했고, 안셀모는 이를 성직매매 행위(성직 임명에 대한 보답)로 보고 거절했다.

안셀모의 거절에 맞서 윌리엄은 안셀모가 로마에 가서 우르바노 2세로부터 팔리움(교황청의 대주교 승인을 상징하는 예복)을 수여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왕이 우르바노 2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안셀모는 본질적으로 성직과 관련된 문제에 왕이 개입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서임논쟁(敍任論爭), 즉 주교와 같은 성직을 그 직위의 상징물을 가지고 임명할 1차적 권리가 세속적 지배자(황제 또는 왕)에게 있느냐, 아니면 교황에게 있느냐 하는 논쟁에서 주요인물이 되었다.

이 논쟁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1095년 3월 11일 로킹엄 교회회의에 모인 잉글랜드의 주교들은 안셀모가 아니라 왕의 편에 서 있었다. 교황의 사절이 로마에서 팔리움을 가지고 왔을 때, 안셀모는 그것을 윌리엄 2세로부터 수여받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자기의 정신과 성직의 권위가 왕에게 빚진 것으로 비추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2세는 안셀모가 로마로 떠나는 것을 허용했으나, 그가 떠나자 캔터베리의 땅을 몰수했다.

1098년 안셀모는 이탈리아 바리 공의회에 참석하여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왕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그리스 교회에 맞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하나인 '필리오케'(Filioque:'그리고 성자[聖子]로부터')에 관한 교리조항을 옹호하는 등 공의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스 교회는 1054년 이래로 서방교회와 분리되어 있었다. 서방교회측의 신조 해석에 가미된 필리오케에 관한 교리조항은 성령(聖靈)이 성부(聖父)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지적했다.

그리스 교회는 필리오케 조항이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바리 공의회는 세속 관리가 성직을 임명하는 데 반대하여 초기의 법령을 거부했다.

구원에 관한 보속론

안셀모는 잉글랜드를 떠날 때, 미완성 원고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 Cur Deus homo?〉를 간직하고 있었다.

바리 공의회 후에 카푸아 근처 리베리 마을로 물러나 1099년 그 저서를 완성했다. 이 저서는 구원보속론에 관한 고전적 연구서가 되었다. 봉건적 사회구조에 바탕을 둔 이 이론에 따르면,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신에게 죄를 지었다. 봉건사회에서 가해자는 피해자의 지위에 따라서 피해자에게 보상 또는 보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왕에 대한 죄는 귀족이나 농노에 대한 죄보다 더 많은 보속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신에게 결코 보속할 수 없으므로 영원한 죽음만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다시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주는 수단은 신-인(神人: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다. 신-인의 무한한 능력에 의해 인간은 협동적 재창조 행위 속에서 정화된다. 안셀모는 인간이 그의 죄 때문에 악마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견해를 반박하고, 구원의 본질을 성찬식(聖餐式) 속의 그리스도와 개별적으로 통합하는 데서 찾았다.

세례(이것에 의해 개인은 교회와 통합됨)는 성찬식에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를 완성한 뒤, 안셀모는 1099년 부활절에 로마에서 열린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했다. 1년 뒤 윌리엄 2세가 사냥을 하다 의문의 사고로 죽자, 동생 헨리 1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았다.

헨리 1세는 교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안셀모가 잉글랜드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했고 안전을 보장했다. 안셀모는 잉글랜드에 다시 돌아갔으나, 헨리 1세가 성직의 영적 상징물을 가지고 성직자를 임명할 권리를 고집하자 곧 왕과 결별했다. 3차례에 걸쳐 왕은 그러한 권리를 요청했고, 교황은 그때마다 이를 거부했다. 이 기간중 안셀모는 1103년 4월부터 1106년 8월까지 추방되었다. 이 논쟁은 웨스트민스터 교회회의에서 타결되었다. 왕은 성직의 상징물인 반지와 지팡이를 가지고 주교와 대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왕은 주교와 대수도원장이 축성에 앞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웨스트민스터 협약은 보름스 협약(1122)의 한 본보기가 되었으며, 이 협약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한동안 성직을 둘러싼 논란을 해소했다.

안셀모는 평화롭게 2년의 여생을 보냈다.

1163년 시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법규와 함께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1118?~70)은 안셀모를 성인으로 시성해달라고 교황에게 탄원했다. 안셀모는 이 무렵에 성인으로 시성된 것 같다. 이는 1170년 캔터베리 대주교구의 기록에 대성당 내에 새로 마련된 안셀모 묘소의 참배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수세기 동안 안셀모는 일정지역 내에서만 존경을 받아왔다. 1720년 교황 클레멘스 6세(1700~21 재위)는 안셀모를 교회학자로 선언했다.